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장에서는 바울이 동족인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언급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역사를 사사건건 방해했습니다. 방해 정도가 아니라 죽여 없애려고 했습니다. (행23:12) 몇 번 했는지 AI GTP에게 물어봤습니다. “8번이었고 최근 연구에 의하면 2번을 더하여 10번이란” 답을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정도 되면 미움이 생길 만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롬10: 1절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동족들을 “형제들아!”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부릅니다.
“이 원수들아!”하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마음으로 동족들이 한 명이라도 구원받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또 이를 위해 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만 “형제들아!” 하는 사랑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서신서만 72번 나옵니다. 그리고 딱딱하다는 로마서에만 10번이 나옵니다. “형제들아!”하는 말씀에 비추어 받는 교훈은 교회는 사랑 제일주의여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 하나면 끝이 아니겠습니다. 교회에 사랑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도 교회 형제·자매들을 늘 이런 사랑스러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
롬10: 2절
.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내가 증언한다고 합니다. 증언은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증언한다는 뜻은 자신이 이미 경험하고 검증했다입니다. 자신도 옛날에는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봤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일등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원수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동족인 이스라엘은 42대째 하나님을 섬긴 모태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장17절에 보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째 모태신앙이라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탄생연대를 BC1900대로 보면 약 2천여 년간 모태신앙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말짱 꽝이라는 겁니다. 본문에서 지식의 뜻은 구원을 얻는 정확한 지식, 구원을 얻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영국의 헉슬리 교수가 더블린에서 개최하는 학술협회에 참석하려고 더블린의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늦어서 급하게 이륜마차를 탔습니다. 당시는 1800년대이니 택시는 없었습니다. 그는 마부에게 급하게 소리를 쳤습니다. “자 늦었어요. 빨리빨리 달립시다!" 그러자 마부는 힘차게 말을 달렸습니다.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습니다. 그런데 학술회 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도착을 하지 않고 여전히 마부는 달리기만 했습니다. 이미 학술 회장에 도착했어야 하는데도 계속 달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왜 아직도 달리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저는 열심히 달리라 해서 달리고 있습니다.” 목적지는 당신이 처음부터 말 안 해 주어서 그냥 열심히 달리고만 있습니다." 헉슬리 교수는 급한 나머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고, 마부도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달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이 달리면 달릴수록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 셈입니다.
마차
어제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강원연합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자바라 게임이 있었습니다. 자바라 게임이 술래잡기 게임이냐 아니냐가 강릉에서 춘천을 향해 올라가면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자바라는 현재 교회 식당에 있는 접이식 문처럼 겹치기로 접었다 펼쳤다 하는 기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한 분이 게임 중반까지 진행하였는데도 룰을 이해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다 엉뚱한 곳으로 열심히 달려서 상대에게 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열심히 엉뚱한 곳으로 뛰기만 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이 얼마나 모호하고 위험한가 생각해 주는 예를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유사하다는 말씀입니다. 42대째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구원받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열심의 문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된 열심, 그릇된 열심입니다. 이 열심은 에너지지와 같습니다. 불 에너지와 비유합니다. 불을 통제하지 않으면 재난이 옵니다. 강릉에서 4월에 경포 산불이 났습니다. 강한 강풍을 타고 불과 8시간 만에 주택 40채, 펜션 28채, 호텔 3개를 태웠습니다. 열심 자체가 필요 없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집, 산, 사람 목숨도 잃습니다.
한국기독교 교계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한 교회들이 그러합니다. 참 열심입니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전도합니다.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열심히 합니다. 지식 없는 열심은 광기가 되는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확인합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나치즘도 예가 됩니다.
그릇된 열심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봅니다. 첫째 이런 모임은 사람을 따릅니다. 어느 모임이나 항상 교주가 있습니다. 사람이 머리가 됩니다. 두 번째는 모임이 조직적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갑니다. 조직을 배반하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세 번째는 모임이 행함 위주입니다. 사람의 인격, 사람의 됨됨이는 뒷전입니다. 모임의 분위기가 축구 광팬과 같습니다. 네 번째는 모두 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자부심들이 대단합니다. 자기 모임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검증하거나 비판받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신들을 비판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다섯째는 진정한 지식, 기독교 정통의 교리,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도 몇 가지만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인용합니다. 그리고 환상주의, 신비주의, 기적, 은사들을 추구합니다. 끝으로는 균형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전도만 열심히 하면 끝이다.”라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쉼이 없습니다. 항상 불과 같이 끓어올라서 안식과 평안이 없이 계속 불탑니다. 우리는 지식 없는 열심 주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안하무인, 독불장군의 마음, 권면을 못 받아들이는 마음, 균형 없는 마음이 있다면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10: 3절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그릇된 열심히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본문에 의(義)가 나옵니다. 의는 옳다는 뜻입니다. “옳다 그르다.”“의”가 왜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까? 사람이 배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먹고, 자고 그냥 육신의 요구대로 살면 좋지 않을까요? 왜 골치 아프게 의와 불의를 따져야 하는가가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이 의롭게 살아야 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를 인간 본성의 법칙, 도덕률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불행하고, 불안하고, 죄책감 이 들게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만 뜨면 옳고 그르냐를 놓고 싸웁니다. 개인 간, 집단 간, 국가 간에도 싸웁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러시아가 헤르손 댐을 폭파했습니다. 어제 우리가 춘천에서 강원교회 연합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장소가 소양강 댐 아래 샘밭이라는 마을입니다. 폭파한 댐의 저수량이 이 소양감댐 6배랍니다. 주민들이 수몰 위기에 처했다 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싸우냐 하면 바로 의 때문에 싸웁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마지막 의자가 다 같습니다. 의롭냐, 의롭지 않냐, 옳으냐, 그르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심어놓은 본성의 법칙입니다.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롭게 살아야 행복한 존재입니다.
3절에서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의에 복종할 수 없었고 대신 자신의 의를 세우려 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자신의 의를 세우려 힘쓴다는 말에서 ‘힘쓰다’는 ‘안달한다’는 뜻입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노력과 수고하는 행위를 힘쓴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의를 쌓으려고 열심을 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고 함을 받으려 했습니다. 자기만족,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의 만을 추구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다는 뜻은, 나의 의의 옷을 벗고 하나님이 입혀주는 (갈3:27)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음을 말합니다.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 골프클럽에 방문할 때는 반드시 그린재킷을 착용해야 들여보내 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문안으로는 다른 옷은 필요 없고 하나님이 만든 그리스도라는 옷을 반드시 착용해야 들어갑니다.
제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6년 동안 기차 통학을 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수백 명의 학생 기차표를 매일 발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이용권을 발급하여 주었습니다. 이걸 “패스”라고 합니다. 패스만 있으면 대합실을 무사통과했습니다. 구원의 관문도 예수님이라는 패스만이 유합니다. 다른 표로는 패스할 수 없습니다.
본문 3절에서 또 하나 교훈을 생각해 본다면 교회 일을 자기의, 자기만족 때문에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는 매일 나가 살다시피 하면서 정작 집에 남편과 아이들의 밥은 굶든지 말든지 내 팽개치는 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가 대견스럽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집안일은 내팽개치면 문제입니다.
성경 통독 12번 하겠다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통독하고 나서입니다. 읽어 낸 자기가 대견하여 성경 1년에 한 번도 못 읽는 사람은 성도도 아니라 하고 정죄합니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산에 가 산기도 40일 하고 돌아온 성도가 있습니다. 돌아왔으면 사랑이 더 깊어지고 성도를 더 잘 섬겨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40일 기도한 일이 자기 의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비판하고 잡아먹을 듯이 하면 안 됩니다. “기도 않는 사람은 성도도 아니야!”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박사 학위 따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독일에서 신학박사 2개를 따 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박사 학위 2개만큼 사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사랑이 많아져서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눈빛이 달라지고 모든 성도를 다 자기 발아래로 본다면 문제입니다. 이러면 자기의 자기만족을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것밖에는 안 됩니다.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일을 하고 난 후에는 어느새 자기 의가 생겨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의는 다 해가 되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빌3:8) 우리도 이런 자세 필요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의를 위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롬10: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스라엘이 복종하지 않은 의,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따로 제공한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구절이 본문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대헌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셨냐는 내용은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9장까지 지속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려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이를 성육신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살면서 율법을 100% 지켰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율법을 단 한 개라도 어겼을 경우 받을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긴 사실이 없었으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는 원어로 “테텔레스타이”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첫째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감, 완성, 다 수행했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백성들의 죗값을 다 지불했다.”“내가 율법의 요구를 다 지불했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한 의는 분명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 율법을 완벽히 지킨 삶, 예수님의 속죄 죽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 내용이 없는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율법을 다 지킨 셈이 되고, 의로운 자가 되며, 율법이 주는 정죄에서 해방됩니다.
롬10: 5-8절
본문은 아주 복잡한 말씀 같지만 한마디로 간단히 옮길 수 있습니다. “구원은 참 쉽습니다.”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까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서, 힘을 써서, 자기 의를 쌓아 구원받으려고 했다고 했는데 본문은 그것과 반대로 말씀합니다. 애쓰고 힘쓰지 말라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멍입니다. 사단이 심판받는 곳입니다. 구원받으려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바닥끝까지 내려가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내용이 8절입니다. 구원받으러 하늘 끝까지 반대로 바닥끝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구원은 가장 가까운 너의 입에 너의 마음에 있습니다. 본문 8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기에 자존심 상할 정도로, 구원받기에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아주 쉽니다. 구원은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고 앉아서 떡 먹기라고 할 정도로 쉽습니다. 본문은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롬10: 9, 10절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본문은 복음 전도 집회만 하면 단골로 등장하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제가 또 설명하면 입만 아픈 말씀입니다.
시편 116펀10절은“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도 나는 믿었도다”입니다. 이 말쯤의 영어 어순은 내가 먼저 믿었고 그리고 말했다고 나옵니다. 마12장34절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앵무새처럼 “믿는다.”라고 고백하거나, 고객 서비스 센터에서 “고객님 사랑합니다.” 하는 인사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서 마음에서 차오르는 것이 말로 나와 고백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주님이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란 뜻으로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히1장3절 중간에 보면 “예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붙들다”는 영어로 “consists”로 우주의 질서와 정렬을 관장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연합하고 통일하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이분이 인격자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과 구원의 고백 내용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고백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고 정리하겠습니다. 사랑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랑이 무엇입니까? 저같이 소심한 사람이 많이 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짝사랑입니다. 짝사랑은 고백하지 않아서 오는 비극입니다. 본문에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폭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신앙 고백하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도 고백입니다. 예를 들어 침례에 순종하는 것도 고백의 일종입니다. 교회 지체로서의 생활도 신앙 고백의 일종입니다. “구원받았으면 끝이야! 나는 이제 산속에서 혼자 편하게 살거야!”“ 교회는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러면 곤란합니다. 히브리서 10장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 권면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더해져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했습니다. 이런 모든 삶이 고백하는 방식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 지체로서의 역할, 교회 지체로서의 삶의 방식 아주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비빔밥이 맛있습니까? 참기름과 고추장과 밥과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잘 비벼질 때가 맛있습니다. 따로 놀면 맛없습니다. 우리 명주로 교회도 모두가 서로 잘 비벼져서 하나님 보시기에 맛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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