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넬로 동화 예화
오늘은 동화하나 소개하면서 시작 할까 합니다. 나무 나라 이야기입니다. 나무로 만든 인형만 사는 나라가있습니다. 재질만 나무지 사람하고 똑같이 도시를 이루고 삽니다. 이들은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잘하는 것이 있으면 몸에 금별을 붙여주고 못하면 흑점을 붙입니다. 나무 칠이 벗겨져도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검은 점을 붙였습니다. 금별을 가장 많이 붙인 나무사람이 시장입니다. 시장은 거만하여 검은 점이 많은 사람을 무시합니다. 검은 점별만 붙인 나무 사람이 있는데 이름이 펀치넬로입니다. 그는 나무 나라의 가장 소외된 사람입니다. 펀치넬로는 늘 기죽고 죽눅들어 삽니다. 그런던 중 금별, 점별 아무것도 안붙은 친구 소개로 자기를 만든 목수를 찾아갑니다. 목수는 거인입니다. 그는 펀치넬로를 손바닥으로 들기도 합니다. 목수가 말합니다. "나는 너를 만들 때 아주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단다. 그래서 남과 비교할 필요가없다. 비교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점별, 금별이 달라붙는다."라고 합니다.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이 안붙는 다는 겁니다. 펀치넬로는 목수의 말을 듣고 문을 나서며 아마 그럴지도 몰라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흑점 하나가 뚝 떨어져 날아가면서 동화는 끝납니다. 맥스루카이도 목사가 쓴 "너는 특별하단다."란 동화입니다. 주인공 펀치넬로는 광대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는 광대의 영어이름에서 따왔답니다.
오늘 본문이 이 동화가 많이 생각나게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성도도 하나님이 선택한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별하게 부른자녀입니다. 오늘 본문 통하여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회 문을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9장에서 구원론을 확대합니다. 구약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죠? 유대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 이들을 택한 하나님의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 말씀이 폐하여 진 것인가?"하는 의문이듭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 답을 줍니다.
바울의 동족에 대한 슬픔(로마서 9:1-5)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다고 합니다. 말하는 사람 곧 화자에 대하여 신뢰하도록 합니다. 연쇄 살인범이 나와 "내말은 이제부터 참말입니다."하면 신뢰감이 없습니다.
신뢰감이 있은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빤히 보고 있기 때문에 참말이라합니다. "내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 할 수있겠는가?"라는 말과 같은 뉘앙스입니다.
바울은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합니다. 슬픔은 가식적인 악어의 눈물이 아닙니다. 진정성 있는 깊은 슬픔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슬픈 이유는 3절에 언급합니다.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자기동족이 구원받지 못하여 슬픕니다. 동족구원 열망이 얼마나컸으면 자기가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할 정도입니다. 진짜 끊어진다가 아니라 반어법입니다.
유대 동족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을 사사건건 반대했습니다. 불독처럼 바울의 복음역사를 따라 다니며 물고 늘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 때 죽이려고 40인 암살특공대도 조직했었습니다. 이 지경까지 갔으면 바울도 같이 미워할 법합니다. "이 원수들아! 잘됐다."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원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괴로워했습니다. 동족을 나의 형제로 부릅니다. 바울은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입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뜨거운 가슴도 있는 사람입니다. 로봇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역사는 뜨거운 가슴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형제애 아무 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나는 끊어져도 동족은 살리는게 좋다는 마음이 진심인 근거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합니다. 이것이 복음정신입니다. 나는 죽고 너는 살리는 정신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유대인의 사도가 체질에 맞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체질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체질을 부인하고 이방인의 사도가됩니다. 자기 기호,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성령의 뜻에 순종하여 이방인의 사도가되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성령의 뜻을 따랐습니다. 본문에 성령 안에서는 이런 의미가 담겼습니다.
계속 본문1,2절에서 내 양심이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양심과 나를 분리합니다. 양심과 나를 별개로 취급합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저희 아들 어릴 때회사에서 퇴근 하려는데 전화가왔습니다. 아들은 "게임 절제해야해! 빨리와!"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견하게도 게임도 다 절제하고"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게임 절제가 아니고 제 카드로 게임 결재해야 하니 빨리오라했다고 금방 양심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양심이 무뎌지기쉽습니다. 양심은 내 안에서 나를 감시하는 독립기관으로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의 소리들어야 합니다. 양심이 괴로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심은 내면에서 잘못 할 때 쏘는 화살입니다. 나를 아프고 괴롭게 만듭니다. 양심의 소리를 계속 외면하면 무뎌집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고도 합니다. 얼마 전 끔찍한 강남납치 살해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양심이 무너진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양심이 무뎌지지 않으려면 항상 비추임 받아야합니다. 본문을 참고하면 성령님과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양심을 갈고 닦아야하고 양심에 귀 귀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 본문은 바울이 동족들이 가졌던 특권을 나열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특별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예수 그리스도가가 이들을 통하여 오심이 가장 큰 특권입니다. 이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고 만물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머리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글의 흐름을 무시하고 예수님이 나오면 벅차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찬송을 올리는 모습 봅니다.
4절에서 특권들을 보면 먼저 양자의 특권입니다. 양자는 오늘날 우리 성도가 양자되었다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왕과 그의 백성 정도의 관계를 말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격한 민족이란 뜻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 광야에서 불기둥과 물기둥으로 인도 받은 사건 등 다 목격한 민족입니다. 또 언약을 받은 민족입니다. 언약은 쌍방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언약이라합니다. 또 이들은 율법을 직접 받았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하는 법도 알려 준 민족입니다.믿음의 조상들도 소유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로마서 9:6-13)
6절을 보십시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은 이스라엘의 특권을 나열하고 나서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본문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뜻이 무엇이죠? 초당에 순두부 마을에 가면 원조 따집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도 참이스라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별도로 택한 참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합니다. 본문 "폐하여졌다." "None effect"로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조건과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는 실패하지 않았고 효력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참이스라엘이란?
참이스라엘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2가지를 구약사건을 예로듭니다. 참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부르신 자들만입니다. 첫째 증거로 이스마엘과 이삭을 예로듭니다. 7절에서 9절까지 입니다.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이스마엘은 하나님 뜻과 무관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합작품으로 하갈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난 자녀입니다. 본문 9절은"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합니다. 명년은 그 다음 해를 말합니다. 당시 사라와 아브라함의 몸상태는 아이를 나을 상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99세, 사라90세입니다. 이들에게 이삭이 태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적 일으키려면 바로 그 다음날, 한달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임신기간을 다 고려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지만 자연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중요하다.
본문8절에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뜻은 "존재하도록 부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하나님의 약속활동으로 존재케된 자."가 이삭입니다. 약속의 백성이 아니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혈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혈통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자동구원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날도 "나는 기독교국가에서 태어났으니 자동구윈이야, 나는 믿는 부모에게서 났으니 자동구윈이야, 나는 3만명 대형교회 소속이니까 자동구원이야!"하기 쉽습니다. 침례라는 형식만 통과하면 자동구원이야하는 생각도 맞지않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혈통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약속으로 존재케된 사람이 이삭만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하고 언약적 의미가담긴 자녀만이 참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우선의 법칙, 하나님의 선택우선법칙이 적용된 자여야 참이스라엘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이런 탄생 과정을 거친 제2의 이삭들입니다. 우리도 신령한 출생을 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초자연적으로 새생명을 주셔서 존재케 된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특별한다는 두번째 예를 하나더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서와 야곱입니다.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
본문 마지막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뜻은 에서를 싫어하는 감정표현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표현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택했다. 택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과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름이 다 두 자인데 이스마엘만 4자인가요? 차이는 어머니가 같고 다른 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난 시간 차도 없고, 어머니도 같은 태였고, 태어나서 어떤 선악의 행동도 하기 전에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으로만 선택된 사람입니다. 부르심은 우리 행위와 무관합니다. 또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식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을 쓰십니까? 그래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할 수없는 방식으로 일합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죽은자를 살려냅니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태초부터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태어난 이후 구원도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방식은 오로지 주권자요 전능자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만이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폐하여 지지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잘하나 잘못하나 지켜 보다 잘하면 구원하는 방식이라면 우리 구원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가 훼손되는 셈입니다. 하나님 미리 다정했으니 전도할 필요없다고 삐딱선을 타는 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선택하고 부르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하나님은 구원 역사에 우리의 손과발과 입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도 이삭과 야곱같이 약속과 부르심에 의하여 존재케된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자들입니다. 골3장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특별한 자들입니다. 펀치넬로같이 비교우위로 주눅들 필요없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 선택으로 구원하셨기에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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