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양심을 따르라
사도바울은 로마서12장부터 신앙의 실천문제를 다룹니다. 오늘 본문이 마지막 권면입니다. 지난 시간까지는 아디아포라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헬라어 아디아포라의 뜻은“아무래도 좋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 시조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시조가 있듯이 성경에 직접적인 명령이 없는 문제 즉 비본질적인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디아포라의 예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고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결론은 먹고 안먹고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먹는 다고 정죄하지 말고 못 먹는다고 비난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먹을 자유를 가진 자가 약한자를 위해 절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소한 일로 교회 분열 예화
미국의 한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잘 짓고 나서 성도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분열의 이유가 심각한 교리 문제가 아닙니다. 카펫의 색깔을 빨간색으로 까느냐 아니면 노란색으로 까느냐의 문제였답니다. 카펫을 무지개 색으로 깔든, 하얀색으로 깔든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이와 비슷한 비본질 적인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는 꼴보기 싫은 사람이 너무 많아 못가겠다.” “교회에는 쓸만한 총각이 거의 없어 못가겠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아디아포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비본질을 절대화하고 독선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부인이 실수로 접시를 깨면 이혼사유로 삼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의 신앙 자세
15장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담당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7절도 비슷한 권면입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7절에서는 서로 받아주라고 권면합니다. 받으라고하여 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약자가 강자를 섬깁니다. 특히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습니다. 사자와 얼룩말이 친구 먹는 거 보셨습니까? 이를 약육강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사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제가 사는 집이 이안아파트입니다. 주차난이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공룡주차장이 생겨서 아주 편리해졌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차장 바로 붙어서 GS마트가 최근 새로 생겼습니다. 저는 속으로 뭐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100미터에서 200반경 안에 큰 GS마트 2개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CU도 1개 있습니다. 24시간 무인편의점 신 구멍가게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이를 비집고 GS마트가 또 들어 온 겁니다. 저는 속으로 “상도덕이 없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같이 죽자는 건가? ”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어느새 그 GS에 라면을 사러 갔습니다. 저희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웠고 30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먹고 사는 세계가 그야말로 약육강식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라
확대하면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뭐라고 권면합니까?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는 세상과 정확히 반대의 가치관입니다. 사랑의 세계, 은혜의 세계, 영적인 세계의 가치관은 세상과 다릅니다. 강자가 약자를 감당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하고 받아줘야 공동체가 살고, 영적인 생명력이 살아납니다.
여기계신 성도님들은 본인이 약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고, 약한 자에게도 강점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에니어그램이라고 사람의 성격을 9가지로 분류합니다. 성격유형검사(KEPTI)가 이렇게 분류합니다. 첫째가 개혁자형입니다. 이 형은 도덕적으로 완벽주의자고, 아주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반면 단점은 편협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둘째는 협조자형입니다. 이 사람은 감정이 풍부합니다. 반면 의지가 약합니다. 셋째는 동기부여자형입니다. 이 형은 자신감이 있고 야심가고 최고가 되려합니다. 약점은 고집이 셉니다. 넷째는 예술가형입니다. 이 사람은 직관적이고 동정심이 많고 개성이 강합니다. 반면에 우울하고 광기가 있습니다. 다섯째는 사상가형이 있습니다. 이 유형은 탁월한 지각을 가졌고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형입니다. 약점은 편집병적일 때가 있습니다. 여섯째는 충성가형이 있습니다. 이런 형은 감정에 호소하고 사랑받는 사람이고 장난기도 있고 유머도 있는 아주 좋은 형입니다. 약점은 너무 의존적입니다. 일곱째는 만능선수형입니다. 이 형은 순발력이 강합니다. 신바람 나게 삽니다. 단점은 즉흥적이고 지구력이 약합니다. 여덟째는 도전자형입니다. 이 형은 자신이 일단 옳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이런 형의 약점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한답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가 중재자형입니다. 이런 형은 수용능력이 있고, 신뢰할 수 있고 느긋하고 낙천적입니다. 약점은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큰일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형에 속합니까? 혹시 예술가형하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의 똘 끼를 받아주어야 예술가형하고 살수가 있습니다. 제가 왜 9가지 유형의 강점과 약점을 소개하는가하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에 서로 담당하고 서로 받으라는 것은 남의 강점은 밀어주고 약점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해야한다.
바울의 두 번째 권면은 2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1절 하반절과 이어져서 성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남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창세기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아담부부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기 전에는 기쁘게 해야 하는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첫째 하나님을 가장 먼저 기쁘시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하와를 기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여기에 참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 이순서가 뒤엉키고 거꾸로 되었습니다. 아담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와에게 죄의 원인을 전가 했습니다. 핑계를 대었습니다. 죄는 기쁘게 하는 순서를 다 무너트렸습니다. 세상이 불행하게 된 원인은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이 사회도 마찬가지고, 국가도 만찬가지입니다. 건전한 가정, 건전한 사회, 건전한 국가가 되려면 나보다는 남을, 자신보다는 이웃을 기쁘게하여야 합니다. 선진국의 지표를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잘 보호하는 장치가 많은가로 선진국을 판가름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제도가 많이 강화가 되었습니다.
부서진 공동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좀 더 이 논조를 확장해 봅니다. 누가복음은 무너진 공동체, 부서진 공동체를 많이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6장19절부터 보면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오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비유로 지옥의 고통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그 이면에 각박하고, 삭막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왕같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초호화 파티를 즐겼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온몸이 종기가 나서 성하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부자의 대문 앞에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울 채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동네 들개들이 날름 먼저 집어먹었습니다. 나사로의 상처까지도 핥아먹었습니다. 그러다 이 거지는 그냥 그 대문 앞에서 쓸쓸히 죽어갔습니다.
부서진 공동체: 재판장과 울부짖는 과부의 비유
누가복음 18장2절부터 보면 한 도시가 나옵니다. 이 삭막한 도시에 과부와 재판장이 살았습니다. 재판장은 사회 지도층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는 원한을 가진 과부를 한 마디로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적 최약자였습니다. 당시는 여성이 12-13세에 결혼 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으면 경제능력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낳으면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을 외면했습니다. 밤낮 간절한 울부짖음을 외면하다가 나중에 귀찮고 짜증나서 들어준다는 비유입니다. 물론 본문도 기도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삭막함을 충분히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부자는 불쌍한 거지 한사람 마당 한편에 들어오게 해 밥 한 그릇 차려주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를 재판장은 자기 발의 떼 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두 비유는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는 사회의 단면입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공동체가 무너졌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삭막한 도시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된 질서를 바로 잡으십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기쁘게 하는 사회. 재판장이 과부를 기쁘게 해주는 사회가 건전한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 적용
교회도 하나의 작은 공동체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공동체인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 기쁘게 하려는 공동체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할 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이 강단에 세우신 목적이 자기를 기쁘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할 때 부담이 되는데,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본문 말씀의 의도만 순수하게 드러내려는 마음이 생겼고 부담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서로 영적인 유익을 나누라: 빌드업 정신
본문 2절 하반 절을 계속 보십시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하고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본문의 뜻은 “서로 영적인 유익을 주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선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행동”을 선이라고 정의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뜻은 타인의 믿음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서로 영육 간에 유익을 주어 교회를 잘 세우라는 권면입니다. 본문에 세운다는 뜻은 영어로 “빌드업”이라고 씁니다. 빌드업은 요즈음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특히 축구에서 많이 씁니다. 빌드업 단어의 뜻은 차근차근 쌓아올린다는 뜻입니다. 축구 공격수는 자기 혼자 상대 골대까지 몰고 가서 골인을 넣지 못합니다. 수비수부터 시작하여 미드필더로 연결해 주고 미드필더에서 최전방 공격수까지 차근차근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격하는 전술이 빌드업전술입니다. 축구는 11한 명이 원 팀이 되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최근 아시안게임 4강전이 있기 전에 모 두 선수가 멱살을 잡았다느니, 주먹을 날렸다느니 하는 좋지 못한 소문이 났었습니다. 이러면 빌드업이 안 됩니다. 요즈음 노래에서도 빌드업이란 표현을 씁니다. 서로서로 도와서 최상의 하모니를 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도 빌드업 정신이 필요합니다. 교회 빌드업 철학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있으면 안됩니다. 어떤 교회는 한 사람의 스타 목사가 신앙을 좌지우지 하다 문제가 생깁니다. 강한 자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까? 이해심이 큽니다. 넉넉합니다. 그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받아 줍니다. 이런 환경도 저런 환경 다 넉넉하게 이해하고 이겨냅니다. 반면 약한 자는 어떤 이미지가 있습니까? 남을 이해 못하고, 작은 일에도 걸려 넘어지고, 오해 잘합니다. 속된말로 밴댕이 속 같다고 말합니다. 약해서 민감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만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대할 때 어떠합니까? 똥오줌 다 받아주고 응석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빌드업 하고, 약한자도 강한 자를 빌드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또 강해져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어린 디모데에게 딤후2: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우리 모두는 강할 수가 있습니다. 약학자를 빌드업 해줄 수 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담당함에 본이 된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강자가 약자의 연약함을 감당한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외모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정말 마른 새순 같이 볼품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누구보다 강하셨습니다. 그 강함으로 죄로 연약해진 인류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조금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 만민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침 뱉고 조롱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올 테면 내려와 봐라하고 사람들이 비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정말 내려와서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고 견디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습니다. 본문 5-7절까지 이렇게 우리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서도 받아주고 감당하라고 계속 바울은 권면합니다. 담당하고 받아 주는 게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교회 공동체에게 주는 마지막 권면입니다.
인내, 위로, 소망
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그리고 본문4절은 13절과 연결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인내, 위로, 소망이란 단어에 주목해보십시오. 성경 기록은 우리가 현실의 고난을 인내하고, 위로를 얻고 끝에는 소망을 잃지 않게 해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하지 말고 성경 속에서 위로를 받아야겠습니다.
본문에 소망은 현실에서 잘 먹고 잘살려는 소망은 아닙니다. 세상을 도피한다거나, 몽상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영생과 하늘과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늘에 대한 소망이 가장 컸던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일을 가장 많은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가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장 복음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을 잃는 이유는 하늘을 지향하지 않고 세상을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땅을 지향하면 우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묵상해보면 참 이 땅에 발 딛고 살면서 하늘에 마음을 두고, 천국을 늘 소망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늘 하늘을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가치관 중에 하나는, 우리 안에는 이 세상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방이 있다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벌면, 권력을 많이 가지면,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서 결혼하면 이 빈방이 채워질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모두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감정의 유통기한 900일입니다. 새 차를 뽑고 나서 뿌듯함의 유통기한은 6개월입니다. 새집 샀을 때 유통기한은 1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맛보는 기쁨들은 다 맛보기 입니다. 신기루이고, 메아리입니다. 본향에 진짜가 있습니다. 이 진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기쁨을 신기루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연연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 하늘의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젖은 낙엽 전법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명예롭게 퇴진해서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쉼도 결국 유통기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다.
세상만민에 메시야
본문 8절부터12절까지는 구약말씀을 계속 인용합니다. 9절하반절은 시편18:49절을, 10절은 신명기32장43절을, 11절은 시편117:1절을, 12절은 이사야 11장10절을 인용합니다. 약을 인용하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지금 로마교회의 최대의 갈등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갈등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님, 곧 메시야가 오신 것은 유대인의 메시야임과 동시에 이방인의 메시야도 된다는 것을 구약을 인용을 통하여 설득합니다.
할례의 추종자
9절에서 예수님이 할레의 추종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할례는 최초에 아브라함에게 명령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의 전유물입니다. 할례를 예수님이 순종한 것은 유대인의 메시야임을 선언한 행동입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인용한 인용문 중 계속 반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방”입니다. 열방이 5번 반복합니다. 열방은 10개국이란 뜻이 아니고 “many nation” 많은 나라를 말합니다. 세상 만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메시아를 약속 할 때부터 세상 만민의 구주로 오실 것임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대인 신자, 이방인 신자 싸우지 말고 본문 6절에서처럼 한마음 한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소개하고 싶은 하나님은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내, 위로, 소망이 없다면 우리 죄인들은 한시도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님께서 늘 곁에 서서 힘과 위로를 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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