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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지체의 중요성(로마서12:1-8)

by 명주(明珠) 2024. 8. 24.

1. 로마서 실천편


드디어 오늘부터는 실천편입니다. 로마서는 편지글입니다. 바울은 편지쓰기를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여서 서신을 자주썼을 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집필 장소는 고린도입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현대 도로를 따라 얼마나 떨어졌나 살펴보니 1195.2km입니다. 바울은 아주 멀리 떨어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로마서를 썼습니다. 대강 썼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전체 내용은 개요만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교리의 엑기스만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어떤 성도는 교회에서 볼 때는 천사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문을 나가 집에 가면 헐크로 변신합니다. 직장에 가면 더 심한 헐크로 변합니다. 이러면 곤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어떻게 실천하라고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2. 산 제물


먼저 1절을 보십시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로 시작합니다.  이는 앞장1-11장까지 내용을 근거로 실천하라고 합니다.   1-11장까지의 핵심내용은 바울은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죄인은 예외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입니다.  이런 상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믿음만이 벗어나게 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실천하라고합니다.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실천만 열심히 하여도 문제입니다. 어떤 분은 주변에서 너무 구원받으라고 밀어붙여서 자기도 모르게 덜컥 구원받았다고 말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평생을 장로로  봉사했는데 마지막 죽을 때 쯤 중병이 들었습니다. 자녀가 “찬송가를 틀어드릴까요?”했는데 “애야 찬송가도 예수님도 다 필요없다. 불경이나 좀 틀어라!”라고 말하는 분도 있답니다. 
 
그러므로 다음 문장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입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당시 사도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병든자도 일으켜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앞세워 이렇게 편지  서두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이 평신도 들아! 사도인 내가 감히 너희에게 명령한다.”  실제 구약에서 모세가 율법을 선포할 때는 명령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입니다. 형제들아 하고 동급으로 로마 성도를 부릅니다. 형제들아는 영어로 “brother and sister"입니다. 자매님들도 반드시 포함한 용어입니다. 로마 교회는 노예, 종, 군인들이 많았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무시 받는 계층입니다. 바울은 로마성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자비한 마음으로 간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천키로나 떨어져 있었거고 게다가 얼굴도 모르는 로마 성도와 마치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듯한 느낌으로 권면합니다. 교회는 계자가 없어야합니다. 계층, 계급, 계파입니다. 교회 성도는 모두 동등한 brother and sister들입니다.  
 
바울이 간절히 권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하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본문은 자기 몸을 진짜 잡아서 드리란 말이 아닙니다?  2011년에 경북 문경 채석장에서 진짜 자기 몸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뜻은 몸을 모든 삶 속에서 또 생활 속에서 거룩하게 유지하고 거룩하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1세기 해가지지 않는 로마가 왜 망했습니까? 왜 해가 졌습니까? 목욕탕 때문에 망했습니다.  당시 좁은 로마시에 만 목욕탕이 170개가 있었답니다. 규모가 동네 목욕탕 수준이 아닙니다. 가로215미터 세로330미터인 탕도 있었답니다. 축구장 2개 반을 붙여놓은 크기였답니다.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고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식민국가 사람을 노예로 잡아왔습니다.  모든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다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무슨 먼지 묻힐 일이 있다고 밤낮 목욕을 합니까? 몸의 쾌락을 즐긴거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 멸망의 내적 요인으로 쾌락, 사치, 폭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의 유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노예 검투사가 3천명이 있었답니다. 로마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해가졌습니다. 몸을 거룩하게 하라는 권면은 당시 시대상도 반영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몸을 산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은 구약에 제사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탈출시킨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을 따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의 중심에는 성막, 성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 양, 비둘기를 잡아 제사 드리는 삶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쓰이는 제물은 반드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만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흠이 있나, 없나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우리 몸도 이렇게 매사에 거룩함을 유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이를 영적예배라고 합니다. 
 
몸을 드리는데 몸적예배라 해야 맞지 왜 영적예배라고 합니까? 우리는 몸 따로 영혼따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몸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을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몸은 전인격을 말합니다. 영적예배는 가장 합리적인 예배로 번역합니다. 본문에서 눈여겨 볼 단어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입니다. 2절에도 기뻐하시고란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 웃음의 하나님, 대단한 유머가 있으신 하나님입니다. 온 우주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유머가 깃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매일매일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기뻤다 하셨고, 사람을 만든 다음에는 심히, 매우 기뻤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동물원에 가면 하나님의 유머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코끼리, 하마, 개코원숭이 많습니다. 지구촌 사람도 서로 닮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러면 나도 기쁜 삶입니다. 본문을 고행하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몸을 함부로 굴리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 뿐더러 나도 물론 기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이 없다면 몸을 함부로 굴리고 있지 않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자가 헐크로 변해서 남을 욕하고 비방한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고 본인도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나한테 바치라 하시고 나머지는 나몰라라하고 방치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신약시대는 몸이 성전인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셨으면 우리 몸을 거처로 삼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몸을 거처로 삼으셨다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자신의 뜻을 이땅에서 펼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역사하고 직접 음성을 들려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하나님 보고 싶으면 옆자리에 있는 성도 얼굴을 보면 됩니다. 지난주일 호주 선교사님이 대구사역자로 가려고 할 때 또 호주 선교사로 나가려고 할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에 부담을 주셨다고 간증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령시대는 우리가 조금만 힘쓰면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산제물로 넉넉히 드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 몸에 대해 가져야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아직은 불완전하다입니다. 우리 몸은 아직 완전히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에 죄의 에너지가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너지가 활동하지 못하게 막아야합니다.  몸의 활동, 보고, 먹고, 말하고, 듣고, 축구, 탁구 치는 등 모든 일에 거룩해야하고 이것이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꿩 먹고 알 먹고의 삶입니다. 

예배모습


 

3.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2절을 보십시오. “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울은 몸에서 또 한 단계 들어가 마음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 권면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새롭게는 영어로 Renewing으로 새로워 졌는데 다시 새롭게란 뜻입니다. 거듭나서 한번 새로워진 것으로 끝이 아니고 늘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새로워진 상태는 증기기관차에 비유를 합니다. 증기기관차가 철로 위에 방향이 서울 방향이었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전환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옥행에서 천국행으로 방향을 180도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이 변화는 우리가 사탄의 노예에서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영원을 향해가는 거룩한 순례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변화받은  신자로서 매일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마음을 새롭게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보는 시각부터 변해야합니다.  이 세대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 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배경에는 사단의 검은 손길이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세계1,2차 대전을 예로듭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자가 28,555,886 명이 죽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7천500만 명이 죽었답니다. 2차 세계 대전은 히틀러가 악의 축입니다. 세계대전을 히틀러 한 사람의 문제, 한 인물의 문제로 봐야할까요? 그렇다면 히틀러 한 사람 없어지면 세상이 바뀌어야합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또 나타났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흐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범죄가 계속 반복되면서도 커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신본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문화입니다. e-스포츠도 하나님이 관여해서 만들었을까요? 답은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풍조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요즈음 과학주의 시대입니다. 나노, 테라 단위 까지 좌지 우지하는 시대입니다. 요즈음은 슈퍼컴퓨터를 넘어 양자컴퓨터를 생산하려 하고 있습니다. 슈퍼컴퓨터도 빠른데 양자컴퓨터는 슈퍼컴의 30조배 빠르답니다. 슈퍼컴이 1만년 걸려 계산할 걸 양자컴은 단 3-4분이면 끝낸답니다. 이런 시대인데 “동정녀탄생, 부활, 물위를 걷는 기적 이런걸 믿는 일이 말이돼냐? 성경에서 이런 신화적인 요소는 다 빼자.” 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답니다. 갈릴레오 재판아시죠? 당시 교회가 지구가 돈다는 그를 사형판결한 일은 교회 내에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겠습니다. 본받을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밖에는 없습니다. 그 뜻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대로 믿고 그 진리를 따라 살면 모든 것이 제대로 분별이 됩니다.
 

4. 마음을 새롭게 하라


오늘 제목이 두 가지 몸가짐 입니다. 첫째 몸은 성령님이 거하는 몸을 거룩하게 마음은 새롭게 하라 했습니다. 그 다음 권면은 3절입니다.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세 번째는 생각은 분량만큼 품으라고 합니다.  생각을 품으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감자를 캐서 손으로 품고 나를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욕심을 내어 감자를 너무 많이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 와르르 쏟아집니다. 또 감자 달랑 두 개만 들고 나르면 눈치 보이고 효율성이 없습니다. 감자는 적당히 품고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도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지혜롭게란 뜻은 균형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뜻 입니다. 균형감을 상실하지 않는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은 구름 위에 붕 떠 있다는 뉘앙스입니다. 구름위에 떠있다는 것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본문을 적용하면  자신에 대하여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과소평가도 안됩니다. 교회에서 “나는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야!” 이런 생각한다던가 아니면 구름위에 가면 보이는 것이 없듯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남을 무시하고 자랑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은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했습니다. 무시의 타킷은 교회 지도자가 되기 쉽습니다. 내가 남을 무시하는 생각이 품어지면 구름 위에 있다고 여기고 빨리 안전한 지상으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배해주셨기 때문에 공평하고 공정합니다. 남의 떡 크지 않고 자기 떡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거나 남을 무시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5. 지체 교리


다음은 두 번째 몸입니다. 교회의 지체로서의 몸 가짐 교리를  4-8절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지체의 교리는 너무 유명하여 자세히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교회를 몸의 지체라고 정의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교회는 조직입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합니다. 위에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십시오. 교회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조직입니다. 부장, 과장, 대리, 상사, 중사, 하사, 병 이런 조직과 같아야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썼다면 얼마나 살맛 나지 않고 삭막하겠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몸입니다. 그래서 탄생과 성장이 모두 신비롭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여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좌지우지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몸이라는 것은 다양성이 합하여 연합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손톱, 발톱을 우리는 쓸모없이 여기기 쉽습니다. 가끔 무좀도 생기고 성가십니다. 그러나 손톱 발톱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보호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한답니다. 히말라야 등반 갔다가 손락 끝 8개를 동상으로 잃은 분 인터뷰를 봤습니다. 손톱이 없으니 손끝이 계속 쓸려서 너무너무 아프답니다. 우리 몸의 지체는 쓸모 없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지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없어서는 안 될 불가분의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옆에 성도도 그렇게 여겨야겠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몸의 지체로서의 기능과 몸 가짐을 7 가지로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쓰라고 주신 은사라합니다. 재능은 타고난 것이고 은사는 거듭나면서 특별히 받은 선물을 말합니다. 저는 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이것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 굳이 은사와 재능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분별합니다. 또 본문의 은사는 대표성을 띱니다. 은사는 7가지 이외에 훨씬 많다고 봅니다.
 

6.  7가지 은사


6-8절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의 은사입니다. 각 은사의 의미는 다른 형제님이 많이 교제해주셨으니 생략합니다. 지금부터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보며 나에게 어떤 마음이 드는지 알아 보고 자신이 어떤 은사를 가졌는지 판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찬 때 식당에서 줄을 서서 배식을 받습니다.  밥을 푸는 테이블 앞에 접시가 2줄로 쌓여있습니다.  애찬하시는 한 자매님이 음식을 놓으려고 왔다 갔다 하다 쌓아 논 접시를 떨어뜨려서 와장창 깨졌다고 상상합니다. 
 
첫 번째 반응으로 “자매님 행동을 자세히 보니 앞으로 신경에 관한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할 것 같은데요”하면서 미래에 대하여 조언해 주는 마음이 들면 예언의 은사입니다. 두 번째는 곧바로 달려가 접시를 주으며 쓸고 닦고 하면 섬기는 은사입니다. 세 번째는 “저 테이블이 너무 좁아서 접시가 쏟아 졌어! 가로 3,12미리 세로 4.5센티 늘리자!” 이런 마음이 들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네 번째는 “자매님 기왕 접시 깨진 거 어찌하겠습니까?  어디 발은 안다치셨어요? 다행이네요?” 이러면 위로의 은사입니다. 다섯 번째는 누구를 시켜서 “약상자 가져와!  빗자루 가져와! 스카치 테이프 가져와! 아이들 주변에 오지 말게 해!” 하면서 상황 정리하는 사람은 다스리는 은사입니다. 여섯 번째는 “접시 값 얼마예요? 제가 쏩니다. 다 변상해 놓을 께요.” 이러면 구제의 은사입니다. 일곱 번째는 “자매님 더 많이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예요.”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같이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면 긍휼의 은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한 두 가지는 해당되겠죠?
 
바울은 이런 은사를 가진 지체로서의 몸가짐을 덧붙여 설명합니다.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하라 합니다. 한 마디로 본문은 남의 동네에 기웃거리지 말라입니다. 손으로 숟가락 질 해야지 발이 숟가락 잡으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는 것은 도를 넘지 말고 선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구제는 성실함으로 하라는 뜻은 “단일한 마음으로”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사람의 눈을 모두  인식하는 두 마음으로 하지 말라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는 열정을 가지고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저기 모든 일에 참견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는 억지로 의무감으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6-8절에서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할 것이라. 행하라.”입니다. 영어로 “do it"입니다. 은사는 김치처럼 묵히면 안 됩니다. 은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적극 사용해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거듭나면서 성령님이 거하는 개인의 몸과 교회의 지체로서의 몸 가짐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는 권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개인으로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를 사적예배라 하고 교회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공적예배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예배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합니다. 사적예배를 소홀히 하면 형식적이고 눈가리고 아웅 식의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공적예배를 소홀히 여기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이도기 쉽습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몸 중 첫째 몸은 거룩하게 마음은 새롭게 생각은 분량만큼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지체로서의 몸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사용하라는 권면을 기억하시기를 바라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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