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달정사
달정사라는 절에서 스님들이 어려운 안건을 놓고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이 뜨겁습니다. 심각합니다. 심지어 고성이 오갑니다. 밤새도록 토론은 끝이 안 났습니다. 새벽이 밝아옵니다. 이때 구석에 있던 한 스님이 손을 듭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제 그만들 하십시오.”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러면서 토론이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보통 명사화 됐습니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얘기가 나았으니 기독교의 영원한 숙제 가롯 유다 딜레마 말씀드립니다. 가롯 유다가 12제자 중 예수님을 파는 총대를 멨다는 딜레마입니다. 그가 총대를 메지 않았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미완성이라는 주장입니다. 가롯 유다는 십자가 복음의 지대한 공로자입니다. 말이 되나요? 유다는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총대를 메지않았습니다. 유다는 자기 욕심 때문에 스스로 악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유다는 결코 희생양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기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악한 자를 만들어 악한 일에 써먹는 분이 아닙니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다가 원래 악한데 그 악함을 하나님이 단지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귀책사유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입장에서 구원의 원인
또 한 가지 관점은 구원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구원의 원인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가면 선물을 많이 준다고 하여 이웃집 형을 따라 교회에 갔다가 덜컥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가자고 제안한 형, 따라간 나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내가 구원의 원인이 아닌가 의문이 듭니다. 아닙니다. 구원의 동기는 될 지언정 원인은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믿어서, 내가 잘나서, 내 공로가 단 1프로도 안들어 갔습니다. 그런 마음을 준분도 하나님입니다. 구원받은 자 입장에서는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과 작정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작정은 한자로 지을 작(作), 정할 정(定)입니다. 작정은 "일을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다."입니다. 결정한 때가 창세 전입니다. 작정한 목적은 하나님 한분만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요, 예수님의 은혜만 만천하에 드러나게 하려함입니다. 지난 강의까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공평, 불공평 논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고통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어집니다.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이 버림받았고 이방인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이방인의 마당도 더럽다고 밟지 않았습니다. 혹시 잘못하여 밟으면 먼지를 털어버렸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이 버림 받은 것도 유대인의 딜레마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딜레마로 보이는 이 일이 이미 800년 전 구약성경에 예언되었음을 증거합니다.
호세아의 글
본문 25,2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 25절은 호세아서 2:23을, 26절은 호세아1장10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뺀 10지파가 떨어져 나가 세운 왕국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수행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음란으로 명성이 자자한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라합니다. 결혼한 고멜은 아들-딸-아들 순서대로 세 명을 낳습니다. 첫째는 이스르엘로 이름 뜻은 “씨를 뿌린다.”입니다. 둘째는 로루하마입니다. 히브리어 앞에 “로”가 붙으면 부정입니다. 영어 “not"입니다. 뒤에 단어가 “아니다.” 란 뜻입니다. 루하마가 긍휼로 “사함받다.”는 의미이니 로루하마는 “긍휼은 없고 심판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로암미 입니다. 암미는 “내 백성이다.”입니다. “로”가붙으니 “내백성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시대상을 알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이들의 이름이 대변합니다. 고멜은 명색이 선지자와 결혼했습니다.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러면 가정에 충실해야합니다. 그런데 고멜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자녀를 버리고 도망가 삽니다. 가서 잘 살지 못합니다. 그 눈 맞은 남자에게도 버림받습니다. 이런 고멜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찾아가 끝까지 사랑하고 다시 아내로 맞으라 합니다.
이 가정의 비극은 당시 북이스라엘과 똑같다는 메시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각종 죄와 우상으로 아이들 이름같이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하고 버림 받아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당한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 변함없는 구원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심판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에 내백성이 아닌 자를 내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자라 했다는 뜻은 결국은 회복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상황이 유대인들이 넘어지고 이방인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내 백성이라 한 유대인들이 넘어지고 내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이 구원받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본래 고멜과 같고 로루하마, 로암미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사랑받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 전도 집회가 9일 남았습니다. 이 집회를 통하여서도 내 백성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목적
사도 바울이 이렇게 호세아서를 인용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도 집회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얻는 것이 목적이듯이, 바울도 동족을 한 사람이라도 얻으려합니다. 8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상황을 보여 주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영접하고 유대인들도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겁을 줘서 돌아오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말 잘 안 들으면 심판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무시무시한 지옥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옛날에 어떤 부흥집회에 참석 한 일이 있습니다. 부흥 강사가 강대상 옆에다 고기 굽는 드럼통을 두었습니다. 그 위에 돼지 바베큐처럼 헝겊으로 사람 모형을 만들어서 걸쳐놨습니다. 왜 그러나 궁금했는데 지옥의 실상을 전하고 나서 헝겊에 불을 붙였습니다. 지옥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천정으로 연기가 펄펄 났습니다. 강사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의아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관용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사람을 얻습니다.
이사야서의 인용
다음은 이사야서 인용입니다. 계속 27,28 절을 보십시오.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본문은 이사야의 글 10:22,23을 인용했습니다. 다른 점은 구약에는 이사야가 외쳤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며 외쳤다는 해석을 넣었습니다. “외치다. ”는 “새가 압박을 받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에서 유래했답니다.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해야 할 때 울부짖으며 말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점은 이사야서는 남은 자가 돌아온다 했고, 바울은 구원받는다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는데 이 심판을 끝까지 행한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심판 얘기는 생략했습니다. 바울은 심판 얘기를 빼고 남은 자를 구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최대한 부각 시킵니다. 바울이 구약을 인용할 때 문자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살아 있지만 조금씩 문구는 바꾸어 인용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구약의 인용한 말씀에서 같은 부분과 다른 부분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구약과 신약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구약말씀의 1차 수신자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2차 수신자가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에도 남은 자 사상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이라고 나옵니다. 3차 수신자는 오늘날 우리와 먼 미래 예수님의 증거를 가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복합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구약 따로 신약 따로 국밥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나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절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십니다.
제가 드리고자하는 메시지는 성경66권은 죽어 있는 책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문자 그대로가 아니어도 또 성경의 일부분만 떼서내어도 우리 삶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이 말씀의 원리는 현재 우리 인생의 깊은 고민거리를 해결해 줍니다. 성경에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구약은 옛날 기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에서 오늘날 우리 삶의 원리를 찾아 냅니다. 그래서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남은자 사상
27,28절의 핵심은 남은 자 사상입니다. 남은 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 남은 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희망을 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버림받은 유대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는 자들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남은 자는 남겨 둔 씨로 다시 설명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은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는 분이 아니라 씨를 남겨 두십니다. 남은 자와 씨는 같은 의미입니다.(이사야1장9)
우리는 남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남겨 둔 씨들입니다. 남았다고 하여 우리가 찌꺼기란 뜻은 아닙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이 좀 모지라는 사람이 교회를 지킨다.” 말이 있습니다. 여기계신 분들이 못난이란 의미는 아니겠죠? 여기 계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남겨둔 남은 자 곧 하나님이 보전한 씨들입니다. 못난 자는 결코 아닙니다.
정약용 이담속찬
정약용이 편찬한 속담집인 “이담속찬”에 나오는 말입니다. “농부는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 말이 있답니다.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다음 농사에 쓸 종자는 남겨둔다는 말입니다. 강릉 대기리에 가면 씨감자를 키웁니다. 씨감자는 사람들이 직사광선을 피하고, 섭씨 3-4도씨에 잘 보관했다가 파종하는데 씁니다. 씨감자는 최우수품종입니다. 병충해에도 강하고 바이러스 피해도 없습니다. 수확량도 월등하게 증가하게 해줍니다. 애지중지 키웁니다. 대기리 고랭지사업소에 알아봤습니다. 종돈, 종자 소도 있습니다. 종자 소 한 마리에 2억8천 만원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씨의 예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애지중지하여 남기고 보전하신 분들입니다. 자부심 가지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 조건에도 씨를 남겨두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장래도 걱정하지 말아야합니다. 개인의 장래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50대 아저씨 들이 은퇴하고 나면 명주로 교회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씨를 남겨서 보존해 주십니다.
이신칭의
30,31,32절은 사도바울이 지금까지 줄곧 증거한 이신칭의 사상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를 증거합니다.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유대인들은 믿음의 법을 따르지 않고 행위의 법을 따랐습니다. 행위의 법을 따른 다는 것에 대한 간단한 예를 하나들겠습니다. 저희 딸 예린이가 4살 때 울릉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깥 경치를 잘 보려고 배 창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얼마 못가 배 가운데로 바로 옮겼습니다. 너무 출렁였습니다. 제일 걱정했던 예린이는 울릉도 도착 할 때까지 잘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대한 예화
강릉에서 울릉도까지 161km정도 됩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갔는데 바다 위를 걸어서 가려는 사람이 있다 가정합시다. 가능합니까? 안목에서 걸어가다가 바닷물이 코에 차면 다시 뒤돌아 나오고 또 돌아 나오고 일생을 해도 몇 십 미터 못갑니다. 어떻게 가야합니까? 묵호항에 가서 배를 타면 됩니다. 배에 타기만하면 3시간 반이면 울릉도까지 갑니다. 걸어서 울릉도 가려는 게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다 한 가지만 어겨도 다시 제자리입니다.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배,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야 합니다.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33절을 다 같이 읽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은 돌 사상으로 마무리합니다. 32절 하반 절에 부딪칠 돌이 나옵니다. 또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돌이 많이 나옵니다. 주춧 돌, 뜨인 돌, 머릿 돌, 모퉁이 돌, 산 돌, 반석 많습니다. 이것만 정리해도 하나의 메시자 될 듯합니다. 돌, 반석은 모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이고 힘 있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반대였으니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니 구약 성경을 달달 외워도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 없이 어린아이 같은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잘못인용하면 이단이 탄생합니다.
인생의 디딤돌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예수님이 인생의 디딤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빼면 시체인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는 1등 국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어 넘어졌습니다. 부끄러운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잉크 먹은 스펀지를 꾹 누르면 잉크물이 나오듯이, 신자들을 꾹 누르면 예수님이라는 국물이 나와야합니다. 뒤에 플래카드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했습니다.(빌1:21)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합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열면 예수님이 살고 계셔야합니다. 빈 집이면 안 됩니다. 다른 분이 살고 있어도 안 됩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메시지는 나는 명주로 교회에 디딤돌인가? 아니면 걸림돌인가 한번 자문해 봐야합니다. 디딤돌은 못 되도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합니다.
토머스 카알 라일은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한 사람은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여기고 주저 앉지만, 강한 사람은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딛고 더 높은 곳을 향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산돌이신 예수님을 디딤돌 삼아 어떤 역격도 다 이겨내는 성도들 되기를 기도하면서 제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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