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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쉬운 구원(로마서10장11-21)

by 명주(明珠) 2024. 8. 24.

로마서 전체 구조를 볼 때 오늘 10장은 별책부록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복음의 주류에서 밀려난 이유를 계속 설명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 거봐라! 말 듣지 않더니 잘됐다!” 이런 심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롬10:1) 오늘 말씀도 연장선상의 내용입니다.


 
1. 바울은 구약을 인용합니다.


11절부터 보겠습니다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성경에 이르되”하고 시작합니다. 11절은 사28:16 인용입니다. 13절은 요엘2:32절, 15절은 사57:7절, 16절은 사53:1절, 18절은 시편19:4, 19절은 신32:21절, 20,21절은 이사야65:1,2절 인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개인적인 말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지 않아도 할 말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왕년에 복음 전하러 배 타고 가다 죽을 뻔했다. 14일을 낙동강 오리알처럼 표류했다. 한 섬에 갔는데 불피우다 독사가 손가락을 깨물어서 죽다 살았다.” 이런 간증을 해도 좋습니다. 죽을 뻔한 바다가 아드리아 바다입니다. 만난 태풍이 유라굴로입니다. 섬은 멜리데입니다.(행27:27-44, 행28:1-10) 또 “내가 39대나 두들겨 맞아 거반 죽었다가 살아났었다. (고후11:23-27) 내가 3층 천까지 갔다 온 사람이야!(고후12:1-4)” 셋째 하늘을 본 이야기만 하여도 3박 4일은 걸립니다.
 
바울은 구약성경만으로 설득합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설교합니다. 유대인은 구약을 아주 사랑했습니다. 글귀를 써서 손목에 매고 다니고, 이마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집 문설주와 대문에다 붙였습니다. (신명기6장4-9) 고린도전서 9:22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수준에 맞게 설교를 하는 셈입니다. 우리도 이런 자세 필요합니다. 주일 학생이면 주일 학생 수준에 맞게 말씀을 전 해야 합니다. 학생이면 그 수준에 맞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중을 존중하는 설교 3 법칙 있습니다. 첫째 쉬워야합니다. 어려우면 안됩니다. 두번째 의미가 있어야합니다. 셋째가 눈높이에 맞아야합니다. 눈높이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은 말씀 제일주의입니다. 말씀 자체가 생명력이 있습니다.
 
일본에 한 대학교 여학생 기숙사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한 여학생이 다 훔쳐서 막 나가려는 강도에게 “저 값비싼 고서는 왜 안 가져가냐?”하고 외쳤답니다. 강도는 얼떨결에 고서를 들고 갔는데 안 팔렸습니다. 그래서 책에 무엇이 적혔는지 궁금하여 읽었는데 성경이었습니다. 강도는 읽다가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온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일화도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을 갔다 한국에 선교하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관군에 의해 배가 불탔답니다. 겨우 대동강에 도착했는데 그만 칼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그가 피를 흘려 죽어가면서 관군이었던 박춘권에게 성경책을 쥐여 줍니다. 얼떨결에 성경을 받은 박춘권은 자기가 읽지 않고 조카 이영태에게 줍니다. 그 조카가 성경을 읽다 변화되어서 나중에 선교사를 도와 성경 번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먼저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교회에 와서 알든 모르든 꾸준히 말씀을 들으면 좋습니다.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아이들 다른 곳 말고 교회에 풀어서 놀도록 할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2. 차별이 없는 복음입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본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다합니다. 헬라인은 그리스 사람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인 안 그러고 헬라인이라고 할까요? 그리스 신화에 그리스인들은 "헬렌"이라는 사람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이 신화에서 유래된 이름이 헬라입니다. 로마의 헬레니즘 문화도 같은 어원입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이방인들은 모두 헬라인으로 통칭하여 불렀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하면 전 세계 사람, 세상 만민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이시라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한 민족의 신이 아니고. 온 세상, 온 우주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또 예수님도 만주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차별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차별을 두기 쉽습니다. 다 구원받아도 저 사람만큼은 복음이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사람 있습니다. 찔러도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을 그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들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북한 김정은도 복음으로 변화될까요? 지나가는 스님 복음이 들어갈까요? 차별이 없습니다. 유교인, 힌두교인, 차별 없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 복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본문에 차별이 없다고 했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나?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는 구원받았나? 복음의 복자도 못들어본 사람들이 죄다 지옥 가면 하나님 불공평하다. 차별은 없지만 불공평은하다?”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변하겠습니까? 정답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을 주고 있지 않다입니다. 일단 우리가 가져야 할 시각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 죄, 원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만일 양심에 단 한 점도 거리낌 없이 살았다면 구원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전지전능하십니다. 죽기 직전 강도도 구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들에 대하여 지옥행 아니면 천국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성적으로 죄를 알기 전 죽은 아기들은 천국 간다는 주장도 합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는 제한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3. 주님을 부른다는 의미


13절을 보십시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본문에서 부른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부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앙 고백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배가 파선하여 나뭇조각 하나 붙잡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헤엄칠 힘도 없고, 지나가는 배도 없고, 등에 탈 고래 한 마리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사람 살려!”하고 애타게 부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내게는 구원받을 조건이 전혀 없음을 인식하고, 오로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 세리가 자신의 죄인이 된 모습을 깨닫고 어떻게 했습니까?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다! 죄인이다! 했습니다.(눅18장9-14)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설교를 들은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행2:37) 빌립보 감옥 간수도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했습니다.(행16장29-30) 부르는 대상은 오직 주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을 줍니다.
 


4.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본문은 어찌 부르리요, 어찌 믿으리요, 어찌들으리요, 어찌 전파하리요. 어찌란 가정법을 써서 단정합니다.
 
본문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사람을 임명하여 들려주는 방식을 쓰십니다. 사람으로 구성된 시스템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교회로 확대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같은 방법을 쓰십니다. 요즈음은 다양한 방식의 매체가 발달했습니다. 좋은 신앙 서적도 많습니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명설교가 소낙비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매체들이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모여서 말씀 선포의 방식을 쓰십니다.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말씀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 같이 가고 자라는 방식을 원하십니다. 혼자는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습니다. 인격과 인격의 부딪힘 속에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반복하는 말씀이 듣고 들려준다 입니다. 16,17절도 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왜 보여 주는 방식보다는 들려주는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극지방에 가면 오로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모습을 하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옥의 고통스러운 모습도 단 한 번만 보여 주면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엇 하러 입 아프게 설득하고 설명합니까?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은 회개 때문입니다. 보여 주면 천국이 좋아서 교회 오고,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 교회에 옵니다. 이 경우는 인격적인 돌이킴이 쉽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델하우스처럼 보여 주고 입주시키는 구조가 아닙니다. 들려주고 설득하여 회심하게 만들어 입주시키는 구조입니다.


 
5. 메시지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설교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영어로 “good news!”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성경에 기쁨이란 표현이 신약에만 326회 나옵니다. 설교는 도덕과 윤리강의 아닙니다. 율법 강의도 아닙니다.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마라톤이 생긴 유래가 그렇습니다. BC490년에 1만 명의 아테네군이 10만 명의 페르시아군을 마라톤 평원에서 싸워 이깁니다. 이 소식을 휘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아테네까지 약 40km 달려와 수많은 시민 앞에서 “기뻐하라, 우리가 이겼노라!”라는 소식을 전하고 죽었답니다. 이를 기념하여 마라톤 경기가 생겼습니다. 마라톤 달리는 거리는 42.195km입니다. 왜 195가 붙었을까요? 사연이 있습니다. 1908년 런던 올림픽 때 왕실 사람들이 마라톤 경기의 출발과 골인 지점을 평안히 앉아서 잘 보이는 위치를 정하려다 보니 195가 늘어났답니다.
 
복음은 휘디피데스(Pheidippides)라는 병사가 전한 소식처럼 희소식, 기쁜 승전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제 풀려난다는 소식입니다. 우리의 메시지의 내용도 이런 자유, 감격, 즐거움, 기쁨, 환희가 담겨야 합니다. 메시지는 이 기쁨을 기본으로 하여야 합니다. 심각하면 안 됩니다. 설교가 또 정치적, 사회참여 촉구여서도 안 됩니다. 심리 상담도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전하는 메시지 속에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가 좋은 설교인지 아닌지 시금석입니다. 교회는 잔칫집이어야 합니다.
 
어떤 기쁜 소식인지 복습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렸습니다. (엡2:1,2)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심판과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죄가 사라지고 의인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에서 화평케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새생명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후사 곧 상속 재가되었습니다.
 


6. 복음 역사의 거대한 흐름


16~21절까지입니다. 본문을 설명하는데 너무 긴 시간 쓰지 않겠습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 잘 아는 복음 역사의 흐름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구원이 넘어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구원을 많이 받으면 이스라엘이 시기심이 생겨 예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생깁니다. 현재는 땅끝까지 복음이 편만이 전해진 상태이고 유대인들도 많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메시아닉주 같은 곳이 생겼습니다. 본문에서 이방인인 우리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백성이 아닌 백성, 미련한 백성, 하나님을 찾지도, 묻지도 않던 백성입니다. 이런 상태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메시지는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해서 이방인이 우리에게 복음이 넘어간 것이 그냥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거부하리라는 예언은 이사야53장1절에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예배 때 아주 잘 인용하는 고난받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고난받는 메시아는 유대인이 거절하리라는 예언이 이미 이사야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기록이 BC700년이니 이미 800년 전에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9,20절은 신명기32:21절과 이사야65장1,2절의 인용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BC1,450년에 기록했습니다. 유대인이 시기하여 돌아오리라는 예언은 이미 1,450년 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니다. 여러분이 이 찜통더위에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저의 메시지를 듣는 일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 전부터 계획되었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구원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큰 교회와 비교하여 나는 왜 이런 교회의 소속인가 불만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저분만 앞에 세우고 나는 왜 뒷전이야? 저분만 우리 지체 중에 눈과 귀와 입 역할 하면서 튀게 하고 나는 왜 뒤치다꺼리만 하는 냄새 나는 발 역할 만해?” 이런 불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섭리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 해진 환경에 너무 불만을 품지 말고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7. 두 손을 종일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


끝으로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21.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불순종하고 거슬러 말하는 유대인에게 손가락질해도 시원찮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은 장본인들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바라며 종일 서서 두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본문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소개합니다. 두 손을 벌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실감이 나게 해주는 성경 장면이 없나 찾아보니 출애굽기17장10-15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은 출애굽 한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실전은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를 합니다. 그의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지고 올려야만 이기는 상황입니다. 제가 실제 두 손을 벌리고 있어 봤습니다. 1분도 안 돼서 근육이 저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양옆에 아론과 훌이 받쳐주어 그 손이 해가 지도록 올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처럼 종일 팔이 저리고 아파져 와도 늘 내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두 팔 벌려 기다리는 예수님


 
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 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1절에서는 11.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12절에서는 “12.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안 당한다는 뜻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거부당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뉴스에 보면 늘 사기꾼 이야기가 넘칩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신해도 하나님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아멘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아멘에 신뢰할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멘의 반대말을 노멘 (nomen) 이랍니다. 하나님은 노멘이 아닙니다. 본문 “부요하다.”는 뜻은 넘치고도 남을 충분한 은혜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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