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복음을 소개했고(로마서 1장 2~4절) 끝내면서 다시 복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은 짧지만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합니다. 두 번째는 이 복음이 어디에서 왔는가? 복음의 출처와 복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복음이 온 결과, 복음이 전파된 후 효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1.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25상 반절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원어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카이”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있답니다. 카이(kai)는 “그리고, 또한, 마찬가지로”란 뜻이랍니다. 본문을 카이를 넣어서 읽으면 나의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나의 복음이라는 독특한 표현에 대해 알아봅니다. 나의 복음이란 표현의 의미를 가장 잘 전해주는 부분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서 데려왔을 때 고백입니다.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합니다. 뜻은 내 분신과 같아집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분신 관계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도 같이 아픕니다. 나의 복음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분신과 같고 복음이 없이는 바울도 없습니다.
나의 복음이란 표현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도 녹아 들어간 표현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와 아이는 보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국 지역인 다메섹까지 가서 여인들까지 색출해서 넘겼습니다.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옆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음성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바울 개인만 들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은 원수인 사도바울을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나의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찾아 주신 경험이 녹아든 표현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다 개인적으로 상황이 다르게 예수님을 만난 나의 복음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2. 감추었다가 나타난 복음, 계시 된 복음
25절 하반 절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 했습니다. 26절 상반 절은 그러다“이제 나타내신바” 되었습니다. 26절 하반 절은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전파 방식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되었습니다. 복음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찾아왔습니다. 본문에는 3번이나 강조합니다. “나타내셨다. 알게 하셨다. 계시를 따라 되었다.”라고 합니다. 계시는 외부에서 와야 합니다.
실화 하나만 소개합니다. 1964년에 도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주 경기장이 좁았던 것 같습니다. 확장 공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작업자들이 스타디움 주변의 집 지붕을 벗기려다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도마뱀의 꼬리 위쪽에 못이 박혀서 꼼작 못하고 계속 몸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인부들은 3년 전 집을 지을 때 못이 꼬리 위쪽에 박혔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들은 3년을 도마뱀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지켜봤습니다. 얼마 후 놀랍게도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 주는 겁니다. 한번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먹이를 물어다 주는 도마뱀이 친구인지, 엄마인지, 자매인지는 모릅니다. 이들이 계속 먹을 걸 물어 주어 3년을 살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인부들은 이어 그 도마뱀을 고통에서 해방해 줬답니다. 도마뱀이 3년을 산 원인이 외부에서 먹을 걸 물어다 줬기 때문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해봅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믿음도 내가 믿어서 된 그것이 아닙니다. 도마뱀처럼 하나님이 주셔서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도 하나님이 명하셨고, 나타내셨고, 전파되었고, 계시하셨고,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칫하면 노력하자, 운동하자, 열매 맺자 같이 행위 중심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율법 중심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바탕으로 내용을 더 확대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8복을 말씀하셨습니다. 8 복도 우리가 엄청난 노력을 해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헬라어의 원어에 가깝게 직역을 하면 뭔가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 절에 있는 상태에 놓인 자는 뒤에 상태에 자연스럽게 놓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심령을 가난하게 하자. 온유해지자. 긍휼히 여기자. 그러면 뒤엣것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이 그들의 것인 상태가 되니까 복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애통해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에 위로가 따라오기 때문에 복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부분도 기뻐하려고 억지로 노력하고. 감사하려고 억지로 노력하면 기쁜 일과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해석하면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가난한 해석이랍니다. 본문도 어떤 상태를 규정하고 있다고 보면 좋습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 받은 자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상태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는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열거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 열매도 내가 힘껏 노력하여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님 내주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로 보아야 합니다.
3. 복음의 결과는 믿어 순종케 하고 견고하게 한다.
26절을 보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결과는 ㄴ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자는 견고하게 하십니다. 복음이 견고하게 된다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교제하겠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도바울은 얼마나 견고한 신앙인지를 확인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고 예루살렘 방문계획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40명이 바울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단일까요?” 아닙니다. 암살단입니다. 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의지가 단호했는지 바울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이런 상황을 예견한 바울 주변의 성도들이 모두 만류합니다. 심지어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는(행21:10-12) 바울을 만나자 허리띠를 풀고 그걸로 자기 손발을 묶고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묶여서 죽는다고 적극적으로 말렸습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합니까? 사도행전21:13절“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도 내놓습니다. 그 정도로 견고함이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바울의 자기 의지의 결단으로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안에 어쩔 수 없이 밀어붙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을 가진 자, 복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에 대하여 몇 가지 사례를 알아봅니다. 사형 집행장에 가 보면 복음이 사람을 얼마나 견고하게 하는지 볼 수 있답니다. 복음 영접한 사형수는 “내가 진작 복음을 알았더라면 이렇게는 살지 않았을 텐데.” 후회하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기도하며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지 않은 사람, 평생 자기 주먹 하나 믿고 산 사람은 “이놈들 너희가 나 죽이고 편히 살 줄 아느냐?” 소리치고 원망하고 발악하면서 간 다 합니다. 복음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견고하게 합니다.
독일의 암 병동에서 혀 암에 걸려 수술을 앞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사, 간호사, 여러 보조 의사들이 수술대 주변에 빙 둘러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 땅에서 마지막 말이 예수님이었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사람이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입원 한 달 내내 의사, 간호사, 주변인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고함치며, 절규했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히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묻지도 못했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묻지를 못했답니다. 이 사람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답니다. 1980년 4월 16일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세상을 떴습니다. 그가 떠나고 프랑스 신문들이 기사를 썼답니다.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였답니다.
복음으로 견고해 진 자의 고백이 그 유명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3:17-18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는 님 없다.”라고 있습니다. 사흘 굶어 보면 “하나님이고 뭐고, 구원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합니다. “구원이 밥 먹여 주냐!” 합니다. “진리가 밥을 먹여 주냐?”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요즈음 모 야당 대표는 “먹사니즘”이 최고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라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하박국은 열매와 소출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다양한 필요가 충족되지 못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입니다. 구원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입니다. 나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특별한 믿음이라면 구원 하나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앞으로 올 영원한 세상을 얻었기 때문에 설령 세상에 있는 것이 결핍이 있더라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신앙의 최종 지향점은 하늘입니다. 하늘에 산소 망이 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또 복음으로 견고해진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합니다. 감사와 관련한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날 구원 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2절에 보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 안에서 만사형통이면 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나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하실 때도 그 주권을 인정해 드릴 수가 있습니까? 아픔, 슬픔, 장미꽃 가시, 외로운 가을날과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가 할 수 있습니까? 내 속에서 만들어진 복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는 자들은 처음에는 좋지 않은 상황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자들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7절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마지막 송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란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할 때인 로마서 1장 1절도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6장 27절 끝날 때도 예수 그리스도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도 항상 이런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말짱 꽝인 자들입니다.
도마뱀 예화를 다시 한번 상기해보십시오. 현재 우리의 육체는 묶여있는 도마뱀처럼 아직 완벽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죄에 유혹이 있고, 죄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신자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는 자들입니다.
이 갈등에 대하여는 롬7:22~24절에 잘 나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옛날 로마제국에서 사형수를 처벌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기가 죽인 사람의 시신과 얼굴과 몸을 똑같이 포개어 묶어놓는 형벌이 있었답니다. 시신의 코와 코, 입술과 입술, 배와 배, 무릎과 무릎을 맞대어 놓습니다. 시신이 썩어가면서 나오는 독소 때문에 같이 죽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입니다. 본문 사망의 몸은 이런 상황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 구원받은 이후에 내적 갈등을 실감이 나게 표현한 부분입니다. 성도는 죄와 전혀 상관없고 죄를 아예 안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향하여 늘 넘어지는 자신을 목격하고 내적 갈등을 겪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등으로 끝나면 절대 안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마5:4절을 참고하면서 결론을 내겠습니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받을 것임이요” 본문의 해석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애통하자가 아니고 얘통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뒤에 위로가 오는 상태가 되어 복이 있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본문에 애통하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고 애통하는 극심한 슬픔이랍니다. 그리고 위로받는다는 뜻은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애통을 신자에게 적용하면 신자의 겉 사람과 속사람 간의 내적 갈등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2개의 자아가 생깁니다. 속사람과 겉 사람, 옛사람과 새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새로운 자아 곧 새 생명을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반대로 옛사람은 끊임없이 반대로 죄를 향해 가려고 합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갈등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을 바로 이럴 때 위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초청된다, 불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이 복되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늘 죄 앞에서 넘어지고 내적 갈등을 겪는 자들인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결국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되어 위로받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이 없었으면 어떡 할 뻔했나?”하고 예수님 뒤에 숨는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매 순간순간 예수님 안에서 위로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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