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아기 목욕시킬 때를 상상해보겠습니다. 엄마가 아기를 땀을 흘리며 열심히 목욕시킵니다. 씻긴 더러운 물을 버리라고 남편에게 시킵니다. 그런데 버리러 간 남편이 구정물은 안 버리고 아이를 버렸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남편은 우리가 모두 잘 돌봐드려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아이는 본질이고 씻긴 물은 비본질을 말합니다. 오늘 교제는 교회에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변두리 문제, 주변 문제입니다. 교회는 주변 문제로 아이를 버리는 것과 같은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지침은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 기록에 “주님의 만찬을 행하라.”라고 말씀하면 그대로 행하면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살인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는 직접적인 명령이 성경에 없습니다. 구원과 핵심 교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교회에서 대립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간에 서로 마음에 상처 주거나 받는 일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가 얼마 중요하였으면 14장 전체를 할애하여 설명합니다.
2. 로마교회의 비본질 적인 문제들
그러면 로마 교회의 비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세계 평화 문제, 인구감소 문제였을까요?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문제였습니다. “치사하게 먹는 거로 그러냐?”고 합니다. “네 먹는 거로 그럽니다.” 사람들은 먹는 거에 민감합니다. 모든 기관에서 설문을 받으면 다 먹는 거에 대한 불만이 1순위입니다. 그러나 창사 이래로 단 한 번도 불만이 없었던 기관이 있습니다. 강릉 명주로 교회 애찬입니다. 로마 교회는 고기를 먹고 안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고기 파와 채소 파의 대립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주변 문제는 5절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 교회는 고기 문제와 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애찬에 나왔던 고기는 모두 신전에 바쳐졌던 고기였습니다. 당시 유통구조가 시장에는 우상에게 드린 고기만 풀렸답니다. 우리 교회 애찬 메뉴 중 최고의 인기 메뉴는 제육볶음입니다. 이 제육볶음이 우상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나온 고기라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듯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다 선합니다. 또 우상은 없습니다. 우상으로 만든 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입니다. 금으로 만든 우상도 그냥 금일 뿐입니다. 그 앞에 두었던 고기가 이상한 정기가 들어가 부정한 성분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는 이 고기를 먹으며 마음과 양심이 상했습니다. 특히 수천 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던 유대인 성도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제육복음 먹는 사람들은 모두 간접 우상숭배자 들로 여겼습니다. 반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아니 고기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믿음으로 먹지!”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당시는 안식일과 주일이 혼재했던 과도기였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던 성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에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니 이것도 걸림이 되는 성도가 많았습니다. 또 율법에 절기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율법의 의식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러나 일부 신자는 성도가 절기를 지키지 않는다며 대립했습니다. 일명 안식일 파와 주일 파로 나뉜듯합니다. 또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일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성도도 아니야”하고 판단하거나 “이런 사람은 거듭났는지 의심해 봐야 해!”하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일 파는 “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일 년 365일 24시간을 다 예배해야지!” 하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요즈음도 교회가 비본질의 문제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만찬 예배 때 사용하는 떡은 이스트를 넣어 부풀리면 안 되고 무교병과 같은 딱딱한 떡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드러운 빵 파와 딱딱한 빵 파가 싸우기도 합니다. 만찬 예배 때 사용하는 포도주에는 알코올이 들어가면 안 되며 포도즙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알코올 파와 즙 파가 싸웁니다. 자매님들은 바지는 절대 입으면 안 되며 긴치마만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명 치마 파와 바지 파가 싸웁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정숙해야 하며 불경건하게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교회는 잔칫집과 같아야 한다며 시끄러울 수도 있다고 서로 판단합니다. 일명 정숙 파와 잔치 파가 대립합니다. 어느 성도가 깜박하고 식사 기도를 빼먹고 밥을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걸고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 점심때 짜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라며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답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분이 “그냥 땅기는 대로 먹으면 되지 그런 걸 다 기도하냐!”하고 비난합니다. 예배의 순서만 좀 바뀌어도 이상하게 봅니다. 우리가 10명에게 복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들어진 1명의 성도가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3. 비본질 적인 문제들에 대한 권면
사도바울은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본문에서는 무엇을 하지 말고라는 권면을 여섯 구절에 걸쳐서 합니다. 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3절에서는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반대로 약한 자는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합니다. 그다음 10절에서는 비판하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13절에서는 다시 비판하지 말고 형제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게 주의하라고 합니다. 15절에는 형제를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망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끝으로 21절에서는 거리끼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롬14:1절에는 “받으라.”고 합니다. 로마서15장1절에서는 “약점을 담당하라.”고합니다. 7절은 “서로 받으라.”고합니다. 받으라는 “받아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입니다. 소싸움 하듯이 들이받지 말고 서로 끌어 안으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또 날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도 간에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받아 주라고 합니다.
탁구에서 고수의 아량이 있습니다. 하수와 고수가 시합하면 고수가 하수에게 최대 5점을 잡아줍니다. 하수가 아무리 구석구석으로 쳐도 고수는 다 받아 줍니다. 또 힘과 기량을 100% 쓰지 않고 절제합니다. 탁구 고수도 이렇게 하는데 우리 성도는 더 큰 아량으로 서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4. 비판하지 말고 서로 받아 주어야할 이유
사도바울은 우리가 서로 받아 주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4절-9절까지입니다. 4절에서는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형제에 대한 비판은 월권행위라 합니다. 어떤 분이 남의 집에 가 자녀를 나무라면 부모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입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 또 남의 집 귀한 종은 그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하면서 구해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했습니다. 그를 죽이고 살리는 권한까지도 주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감히 비판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5.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할 이유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로마서14: 11,12절입니다.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본문과 병행 구절은 고린도후서 5장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마냥 좋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참 좋으신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이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장차 우리도 이 재판장 앞에 서야 할 처지입니다. 이 심판장 앞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숨길 수 없습니다.
6. 그리스도의 심판대
어떤 분이 중국 공안에게 끌려갔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는 것까지 공안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자기도 몰랐던 수학 65점 맞은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안도 이런데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심판대는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상을 받기 위한 심판입니다. 받을 상도 천국에서 계급을 나누기 위한 상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평생 선교사로 사신 분은 천국 청담동 126억 시가의 더 펜트하우스같은 곳에 살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베리아와 같은 환경의 판자촌에서 개털 모자 쓰고 덜덜 떨면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선만 있는 곳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천국에 투영하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한다는 행위가 하나님께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고양이 예를 들겠습니다. 들고양이가 가끔 새끼를 낳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길고양이를 따라가 새끼들을 구해 집으로 데려와 돌봐 줍니다. 이 고양이가 구해준 집사에게 고맙다고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설거지해줄까요? 세탁기를 돌려줄까요? 아닙니다. 큰 쥐를 사냥하여 현관에다 자랑스럽게 갖다 놓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행동이 이와 같이 정말 하나님께 직접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또 그만큼 순수할 수 있을까 자문해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랑하지 말고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눅17:10)
저는 우리가 미래에 재판장 앞에 갈 것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갈 것을 권면합니다. 지금 주님께 속으로 고백하고 바른대로 말해보십시오. “주님 저 형제가 정말 꼴 보기 싫은데 어찌합니까?” “고기도 안 먹고 채식만 하는데 정말 못 봐주겠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직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재판장님에게서 바로 답이 옵니다. “너는 10배나 더 꼴을 보기 싫은 사람이었다. 차마 눈 뜨고 봐주지 못할 죄인이었다.” “내가 그런 너를 받아줬다. 너도 당연히 받아 줘야 하지 않겠냐!” 이렇게 응답이 올 것입니다.
7. 의, 평강, 희락
비난과 권면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판별법을 17,18절에 말씀합니다.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받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판별 기준은 의, 평강, 희락입니다. 우리가 남을 권면한 후에는 그 사람하고 의의 관계가 안 깨지고, 평화스럽고, 서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은 의, 평강, 희락입니다. 부수적인 문제로 의가 상하고, 평강이 깨지고, 기쁨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8. 교회에서 회의에 임하는 자세
그러면 우리가 의, 평강, 희락을 현실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교회회의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회는 회의의 연속입니다. 형제운영회의, 자매회의, 교사회의, 직분자회의, 학생회회의, 청년회회의, 체육관설립회의 등 회의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의, 평강, 희락을 깨는 그야말로 회의(懷疑)가 많이 드는 회의(會議)가 되기 쉽습니다. 회의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하여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좋은 회의를 하려면 어떤 자세로 해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회의는 가족 간의 회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회의의 상대는 형제자매입니다. 사업 상대와 회의 아닙니다. 협약을 위한 국가간의 협상 테이블도 아닙니다. 여당과 야당 회의도 아닙니다. 가족회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을 바탕에 깔고 가야 합니다.(고전16:14) 위에 계신 분은 회의 때 방울뱀이 되기 쉽습니다. “쓰읍~~ 어디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쓰읍”라는 태도 갖기 쉽습니다. 어린 분들은 헐크가 되기 쉽습니다. “으악! 나 건드리지 마, 치받는 수가 있어!”라고 하는 분위기이면 안 됩니다. 사람은 논리와 이성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성적인 동물입니다. 사람이 기분이 상하면 끝입니다. 감정이 상하고 나면 의, 평화, 기쁨이 이미 깨진 셈입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사람을 논리로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는 재판장의 입장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의견을 충분히 들어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법원에서 판사가 검사, 변호사, 증인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판결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의 의견은 들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결론을 내는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서로 의만 상하고, 평화는 깨지고, 얼굴을 굳게 만듭니다.
셋째는 대화를 해야지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 회의는 TV 무한도전 예능이 아닙니다. 누가 한마디 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능은 시청자에게 웃음을 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대화는 의견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관점을 서로 이해하는 것을 대화라 합니다. 논쟁은 상대를 이기려고 애쓰고 말꼬리를 자르거나 물고 늘어집니다. 자기의 지식을 뽐내며 본인의 옳음을 끝까지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논쟁입니다. 논쟁이 아닌 대화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 저랬었구나!”하고 상대를 알고 이해합니다. 교회 회의는 이런 대화의 장이어야 합니다. 논쟁의 장이 아닙니다.(고전11:16)
9. 연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권면
다음에 바울은 연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 해당하는 권면을 합니다. 로마서12장14절, 16절, 19절, 20절, 22절, 23절입니다. 강한자에게 해당하는 권ㅇ션은 22절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강한 자는 지식으로 교만하여 져서 연약한 자를 사사건건 가르치려 들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절제하라고 합니다. 고전8:13절에는 바울은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지만, 형제를 넘어지게 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다음 연약한 자에 대한 권면입니다. 5절에서는 “마음에 확정하라.”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속되게 여기면 속되다.”라고 합니다. 20절에는 “거리낌으로 먹으면 악하다.”라고 합니다. 22절에서는 “자기를 책하지 말라.”고 합니다. 23절에서는 “의심하고 먹는 자.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않는 게 다 죄다,”라고 합니다. 이 다섯 구절을 풀어주는 열쇠는 바로 14절 전반 절입니다. “주안에서 알고 확신한다.”라는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이고 일등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안에서 알고 확신한 진리로 율법을 극복하고 양심에 꺼림 없이 행했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알고 확신한 것은 양심에 가책받지 않고 그대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이 양심은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이 가책받으며 하는 행동은 죄입니다. 비본질의 문제로 사람의 눈치 보지 말고 신앙 양심을 따라 소신 있게 행동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서로 받아 주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관계에서 의, 평강, 희락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성도가 모두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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