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서 기록 배경
로마서 후반부는 교회론입니다. 바울 당시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당시는 소작농이 많아서 근근이 먹고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기근마저 들었으니 설상가상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교회에서는 기근을 만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제 헌금을 걷었습니다.(행 11:27-30) 바울과 바나바는 그 구제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로마서에는 당연히 화합, 연합이라는 주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 교회와 이방교회의 연합, 로마교회 내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크리스천의 화합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 연합을 지체와 은사의 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2. 거짓없는 사랑
오늘 본문도 이어서 성도가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갖어야 하는가를 권면합니다. 12장 9절부터 보겠습니다. 12: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에 대하여는 더 이상 설명하면 제 입만 아프고, 시간 낭비입니다. 성경 검색기에 사랑을 검색하니 635번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23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도 6번 나옵니다. 바로 그다음 구절 10절에는 형제사랑에 대하여 나옵니다. 또 사랑은 13장으로 넘어가 8,9,10절에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 간에는 서로 사랑의 빚만 지라고 합니다. 다른 빚지면 안 됩니다. 사랑의 빚만 서로 많이 지워서 완전히 파산시키시기 바랍니다. 저는 파산직전입니다. 저는 기도의 빚도 많이 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들 수능 때문에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에서 613개의 율법을 만들었고 파생된 수천 개의 율법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랑하나면 끝이 납니다. 사랑은 만능키입니다. 사랑하는데 이웃의 담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 살인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본문 12장10절입니다. “거짓 없는”은 원어로 “휘포그리테스”입니다. 뜻은 배우가 연기한다입니다. 연기하는 사랑, 위선적 사랑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사랑 용어 남발 시대입니다. 쉽사빠는 손쉽게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을 말합니다. 금사빠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스타일을 줄인 말입니다. TV에서도 하루 이틀 만에 사랑에 빠지는 프로가 많습니다. 작년에만 25개 나왔답니다. 또 사랑을 육체적인 것만 부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는 연기하는 사랑, 휘포그리테스의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
3.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두 번째 권면은 “악을 미워하라고 하고 거기에 머물지 말고 선에 적극 속하라.”라고 권합니다. 바울의 성경 기술 방식은 소극적인 것을 먼저 말하고 적극적인 자세를 이어서 기술하는 방식이 많습니다.
악은 미워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이 콘셉트이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면 악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악은 미워해야 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악은 실체로 존재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제3의 세력입니다. 악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실제 세력입니다. 악은 사탄, 마귀로부터 기인했습니다. 본문에 악을 미워한다는 단어 원어의 뉘앙스는 “움찔하면서 두로 펄쩍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입니다. 길 가다가 갑자기 뱀을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 상상하면 됩니다. 저는 뱀을 잘 보는 비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릴 때 산에 다니면서 뱀을 볼까 봐 겁을 먹고 살피는 습관이 누적되어 이런 능력이 생겼습니다. 성도는 과거에 죄를 즐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몸이 죄를 기억해서” 죄를 미워하지 않기 쉽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으니 금죄빠가됩니다. 금방 죄에 빠집니다. 금죄빠가 되지 않으려면 죄에 대하여 소스라치게 놀라고 미워해야 합니다. 죄에 빠진 자기를 자책하는 것에 앞서 나를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제3의 실체인 악의 세력을 먼저 극렬하게 미워해야 합니다.
바울은 악을 미워하는데 머물지 말고 적극 선에 속하라고 권면합니다. 선에 속하라는 단어는 “선에 강력 본드로 붙여서 밧줄로 꽁꽁 동여맨다.”는 뜻입니다. 선에 속하는 자세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악은 미워집니다.
4. 악을 미워하는 방법
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워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입니다. 본문은 성어거스틴을 거듭나게 한 말씀입니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입니다. 흑인이었는지는 본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른답니다. 그의 기독교 신학은 존 칼빈, 마르틴 루터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답니다. 그러면 루터하고 어거스틴하고 친구일까요?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일어났습니다. 루터보다 1163년 전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까지 악을 매우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니교인 이교에 심취했습니다. 대학 때 동거해서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정원에서 기도하는 중에 담장 너머에서 “톨레레게”란 소리를 듣습니다. “톨레레게”는 라틴어로 “집어 들고 읽어라!”란 뜻입니다. 그래서 즉시 성경을 집어 들고 읽었는데 그 본문이 오늘 로마서 13장 11-14절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톨레레게”한번 해보겠습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구절로 어거스틴은 악행을 청산하였답니다. 참회록이라는 유명한 저서도 남겼습니다. 톨레레게는 이웃집 아이들이 부른 노래가사였답니다.
본문에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는 것은 군대 기상나팔 소리 상상하면 됩니다. 나팔 불면 일어나기 싫어도 무조건 벌떡 일어나서 연병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문은 세상을 밤으로 비유합니다. 밤 문화가 문제입니다. 천로역정에서는 현세상을 ”허영의 장터“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허영의 장터에서 깨어나서 군복을 입듯이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본문에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단어의 그림은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방탕의 누더기,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육신의 일의 누더기를 벗어던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을 걸치면 악이 더 이상 우리를 터치할 수 없습니다.
5. 영적으로 게으르지 말자
다음 권면은 로마서12장 11절입니다.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게으르다는 할 일을 안 하며 뭉그적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상나팔을 불었는데도 연병장으로 안 나가고 뒹구는 모습입니다. 전도서 11장 4절 “바람만 살피는 자는 씨 뿌리지 못하고, 구름만 살피는 자는 추수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농부가 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날만 기다리다 보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가서 씨 뿌리고 돌봐야 추수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교회를 섬기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생활, 교회 활동,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으신데 교회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를 불러내신 것도 교회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유리관 속에 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사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여 그 관계 속에서 삽니다. 교회라는 관계 속에 뒹굴면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격이 형성됩니다. 로마서 후반부는 다 교회론입니다. 그래서 14장에는 교회에서 연약한 한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한 장을 다 할애하기도 합니다.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신앙의 기본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실천의 3요소는 기도, 말씀 읽기, 교제입니다. 교제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주님과의 교제를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도 포함합니다. 수평적으로는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6. 소망, 환난, 기도
그다음 권면은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입니다. 본문의 소망은 인생대박의 소망이 아닙니다. 하늘의 소망입니다. 기독교의 사관은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끝맺으십니다. 그 끝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새로운 왕국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망은 현실의 고난을 이길 기쁨을 줍니다.
환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모난 신앙 인격을 깍아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합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이 일 때는 맞서기보다 잠잠하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환난의 폭풍 속에서 인내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아이들 밤에 잠재워 보셨습니까? 아이가 무섭고 두려우면 부모에게 말을 많이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는 집 밖에 공동화장실이 있었습니다. 밤에는 무서우니 부모님 하고 같이 갑니다. 부모님이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저는 부모가 밖에 서 있는지 없는지 계속 말을 걸고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있음이 확인되면 안심합니다. 기도가 이와 유사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수시로 하나님께 말을 걸고 이를 통하여 안심이되고 두려움도 이깁니다.
7. 구제
다음 권면은 13절입니다. “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구절입니다. 본문에 쓸 것은 금, 은, 다이아몬드, 명품 백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필수품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 시대나 예수님께서 육체로 활동하던 시대나 상황은 비슷하여 예수님 당시 시대상황을 소개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소작농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수확물의 2/3를 바쳤습니다. 수확물의 66%를 바친 셈입니다. 그리고 국가도 세금을 걷어 갔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배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소작농을 포기하고 노예가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는 떼강도 무리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강도당한 자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바울 당시 성도는 실제적인 구제가 필요했습니다. 또 로마에는 여관이 퇴폐영업을 많이 해서 성도가 가면 잘 곳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성도 집에서 대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면 본문의 권면처럼 손님 대접에 힘써야겠습니다. 손님 대접할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4일간 진행하는 전도 집회에 우리가 적극 손님을 초대하고 복음으로 대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원수 사랑
다음 권면은 롬12:14절입니다.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예수님도 강조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면과 같음 맥락의 권면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 본문롭ㅁ12장 17절, 20절, 21절에도 이어집니다. 12:17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20절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절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동해보복법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만큼만 남에도 해를 가한다는 보복률 사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하라는 권면입니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을 빌라는 뜻입니다. 저도 메신저여서 말씀은 전하지만 쉽지 않은 권면입니다. 하여간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합니다. 비범한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9. 함께하라
롬12장15절입니다.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고 합니다. 자 어떤 것이 어려울까요? 같이 즐거워하는 일이 어려울까요? 같이 울어주는 게 어려울까요? 힌트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입니다. 우는 함께 우는일보다 함께 즐거워해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 딴 선수가 은, 동메달 딴 선수에게 자기 자리로 올라 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제안하면 자존심이 상해 잘 올라가지 않습니다. 올라가더라도 어색하게 웃습니다. 성도는 이러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내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 오늘 롬12장10절에 보면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원어의 뜻은 “어떤 보석의 정당한 값어치를 먹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상대를 평가절하하지 말고 은사를 적극 인정 해 주는 마음이 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습니다.
10.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롬12:16절은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했고, 다음 19-20절은 “12:19 내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직접 원수 갚지 말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공정하십니다. 내가 원수 갚으면 상대가 내 눈을 상하게 했으면 나도 눈만 상하게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상해서 아예 목을 칩니다.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의도가 하나님 나보다 힘이 더 세시니까 상대를 완전히 가루를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맡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심판하는 주권을 모두 하나님께 양도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 란 구절에 있습니다. 당시 문화가 성냥이 없었으니 집에 불이 없을 때는 화로를 이웃에게 가져가서 거기에 숯을 담아서 얻어왔습니다. 또 이집트 풍습에 회개의 증표로 숯을 담은 냄비를 머리에 이고 돌아다녔답니다. 우리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싸면 키 쓰고 이웃에게 소금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 창피하니까 다음에는 오줌을 안 싸게 됩니다. 숯불을 쌓는다는 뜻은 원수를 선대하면 그의 마음에 고통과 불안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느끼게 함을 의미합니다. 가책이 크다보면 결국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오게됩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11. 화목하라
롬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하라 그러면 할 수 없으면 머리끄덩이 붙들고 싸우라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할 수 있거든은 영어로 “If you can~”이 아니고 “If it be possible~”입니다. 타인이나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화목하란 뜻입니다. 나는 화목하고 싶어도 환경이나 타인이 그렇게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내가 군인이라면 총 안 잡을 수 없습니다. 강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화목합시다.” 할 수 없습니다. 할수 있거든이란 말씀은 불가항력적인 한계를 설정한 것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12. 국가권력과 성도와의 관계
롬13장으로 넘어갑니다. 13장 1-7절까지는 국가와 신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본문에는 국가의 권력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관 하나는 위의 권세가 진화의 산물이 아니란 겁니다. 오랜 시간 동안 정치의 발전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 아닙니다. 위의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위에 권세에 앉은 자들은 자기가 잘나서 앉은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권세가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함으로 위에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국가에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군대도 가야 합니다. 세금도 잘 내야 하고 법도 잘 지켜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인정 못한다는 자세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13. 국가권력에 대한 신자의 태도
국가권력은 나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줍니다. 범죄자들을 잡아 가둬서 나에게 악을 행사하지 못하게 막아 줍니다. 정부는 강도, 살인 방지, 악인의 징벌 기능이 있고, 교통질서 유지, 상하수도관리, 공공복지증진, 경제문제 해결 등 많은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가 평온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롬13장 3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구절이 있습니다. 본문은 원수를 선으로 대할 때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게 한다는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실제 스탈린 때 보고가 올라왔답니다. “공장에서 가장 선하고 믿을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다.”입니다. 그래서 스탈린도 기독교인을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영광 받게 됩니다. 반대로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의 기준은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라고 권면합니다. 옛날에 KBS 개그콘서트에서 박성광이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런 코너에서 술에 취해서 이런 대사를 합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 합니다. 국가권력은 순기능도 있지만 권력을 남용할 때 국민이 고통받습니다. 실제 100년 역사 동안 국가권력에 희생된 사람이 2억 명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국가가 월권하여 악을 행사하면 신앙 양심을 따라 불복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을 숭배하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가 혁명에 참여해야 합니까? 공권력이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지는 않고 악을 행사하면 양심을 따라 참여해도 죄는 아닙니다. 물론 선거라는 법제도를 통해서 악한 정부를 바꾸면 가장 좋습니다. 노조 참여해야 합니까? 신앙양심상 불법노조, 불법집회가 아니면 참여해도 죄가 안 됩니다. 양심에 따라 참여했는데 정죄해도 안 될 것입니다. 행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정하면 총 들고나가야 할까요? 나가야 합니다.
본문 롬13장4절에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칼은 권위를 상징합니다. 바울 당시 로마 총독이 지방 총독을 임명할 때 단검을 주었습니다. 이 검의 용도는 그들이 비행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목을 취하겠다는 상징적인 용도로 주었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길은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로는 안됩니다. 형벌이라는 제도로 악을 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형제도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는 긍정적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사형제도는 있습니다. 또 사형집행이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공권력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시행하며 악을 방지하는 목적이라면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14.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끝으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4가지 형태가 있었습니다. 첫째 국가가 교회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형태입니다. 영국의 국교회에서 국왕이 교회 머리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중세교회가 국가의 문제를 좌지우지했었습니다. 세 번째 형태는 교회와 국가는 적대관계로 봅니다. 교회는 신성하고 국가는 사탄의 종으로 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런 주장을 했었습니다. 네 번째는 교회와 국가는 상호 공존하는 형태입니다. 이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가 기독교정당을 만들어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교회 본연의 임무인 영혼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힘써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제목과 같이 형제 사랑은 기본이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이 되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그리스도인 또 위의 권세 자 곧 세상으로부터도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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