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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산제사(로마서12:1-5)

by 명주(明珠) 2024. 8. 24.

오늘 본문은 5개 절 입니다. 로마서는 극찬을 받는 성경입니다. 성경중의 성경, 성경의 보화,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이 로마서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 마른 오징어를 씹듯이 씹어야 제 맛이 납니다. 저는 5개 절을 묵상하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입니다. 하나님이 4번 나옵니다. 하나님의가 2번,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각각 한 번씩 나옵니다. 5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란 단어가 언급됩니다. 로마서12장부터는 실천편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통하여 실천에 앞서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어야하고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 안 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장24-27절을 보면 반석위에 기초를 둔 집, 모래위에 기초를 둔 집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진다고 하십니다. 이 비유는 기초의 중요성을 말씀하지 쌓아올리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초가 부실해 지난번 중국에서는 97층 빌딩이 흔들리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또 몇 일전 광주 붕괴 사고도 기초적인 부분을 건드려 중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주어는 하나님 기초는 그리스도안 기억하시면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로마서 성경



1절을 먼저 참고합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부사를 써서 본문은 앞 전체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합니다.

먼저 본문 1절 전반 절은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서신을 쓰고 있는지 단어 뜻에서 압니다. 먼저 "형제들아!"입니다. 이는 사랑스러운 호칭입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로마서도 고린도에서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도로를 따라 1195.2km입니다. 바울은 몸은 멀리 떨어졌지만, 마음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로마 성도를 부릅니다.

다음은 자비하심으로입니다. 자비하심의 자비의 한자는 사랑할 자(慈) 슬플 비(悲)입니다. 사랑하는데 슬프다는 의미입니다. 짠한 마음, 울컥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마음, 긍휼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권하노니”라는 말 그대로 명령이 아니라 권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명령할 권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서신을 씁니다.

지체의 교리



4, 5절입니다. 로마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에 비하여 로마 신자들은 소수였습니다. 소수의 무리가 모여 신앙생활 하기가 힘겨웠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박해로 흩어진 일반 신자들이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적은 무리이지만 튼튼하게 교회를 유지해갈 비결을 바울은 말합니다.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처럼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교회는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는 조직이 아닙니다. 유기체이고 생명체입니다. 지체는 촘촘한 신경망과 핏줄로 서로 연결하여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호가 감각신경을 타고 뇌로 갔다가 손에 있는 운동신경에 전달하는 시간은 0.013초 걸립니다. 눈 깜짝할 새는 0.4초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30배나 빠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 의식을 가지라는 권면은 교회 신자가 서로 무신경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로 뭉치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지체 의식으로 고난과 핍박을 헤쳐 나가도록 돕습니다.

몸은 산제물로 드리라



1절 하반 절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권면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드리라고 합니다. 몸을 드리라는 것은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니고,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행동으로 나올 때 참믿음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데모 전에 마이크를 잡고 선동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가 항상 반복하는 첫 멘트는 “행동하는 지성! 일만 이천 학우 여러분!” “행동하는 지성!”이었습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몸을 제물로 드림이 바로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죠? 머리로만 생각하는 신앙 이상합니다. 참 믿음은 행동으로 나옵니다.

몸을 드리는 신앙은 영적 예배로까지 연결합니다. 영어 성경은 합리적인 예배라 표현합니다. 또 제물 앞에 “산”자가 붙습니다. 성경에 “산 소망, 산 돌”이란 표현도 있습니다. 산은 영어로 living으로 생활로 번역합니다. 생활 속에서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란 뜻입니다. 예배는 교회라는 특정 장소에서 특정 형식을 통하여 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권면합니다.  내가 가는 모든 곳이 예배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양치질하고 탁구치고 잠자고 아이 돌보고 대화하고 집안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음악을 듣고 직장이나 사업장에 출근하는 모든 곳 모든 행동이 예배고 예배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권면합니다. 
 
제물의 특성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물은 구약의 제사 때 드린 제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돼지, 개 가능합니까?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서 안됩니다.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 기름, 포도즙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돈, 다이아몬드, 부동산을 제물로 바치라 하지 않았을까요? 구약 제물의 공통점은 “먹을 수 있다.”입니다. 우리는 왜 먹죠? 살기위해 먹습니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유지 기능을 합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죄를 없애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를 없애는 방법은 나의 생명을 죄 값으로 죽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죽일 순 없으니 생명유지기능을 하는 음식을 대신 제물로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요건은 첫째도 거룩 둘째도 거룩입니다. 흠이 없어야합니다.

몸을 산 제물로 드림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양이 아니라 실제 몸을 드린 예가 있습니다. 구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신약은 예수님 자신이 산 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졌습니다. 제물은 그 자체가 남을 위해 드려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남을 제물 삼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잡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란 말씀 또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도 희생을 바탕으로 합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서 맛을 내고, 빛은 자기를 태워 어두움을 밝힙니다.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는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산 제물의 특징은 입을 열지 않았고 잠잠했습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은 거룩하며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삶입니다. 또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이 몸을 드리라 입니다. 영을 드려라 혼을 드려라하면 오히려 복잡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뭐야?”합니다. 그런데 몸을 드리라 입니다. 단순 명료 한 권면입니다. 오늘날은 몸을 못 쓰게 하는 시대입니다. 온라인 시대, 가상현실, 증강현실, 유비쿼터스 시대입니다. 눈과 손가락만 많이 쓰게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거슬러 몸을 쓰는 신자이길 기도합니다. 교회 청소시간이면 “일어납니다. 청소함에 갑니다. 마대자루 듭니다. 그리고 바닥을 닦습니다.”이렇게 몸을 움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앉아서“청소란 무엇일까? 왜 청소를 하는가? 청소의 원어 뜻은 무엇인가? 저분은 왜 청소를 매번 빠지는가?”복잡한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주일이면 “일어납니다. 세수합니다. 그리고 교회 옵니다.” 몸을 움직이면 정신도 건강하게 변합니다.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본받는다."라는 같은 모양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



본문에 세대를 본받자 말했는데 오늘날 어떤 세대가 있는지 알아봅니다. 베이비붐 세대, 386세대, X세대, C세대, Y세대, M이라 해서 밀레니얼 세대, Z세대로 나눕니다. 밀레니얼의 M과 Z를 합하여 MZ세대입니다. Z세대의 특징 하나만 소개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가 Z세대입니다. 왜 Z세대냐 하면 20세기 마지막에 태어난 세대여서 알파벳 마지막 자를 땄습니다. Z세대는 디지털 세대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스마트 폰을 끼고 사는 세대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활동을 합니다. TV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유튜브하고 아주 친합니다. 여가를 유튜브하고 지냅니다. 이들을 팩트광이라고 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팩트 체크 바로 들어갑니다. 강단에서 말을 잘못하면 바로 검색 들어갑니다. 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 뚜렷합니다. ”혼밥“”개인 맞춤 서비스“”자기중심“이 키워드입니다. 욜로족이라고도 합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약자- ”인생은 오직 한 번뿐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한다. “가 욜로의 뜻입니다. ”겟꿀러“라고도 합니다. -겟(get)은 영어 얻다 꿀은 달콤한 꿀에서 인용-이는 가격보다 취향을 중시하는 성향을 뜻합니다. 취향에 맞는다면 가격 따지지 않고 뭐든 삽니다. 또 소확행이라 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기성세대가 ”라 때는 말이야. “하고 옛날 얘기하면 꼰대 소리 듣습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질문도 삼가 해야 합니다. ”“취업 언제 할래? 결혼 언제 할래?” 함부로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



본문은 “이런 세대의 성향, 풍조를 닮지 말라!” 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현재가 아니고 미래지향적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지향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Z세대의 성향을 보면 복음과 친하기 어렵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런 세대 속에 믿음으로 살아야하는 우리 명주로 교회 Z세대들은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응원해 주고 기도해주어야겠다는 생각 들었습니다. 우리 청년회 조이름 지은 거 보셨습니까?. 8개조가 있습니다. 톡톡 튀는 개성 엿보입니다. “갈렙조, 열정넘치조. 풋풋하조. 큐티하조. 중후반조. 사랑하조. 앰마오조. 만나조.”입니다.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대를 본받지 않는 방법 2가지를 권면합니다. 2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죠? 공책에 연필로 까맣게 그림이나 글씨를 쓰고 지지우개로 지웁니다. 깨끗하여 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이 묵은 마음은 지우고 늘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늘 새로운 마음은 내가 먹어야합니다. 그럴 때 변화시켜주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두 번 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고합니다. 분별하다는 원어로 인정하다 입증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가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성경말씀입니다. 말씀이 분별력을 키워줍니다. 말씀은 원어로 로고스 이고 로고스는 losic 곧 논리가 어원입니다. 우리 말씀 따라 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광신이고 제정신 아니라 비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장 논리적입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다음은 세 번째 권면으로 넘어갑니다. 3절을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먼저 은혜로 말미암아를 전제로 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습니다. 댓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은혜입니다.(고전16:22,-24)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갑니다. 공기, 햇빛, 물 이것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고루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기에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 하늘 기업을 약속으로 받은 은혜, 돌보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늘 이 받은 은혜를 헤아려 보고 또 그 은혜 안에서 살아야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고합니다. 분별하다는 원어로 인정하다 입증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어가라는 권면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사도바울의 은혜에 기초한 오늘 마지막 권면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생각 좀하면서 살랍니다. 생각의 중요성 생각의 힘 중요합니다. 특히 본문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가를 말씀합니다. 본문은 그 이상이란 단어와 분량이란 단어가 대구를 이룹니다.
 
먼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었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요한3서에 나옵니다. 디오드레베란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가 으뜸 되기를 좋아했다(요한3서1장10)고 소개합니다. 그는 순회 사역자들이 자기 교회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순회 사역자를 파송한 요한과 그 측근 들을 비방했습니다. 순회사역자를 섬기는 형제들도 못하게 막았고 말 안 들으면 그들도 비방했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자기 개인 교회 인양 월권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쁜 선례로 이름이 올라가 대대손손 영원히 욕을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자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예수님의 12제자도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좌우편은 자기 자리로 다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에서 그 이상의 생각을 품으면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꼬락 냄새가 진동을 해도 누구하나 물 떠오는 사람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좀 튀는 행동을 하면 비방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갈등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야고보와 요한이 엄마찬스를 이용해 예수님께 인사 청탁한 사건입니다. 이를 안 10명의 제자가 분노했습니다. “누군 엄마 없나? 두고 보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품은 생각은 마땅히 품어야할 생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하시면서 큰 자는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낮아져 종처럼 섬기는 자라는 바른 생각을 품도록 하셨습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생각하라


 
본문은 또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분량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 않습니까? 너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자아발견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 때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반대로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보여 주기식 신앙, 척하는 신앙 가지지 않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 몸도 나이에 맞는 분량이 있습니다. 스포츠에도 체급이 있지 않습니까? 탁구도 부수가 정확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7부가 분량을 모르고 3부에게 덤비면 안 됩니다. 한 점도 못나고 지는 창피를 당합니다. 몸도 나이에 맞는 분량있습니다. 자기 몸의 분량을 모르고 밤 한번 새웠다가 어지럼증이 와서 혼난 적 있습니다. 소화력의 한계를 모르고 과식했다가 식중독 걸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분량이 있습니다.

받은 은사에 따라 생활 하라


 
끝으로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지 않음을 은사와 연결해서 생각해보고 마치겠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만 특별하게 준 것을 말합니다. 아기를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강 건너 불 보듯 또는 지나가는 멍멍이를 보듯 무덤덤한 성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왜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을까? 이상하다. 판단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 먼지가 날린다든지 휴지조각 하나 나뒹구는 것 가만히 못 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성도도 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되면 본인이 조용히 주으면 됩니다. 왜 쓰레기를 지나치지? 돼지 우리과냐!”하며 판단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결벽증이 있는가? 해도 안될 것입니다. 본인 마음에 부담이 되면 은사로 주셨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기 보다는 현재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성도로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은사대로 하나님 앞에 살도록 기도해 주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주신 은사를 발견해서 마음껏 교회를 위해 쓸 때 나도 기쁘고 교회도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부족함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로마서12:1-5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1)영적 예배니라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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