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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뿌리의 중요성(로마서11:1-36)

by 명주(明珠) 2024. 8. 24.

 

신학 용어 중에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고 있습니다. 안트로포모르피즘 (Anthropomorphism)이라고 읽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헤아리지  못하고 찾을 수없는 분으로 증거합니다. 이와같이 크신 하나님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사람을 비유하여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예를 든다면 롬10:21절에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종일 두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신인동성동형론적 표현입니다. 출 34:14절에는 하나님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람이 보통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배우자가 다른 남자 만나도 덤덤한 마음이 들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먼저 택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랑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넘어진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을 택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유대인이 질투, 시기가 나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이와 관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유대인은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 대신 택함 받았다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는 유대인 무시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만난 본 적이 없는 분들을 왜 무시합니까? 우리의 상황은 이렇지만, 당시 로마교회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로마서 9.10.11장에 걸쳐 정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갈등이 교회의 존폐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반드시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는 바울의 마음을 우리는 본문에서도 엿볼 수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바울은 동족을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형제는 원어로 아델포스입니다. 아는 같은이고 델포스는 어머니의 태란  뜻의 합성어로 같은 태에서 난  자란 뜻입니다.  그래서 형제라는 용어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애정이 담긴 용어입니다. 바울은 동족을 그렇게 애정어린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유대인 중에 얼마를 구원하려는 심정도 있습니다. 이 마음으로 로마서9~11장을 할애하여 길게 언급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을 본 적은 없지만, 시각을 바꾸어서 우리도 유대인처럼 될 수 있다는 견해에서 본문을 보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바울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황(롬11:1-10)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버리셨는가? 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교회 소수의 유대인 성도들 기죽지 말라 합니다. 버리지 않았다는 첫째 근거가 바울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 버릴 의도였다면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직분은 동족인 이스라엘 처지에서 보면 종교적인 매국노입니다. 나라 전체가 다 예수님을 거부하는데 자기만 믿고 따랐습니다. 게다가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은 바울을 극도로 미워했고(행14:19) 사도권을 공격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영적인 직분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를 배웁니다. 구약의 에서는 명분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창25:24-34) 우리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왕들입니다.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벧전2:9) 우리가 받은 영적인 신분은 바울처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겉모습은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저도 중년 아저씨로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영적인 정체성은 확실해야 합니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는 두 번째 근거는 2~6절까지입니다. 2절만 읽어보겠습니다. “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 엘리야는 BC852~798년까지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바울은 엘리야가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 고발한 사건을 인용합니다. 고발은 경찰에 범죄자를 신고해 처벌해달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왜 자기 백성을 고발했나요? 당시 엘리야의 상황은 너무 힘든 상황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우상 지도자 850명과 대결하여 대성공을 거둡니다.(왕상18장) 이런 일이 있었으면 이스라엘 나라가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알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아합왕과 이세벨은 엘리야 처단 특공대를 조직하여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왕상19:2,14) 그래서 엘리야는 광야로 나가 싸리나무 밑에서 나 좀 죽여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왕상19:4) 바울은 이 상황을 고발이란 용어로 인용했습니다. 죽여 달라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그래 그럼 죽어봐라! 명색이 선지자가 왜 그 모양이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천사를 보내어 지극 정성 돌보십니다. 엘리야의 회복을 도운 후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왕상19:5,6) “너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너 같은 사람 7천 명을 남겨뒀다. (왕상19:18)”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힘내라고 고하십니다. 칠천 명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말씀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으로 일부는 확인 가능합니다. 첫째 엘리야의 수제자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바댜도 있었습니다. 오바댜는 구약 성경에서 제일 짧은 1개 장을 쓴 선지자입니다. 엘리야 당시 오바댜는 아합과 이세벨의 눈을 피해 선지자 50명을 둘로 나누어 동굴에 숨기고 빵과 물을 공급한 장본인입니다.(왕상18:1-6)

엘리야는 자기하나 없어지면 하나님 역사는 망한다  또는 끝장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였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겼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주도적으로 끌고가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교회의 없어서는 안될 기동들입니다.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시각은 "나 하나 없어져 봐라. 교회가 잘되는가? 망한다."하는 생각은 갖지 말아야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남기시고 본존 하십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교회 50년의 역사가 이어왔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뒤에 계십니다.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서 힘을 얻고 한 일이 시골에서 농사 짓던 엘리사 제자  한 명을 세우고 교육하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게 우리한테 왜 그리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때문입니다. 우리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버렸다 안 버렸다 하면 신뢰도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고 사랑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 수있길 기도합니다. 교회를새로지었는데 빨리 의자가 안찬다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라야처럼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면됩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게 보여도 “그런즉 이처럼 지금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이방인에 대한 경고(6-24)



17절을 다 같이 일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21,22절도 같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본문의 핵심은 자랑하지 말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방인의 위치가 돌감람나무고, 곁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 자랑은 옛날 개역한글 성경은 자긍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긍은 “자신을 지나치게 치켜올려서 허풍을 떨며, 호언장담하는 행위”로 나옵니다. 우리 중에 이런 분 계십니까? 없는 줄 압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가 연약한 성도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학연과 지연 따지기 쉽습니다. 지식, 은사, 말솜씨로 다른 성도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 교회 조상이고 터줏대감이라며 우월성을 주장하면 안 되겠습니다. 또 "구원은 우리 교회만 있어 우리 교회만 최고야" 하며 타교회를 무시하는 자교회중심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우린 모두는 평등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 필요합니다. (빌2:3) 낮은 위치가 물리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입니다. 자기를 높여 봤자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1-24절까지 요약하겠습니다.  먼저 택한 이스라엘이 넘어졌습니다. 특히 메시아이신 예수님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냈는데 그들은 율법에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본문 6-8절은 이런 이스라엘의 상태를 소개합니다. 그 상태를“우둔하여 졌다. 혼미한 심령이다. 보고 듣지 못한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준엄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심판에 대한 말씀이 9-10절입니다.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이 된다.”라는 시편 69편 22절 다윗 시 인용입니다. 밥상머리는 가장 평안한 자리입니다. 밥상이 올무가 된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상의 평안함이 다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등이 굽었다는 뜻은 “포로들이 움츠리고 끌려가는 모습, 슬픔이나 고통으로 위축된 모습”을 상징합니다. 또 등이 굽었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못 찾는 상태를 말합니다.

3.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한 축복과 풍성(롬11:11-15)



본문11-14절은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자극해 결국 돌이키기도 한다는 내용을 반복합니다. 15~24절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비유로 소개합니다. 본문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비교할 때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 덩이,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로 비유합니다. 가루의 비유는 하나님께 바쳐진 일부의 곡식 가루로 떡을 만들면 전체가 다 거룩하다는 비유입니다. 샘플이 거룩하면 나머지가 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수박이 잘 익었나 익지 않았나 알아볼 때 삼각형으로 구명 뚫어 뽑아서 맛을 봅니다. 그와 유사합니다. 샘플이 맛있으면 다 맛있습니다.

유대인은 참 감람나무이고 우리는 거기에 접붙인 바 된 돌감람나무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유대인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란 발판을 딛고 이방인에게 복음이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또 자랑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도 신앙선배들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복음을 접했습니다. 선배를 무시하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가아닙니다. 북음은 계승의 역사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습니다. 뿌리와 접붙임에 대한 예화 하나 소개합니다. 포도주 하면 프랑스입니다. 상표가 보르도입니다. 프랑스에는 양질의 포도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양질의 와인을 생산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150년 전에 프랑스의 포도나무가 다 말라죽었답니다. 이유는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뿌리혹벌레가 들왔습니다. 뿌리혹벌레는 포도나무 뿌리에 붙어 즙을 빨아 먹는 해충입니다. 뿌리를 공격하니 줄기, 잎이 모두 말라 죽습니다. 원예가들이 연구한 끝에 미국산 포도나무가 뿌리혹벌레에 강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미국산 포도나무를 대량수입합니다. 문제는 미국산 포도나무가 병충해에는 강하지만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프랑스산 포도나무 가지를 미국산 포도나무 가지에 접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뿌리혹벌레에도 강하고 맛도 좋은 포도를 생산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프랑스 포도밭을 갈아엎는다고 합니다. 요즈음 20~30대 젊은이들이 와인보다 맥주를 좋아하여서 수지타산이 안 맞기 때문이랍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예화에서 뿌리가 중요함을 확인합니다. 또 접붙일 때는 원예학적으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농부가 아니고 조제 업자여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역사는 자연스럽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구원역사는 영적 생명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진액을 공급받는 부분은 뿌리입니다. 저희 집에 십몇 년 키운 큰 화분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그만 말라 죽었습니다.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분갈이가 필요하답니다. 분갈이를 몇십 년 전 사고 단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말라 죽자 밑동 5cm만 남기고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화분을 내다 버리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차일 피를 미루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잘라낸 밑동 옆으로 풀이 삐쳐서 나왔습니다. 뽑아버리려고 보니 풀이 아니고 뿌리로부터 새로운 싹이 나왔습니다. 두 달 동안 삼복더위에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새싹이 나왔습니다. 너무 반갑고 신기하여 기념사진도 찍어두었습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니 죽지 않는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나무가 킹벤자민이라고 합니다. 벤자민은 요셉 동생 베냐민의 영어 이름입니다. 바울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킹벤자민 나무는 난방기 유해 물질, 주방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도 정화해 줍니다. 또 풍요와 발전의 상징이랍니다. 우리도 왕이신 예수님께 접붙여진 사람들로서 그분으로부터 영적인 공급을 받아 항상 싱싱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위도 정화해 주는 빛과 소금 역할도 하길 기도합니다.



4. 이스라엘의 회복과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25-31)



25~2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본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도 결국은 돌아온다는 설명입니다. 본문 26절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겠다는 말씀이고 이 사실을 신비라고 말씀합니다. 신비는 비밀과 다릅니다. 신비는 영어로 미스터리고 비밀은 시크릿입니다. 시크릿은 누구에게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고 신비는 공개되어 있습니다. 공개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복음은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둔하게 되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치 않습니다. 요즈음 시대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이 많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통계에 이스라엘 인구가 865만입니다. 그중 유대교가 75%고 이슬람이 18%고 기독교가 2% 정도입니다. 17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본문 29절은 이 하나님을 후회가 없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후회가 없다는 뜻은 “마음이 변치 않으신다. 어떤 변화도 없다. 목적은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뜻입니다. 후회는 뒤후(後), 뉘우칠회(悔)를 씁니다. 인간은 후회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절대 후회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택함과 부르심에도 후회가 없으십니다.



5. 이스라엘의 위치(32-36)



32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본문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셨다.”라는 뜻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27절에 보면 죄를 제거해 주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을 베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을 얻습니다. 유대인에게 십계명, 곧 율법을 준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 앞에서 죄를 깨닫고 구원받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샘플로 택함 받았습니다.

33-36절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와 지식을 찬양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36절만 같이 읽고 정리하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구절과 관련한 예화가 있습니다. 과학자 중에 마이클 패러데이가 있습니다. 마이클은 천사장 미카엘의 영어 이름입니다. 이분은 전자기유도법칙을 알아낸 분입니다. 패러데이는 오늘 본문 36절 설교를 듣다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는 구절을 듣고 자석 주위에 보이지 않는 힘이 N극에서 나와서 S극으로 휘몰아치며 들어가는 걸 상상했고 1831년 코일 근처로 자석을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이클패러데이의 전자기유도법칙에 따라 발명한 전자기 회전 장치는 전기 모터의 근본적 형태가 되었고, 결국 이를 계기로 전기를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만물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영감을 얻고, 위로를 얻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킹벤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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