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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디딤돌(로마서9:14-24)

by 명주(明珠) 2024. 8. 24.

레이건 대통령 일화

레이건 대통령은 대통령되기 전 캘리포니아 지사였습니다. 그는 새크라멘토의 유명한 식당에 친구와 갔습니다. 대기 줄이 너무 길었습니다. 30분이 지나고 40분이 넘어 가자 레이건이 지배인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신분은 말하지 않고 “좀 빨리 안되냐?” 물었습니다. 지배인은 말도 안 되고 순서를 기다리란 말만하고 쌩 가버렸습니다. 레이건이 친구에게 “저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 줄 좀 알려 줘야겠지"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귓속말로 이미 30분 전에 말해줬다고했습니다. 이 말에 레이건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밥줄 예민합니다. 권위는 아무 때나 사용하면 안 됩니다. 지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와도 밥줄은 안 바꿉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 애찬 밥줄은 사랑으로 바꾸어 줍니다. 부친님, 모친님 염려하지 마시고 새치기하시기 바랍니다.

 

 

족제비와 생쥐 예화


 
다른 예화 하나 더 듭니다. 족제비에게 늘 당하기만 했던 생쥐들이 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가 아니고 족제비 앞에 쥐들이었습니다. 쥐들이 늘 잡아 먹히니하루는 긴급 생쥐회의를 합니다. 생쥐들의 운영회의입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 형제 운영회의 합니다. 이 회의에서 낸 결론이 “우리에게 대장 쥐가 없어서 늘 당한다.”였습니다. 대장 쥐 10마리를 세워 족제비에게 대항하자고자 했습니다. 뽑힌 10마리 대장 쥐들은 일반 쥐하고 구별하려고 머리에 벼슬을 달았습니다. 벼슬을 단 대장 쥐들을 앞세워 생쥐와 족제비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족제비와 생쥐 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안 돼 모든 쥐들은 쥐구멍으로 다 도망을 왔습니다. 그런데 이 10마리 대장 쥐들만 사라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도망 처 들어오다 벼슬이 구멍에 걸려 못 들어 오고 족제비에게 다 잡아먹혔습니다. 벼슬을 세우면 안됩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교훈을 주는 예화 입니다.

엿장수 맘대로


 
엿장수 맘대로란 말이 있습니다. 말뜻은 엿장수가 엿을 마음대로 길게 늘렷다가 짧게 줄였다하는 행동에서 유래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벼슬을 세워봤자 생쥐벼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물론 엿장수는 아니시지만 늘렷다 줄엿다 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주권자입니다. “이 사람아!” 오늘 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음


 
1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14절 이전에 내용은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 어떤 잘잘못을 가릴 행동을 하기 전에 엄마 뱃속에서 한 사람은 택하고 한사람은 버렸다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엿장수 맘대로 하시는가? 불의하다. 불공평하다.”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 14절입니다. 바울은 “무슨 말을 합니까? 하나님 불의 하지 않습니다.”라며 강한 부정을 합니다. "하나님 불의하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없다."란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하여 이어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모세와 바로 왕을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모세


 
먼저는 모세입니다. 15,16절입니다."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출33:19〕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본문15절은 출33장19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시내산 아래 60일 만에 도착합니다. 시내산에서 11개월을 머뭅니다. 이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 받으러 올라 가 내려오는 것이 지체됩니다.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 모으기 운동을 합니다.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이제부터 우리를 인도할 신은 금송아지을 선포합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에게 제사지내고 춤추고 먹고 마시며 니나노 판을 벌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진노하시고 백성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출애굽한 200만 명을 싹쓸어 버리고 모세를 조상으로 택한 백성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은 뜻을 돌이킵니다. 땅에 내려 온 모세는 레위 백성의 손을 빌어 주동자 3000명을 죽이는 벌을 내리고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은 일단락 합니다.
 
이 사건에서 모양새는 모세 때문에 백성들이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원함, 달음박질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이 논증을 확대하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것도 그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도 이들이 예쁜 짓을 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 때문입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도망자였고 한낱 양치기 신세일 때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430년간 노예로 찌든 연약하기 그지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머리는 좋다하지만 외모는 그다지 잘생긴 민족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일방적으로 택하십니다.

바로왕이 강팍하게된 이유


 
당시에 하나님이 택하여야 할 인간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모세보다는 바로 왕입니다. 그는 힘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세계4대문명 중 하나가 이집트문명입니다. 나머지는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이집트의 바로를 악한 역할로 사용합니다. 17,18절입니다."[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출 9:16〕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바로는 강퍅한 자로 씁니다. 본문에 강퍅은 굳셀강(剛) 강퍅할 퍅(愎)자입니다. “성미가 깐깐하고 고집이세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를 참고하면 바로왕은 악역으로 쓰입니다. 9번의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피재앙, 개구리 재앙, 이재앙, 파리재앙, 악질재앙, 독종재앙, 우박재앙, 메뚜기재앙. 암흑재앙입니다. 그러다 10번째 장자들이 다 죽는 재앙을 맞이하고서야 내보냅니다. 내 보내고나서도 마음이 완악하여져 다시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러다 홍해에서 수장되고 물고기 밥 신세가 됩니다. 지금도 홍해에 밑바닥에는 수장된 군사들의 전차가 발견된답니다. 바퀴가 그대로 보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바로왕 스스로 완악하게 되었다란 표현이11번이고, 하나님이 일부러 바로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단 표현이 9번 정도 나옵니다. 11대9를 기억해 두십시오. 하나님은 바로 왕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십니다. 일부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알립니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그러면 처음 야곱과 에서의 미리 택함 문제로 가졌던 하나님 불공평하게 보이는 문제가 이번 모세와 바로왕의 비교에서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누구는 좋게 써먹고 누구는 나쁘게 써먹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태양은 지구 어디든 햇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본문은 누구는 비추고 누구는 안 비추고 하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선별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난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니다


 
어떻게 결론을 낼지 기대하면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과연 악한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분인가? 이거야 말로 하나님 불의하심의 근거 아닌가? 하나님 마치 북한의 김정은을 일부러 세워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신가?”라는 질문에 답을 합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악은 하나님이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악은 사단이 하나님을 반역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악을 잠시 허용하십니다. 따라서 현재 이세상은 사단이 잠시 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다


 
로마서가 주장하는 인간의 실존은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죄인입니다.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이상한 아기는 없습니다. 한없이 맑은 아이들도 자라면서 악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경험상으로도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뉴스로 이를 확인합니다. 미국은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사고가 납니다. 우리도 얼마 전 강남 부녀자 납치 살해 사건이 났습니다. 요즈음 마약 판매가 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만취운전자가 초등학생을 치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만들어 우리의 공분을 샀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악이 만연하여 폭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형국입니다. 브레이크 안 밟으면 벌써 인류는 세계대전이 일어나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저기 핵폭탄 펑펑 터뜨려 금방 종말이 왔을 것입니다. 로마서1장28절을 보면 하나님 심판 방법이 상실한 마음대로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본문에 바로왕은 그냥 두어도 원래 악합니다. 태생이 악합니다. 하나님이 그 악한 마음에 기름을 살짝 부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 처음부터 악한사람 만드시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 바로 왕이 11번은 스스로 완악해졌고 9번은 하나님이 완악하게하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악한자도 필요하시면 도구로 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악도 필요하다면 선용하십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악한세상을 적절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계십니다. 브레이크 예를 들면 우리 안에 양심을 심어 제어하십니다. 양심이 내면의 감시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권력자를 세워 질서를 유지합니다. 가장 큰 브레이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악 한자를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흙탕물에 맑은 물을 섞는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역할을 하는 신자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비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우리가 왈가왈부하여서는 안 된다고 계속 증거합니다. 19,20절 입니다.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 드디어 오늘의 제목이 나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개역한글 성경은 본문을 반문을 힐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이 어렵지만 뜻은 더 잘 통합니다. 힐문은 물을 힐(詰), 물을 문(問)자입니다. "트집을 잡아서 따져 묻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아 트집 잡지마!” 여기 “이 사람아?”에서 이 사람은 몰라서 순수하게 묻는 사람이 아닙니다. 몰라서 알려고 질문하는 신앙태도는 좋습니다. 질문을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는 거는 좋은 신앙태도입니다. 본문에 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태클을 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권리로? 엿장수 맘대로 말이야 사람 마음 강퍅하게 만들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지옥에 던져 넣고 말이되냐?”라며 하나님에 대하여 삐딱한 마음으로 불만을 품은 자의 힐문을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라고 했는데 그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이 20절 하반절과 21절에 이어집니다. "[20]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그 누구를 2가지로 말씀합니다. 진흙과 지음 받은 물건입니다. 지음 받은 물건의 어원이 "플라스틱"이랍니다. 오늘날 플라스틱은 해양 오염의 주범입니다. 우리는 합성제품과 같이 바다 여기 저기 떠다니는 플라스틱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는 토기장이 앞에 진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자기비하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이라는 전제 가 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질은 진흙이요 플라스틱입니다.

인간의 본질

 
주제를 바꾸어 본문에서 교훈 하나 더 짚고 넘어갑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17절에 보면 성경이 말해준다고 했고, 말끝마다 구약 말씀을 인용 합니다. 로마서 9장도 창세기, 말라기, 출애굽기, 호세아,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바울은 성경적인 권위를 빌어서 말합니다. 성경은 고전작품이 아닙니다. 철학서도 아닙니다. 과학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베게로만 쓰는 분 있습니다. 성경을 부적처럼 365일 차 트렁크에 싣고만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성경을 주일에만 들고 오는 용으로 쓰기도합니다. 에릭프롬이라는 학자는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는 책에서 자기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보고 유대소수민족의 역사책 정도로만 보았습니다. 이러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 앞에서는 어린 아이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선입견, 편견, 자기생각을 버리고 성경이 비추어 주는 대로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 재판관, 성경 재단사가 되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지음 받은 물건과 진흙에 비유했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지음 받았다는 뜻은 본래부터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을 어떻게 창조했죠? 하나님 형상을 따라 심히 기뻐한 완벽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창조사역을 돕는 존재였습니다. 본문은 이런 상태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흙덩이 상태인 인간을 말합니다. 진흙덩이는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 형상을 잃고 모두 죄인이 된 우리를 놓고 한 비유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자유의지도 손상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끌리지 않으면 사단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 예화


 
본문에 이해를 돕기 위하여 흙탕물 예 하나 들겠습니다. 강릉에 오봉 땜을 무너뜨려 시내를 물바다로 만들 뻔 한 태풍이 있었습니다. 루사입니다. 2002년 8월23일일입니다. 루사 피해로 사망·실종 246명이었습니다. 일일 강수량 강릉이 1위였습니다. 하루에 900밀리가 왔습니다. 양동이로 퍼붓는 듯했습니다. 그때 포남동 남강 초등학교 옆에 방앗간을 하는 집을 제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집 주인이 물을 막으러 아파트에서 방앗간을 아침에 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다급하게 저에게 전화하여 자기네 방앗간을 한번 가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장대비를 뚫고 공단대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이 이미 대교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포남동 시내는 물바다가 되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흙탕 물이 무시무시했습니다. 트럭이 마치 성냥각 떠내려가듯이 떠내려갔습니다. 다행이 방앗간 주인이 전화통화만 안될 뿐이었고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이 흙탕물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온 인류가 이렇게 죄의 흙탕물에 다 쓸려 지옥의 바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흙탕물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건져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건져진 사람이 “왜 나만 건져 내고 다른 사람은 그냥 두십니까?”하고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그저 흙탕물에서 건져준 사실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간은 이와같이 원죄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스스로 진 죄의 댓가로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는 조금도 귀책사유가 없습니다. 내가 죄짓고 내가 복음을 거부하여 지옥갑니다. 다 악한데 바로 왕을 좀 더 악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천한 그릇으로 썼습니다. 문제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천한그릇 귀한그릇 미리 선택하시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이 무엇이죠? 본문을 보면 “하나님 토기장이야! 너희 진흙이야!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반문해!” 하면서 바울은 더 이상 논증을 진행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 까지만 말하고 왜 그렇게 하시는 가에 대하여는 침묵합니다. 단지 우리입장에서는 귀한 그릇으로 택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알려고 하지마! 다쳐!”하는 뉘앙스입니다. 예정 선택의 교리는 수세기 논쟁거리였습니다. 더 진전시키다 운명론, 결정론, 필연론, 예정론 등등의 무리한 해석들도 나왔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입장에서 더 이상 해석하려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


바울은 왜에 대한 답변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관용은 너그러울 관(寬) 얼굴용(容)입니다. “너그러운 얼굴”로 넓은 마음으로 잘못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상 죄에 대하여는 용납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진노하셔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꼴도 보기 싫어 심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참고 관용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왕도 10번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범하면서 구약을 거쳐 예수님이 이땅에 오사 구원을 완성하기 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까? 4000여년 입니다. 4000년을 참으셨습니다. 지금도 참고계시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참는 이유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도 심판이 즐겁지 않다는 걸 보이십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 빰 때리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처럼 사디스트가 아닙니다. 진노와 심판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참는 것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충분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 회개에 이르기를 강력히 원하십니다. 세번째 참는 이유는 심판의 엄중성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수영장에 가면 높은 곳에 물통이 있고 물이 차면 옆으로 확 기울어지면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구가 있습니다. 이 기구 상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차곡차곡 쌓았다가 한꺼번에 쏟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통하여도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4대 문명을 일으킨 수장을 홍해 바다를 무 가르듯 갈라 수장시키면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번째는 지옥 가는 자들이 핑계치 못하게 하기 위하여 관용하십니다. 하나님 최대한, 충분히 참고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옥 가도 핑계치 못하게 만드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본문의 부요는 부요할부(富), 넉넉할요(饒)자입니다. “어떤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부요한 분이심을 보이기 위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고자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예비한 시점은 창세 전부터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미리 예비하시는가? 그렇게 하셔야 하나님의 영광과 부요가 드러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 부요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다 부요한자, 부자들입니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어떻게 부요한 자입니까?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왕노릇 할 자산가들입니다. 성령님 안에 살게 된 것도 부요한 요소입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소유한자들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된 것도 부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어제 한형제 자매의 결혼식이 전주에서 있었습니다. 한옥마을 옆 향교에서 했습니다. 400년 된 은행나무 옆에서 야외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랑측 교회 청년 특송 6명, 신부측 교회 특송 40명이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신부 측도 은혜로 왔지만 우리 교회가 좀 더 은혜롭게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일가친척 결혼식은 참석하지 않더라도 교회 지체의 결혼식은 참석합니다. 우리는 서로 생명부지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로 모이게 하셔서 형제자매 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이 관계로 인해 우리는 몸으로 가서 결혼을 축하해 주던 생업 때문에 가지는 못하고 마음으로 축하해 주던 큰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교회 지체로 형제자매라는 큰 자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시고 부요하게 하셨는데 정작 우리는 가난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환경 때문에 가난해진 분이 있다면 부요하신 하나님 붙잡고 가난 탈 출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가 잠깐 마음이 가난했었습니다. 원인은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병원 5군대과 진료를 받고 약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골다공증으로 인한 척추압박 골절로 척추센터에서 시멘트 시술을 받았습니다. 고혈압, 당뇨로 심장내과 약을 드십니다. 방광염으로 비뇨기과 진료도 받았습니다. 치매로 신경과, 넘어져 머리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로 신경외과 진료도 받았습니다. 요즈음은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와야 입원이 가능해 보통 3-4시간을 기다립니다. 저는 아저씨들이 틈만 나면 환자 간이 침대에 벌렁 벌렁 눕고, 공간만 있으면 신문지 깔고 앉고 하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저가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신경이 날카롭게 되어 잠시 마음이 가난해 졌습니다. 그러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부요하게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마음의 가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24절은 긍휼의 그릇을 택하고 부르시는 것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혈통, 상태, 조건, 조상이 누구든 아무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라고 증거하며 끝을 냅니다. 그래서 저도 여기서 끝을 내겠습니다.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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