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수단은 세 가지입니다. 말씀, 성례, 기도입니다. 성례는 침례와 주님의 만찬입니다. 마지막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 안 하면 안 주신다고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24시간 쉬지 않고 마치 숨을 쉬듯이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기도에 대한 신자의 자세를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얼마 전 시사프로에 한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이 나왔습니다.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자 답답한 마음에 평소 다니던 기도원에 갔습니다. 거기서 사기꾼 부흥 강사에게서 속는 사건이었습니다. 남편이 쓰러진 것이 “당신이 목사 사모님의 길을 안가서 모든 불행이 왔다.”라고 하여 현재 남편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게 만들어 가정을 파탄 냅니다. 또 선교비 명목으로 2억 원이 넘게 뜯어냈습니다. 이분이 결국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습니다. 속이는 사람이 물론 가장 악하지만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신앙을 가졌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문구가 성경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미국 교회 앞에서 설문조사 했더니 60프로가 성경에 나온다고 했답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식들이 무조건 땡 깡을 부린다고 요구를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4살 아이가 칼을 요구하면 칼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제가 4살 때 어머니가 칼국수를 썰고 둔 부엌칼 몰래 들고 가다 넘어져 왼쪽 눈 아래를 찔려 상처가 났습니다. 저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4살 때 벌써 칼을 잡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요구가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심사숙고한 후에 들어줄 건 들어주고 안 되는 것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본다는 뜻도 기도를 100% 들어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뜻은 아버지가 아이들 두 발 자전거 가르칠 때 상상하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계속 자전거를 뒤에서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다 어느 정도 스스로 타면 살짝 손을 놓고 뒤 따라 갑니다. 그리고 넘어지려는 순간에 다시 잡아 줍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아이의 자전거 뒤를 따라가는 형국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본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을 주신 배경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십시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쭈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세기 유대에는 세 개 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입니다. 당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곧 올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가 와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를 해방시키고 유대인이 중심이 된 나라를 건설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날을 대배하기 위하여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런 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사두개파는 현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쿰란동굴에 거주하며 금욕을 강조했습니다. 이 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정체성과 사상을 담은 기도문이 있었답니다. 그걸 주문처럼 하루 3번씩 습관처럼 외웠습니다. 세례요한이 에세네파였습니다. 그의 제자 중 몇 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력이 커지자 우리도 그런 정형화된 기도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여 기도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주신 배경입니다. 동기야 어찌 되었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담았고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다른 교회들은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자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주기도문인데 중간에 기도가 빠져 주문이 되기 쉽습니다. 주문 외우듯이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습관처럼 하지 않습니다.
먼저 6장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십니다.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출생의 비밀입니다. 어렵게 살아가던 남자가 알고 보니 모 기업 회장의 감추어 둔 아들이었더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꿈을 꿉니다. 보모님들이 놀리느라 아이들을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 “그래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그렇다면 나의 출생의 비밀은 대기업 회장이 버린 아들이 아닐까?” 이런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러나 하나님과 회장은 비교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들입니다.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등상 삼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로 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이 있어야겠습니다.
본문에 아버지는 “파테르”입니다. 파테르는 근엄하게 “아버님 아바마마” 란 뜻이 아닙니다. “아빠”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던 친근한 단어입니다. 파테르는 구약에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처음 쓰신 단어입니다. 우리 신분은 보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친아들, 친딸이 된 자들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 아빠 앞에 서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단어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 합니다. 나의 아빠, 개인의 아빠가 아니라 우리 아빠로 부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공동체 지향적인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 아버지가 다른 분이 계시다면 한 지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랍비의 우화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녀를 어깨에 메고 사랑을 표현하는 인물로 종종 묘사합니다. 저희 아버님은 4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기일이 9월 10일 얼마 전이었습니다. 제가 본문을 실감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살던 동네 이름이 절골입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절이 나오는 동네라서 절골이었습니다. 그 절골을 거쳐 외길을 따라 4킬로 더 가면 왕신이란 동네가 나옵니다. 왜 왕신이냐 하면 왕이 그 동네를 지나가다 신발 벗고 쉰 동네라 하여 왕신입니다. 갓거리도 있는데 왕이 지나가다 갓을 걸어 놓고 갔다 하여 갓거리입니다. 왕신에 사는 4-5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저를 괴롭혔습니다. 당시는 학교에서 건빵도 나눠줬는데 건방도 뺏고, 쥐어 박히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절골에는 도와줄 형들도 없었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아버지한테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동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이놈 들 왜 우리 아들을 괴롭혀!”라고 하며 큰소리를 지르면서 왕신으로 올라가는 아이들을 따라 가 혼내 주었습니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절골이 다 떠나갈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괴롭히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 뒤로 괴롭힘이 없어졌습니다. 왕신에서 학교를 등하교하려면 반드시 제가 살던 동네 절골을 거쳐가야 했습니다. 강과 산이 가로막혀 돌아가는 길은 없었습니다. 돌아가려면 2개월은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절골에서 이순신 장군처럼 떡 버티고 서서 저를 지켜 주셨습니다. 괴롭히려고 하면 “아빠한테 다 일러준다.” 이러면 꼼짝 못 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제가 비행청소년이 되지 않고 6년 개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사례만 더 말씀드립니다. 저희 딸이 5살 때 어버이날에 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고 리본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어버이 감사합니다.” 란 글씨를 써서 선물을 했습니다. 이 선물 1년은 가슴에 달고 다니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도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는 자세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빠, 아버지 앞에 설 때에는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내편이라는 마음과 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살펴드리려는 마음입니다.
6장 9절 하반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첫째로 기도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거룩히 여기라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인데 우리가 거룩하라고 기도한다고 거룩이 더해지겠습니까?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광 돌린다고 영광이 증가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야곱의 우물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2천 년 동안 마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도 2년 동안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과 예수님을 비교할 정도였습니다. 야곱의 우물을 칭찬하고 높이고 영광 돌리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의 우물에 꽃다발을 두르고 폭죽 터트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야곱의 우물을 매일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시원하다 칭찬하는 것입니다. 또 그 물을 혼자만 마시면 안 됩니다. 야곱의 우물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야곱의 우물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영광 돌리는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점심때 먹는 애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자매님들에게 영광 돌리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밥과 반찬을 떠서 밥상에 올리고 멋있다고 사진 찍고 냉장고에 넣고 보관하는 것이 영광 돌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밥과 반찬을 일단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또 혼자만 맛있게 먹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받게 하고,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잘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 은혜를 혼자만 누리지 않고 많은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드린다는 의미는 내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 성이 땅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초반에 설명드린 기도원 사기꾼 강사 사건이 방송을 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입니다.
6장 10절 상반절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두 번째 기도해야 할 것은 나라가 임하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본문에서 나라가 임한다는 뜻은 통치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없이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곧 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없으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조상 중에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김시습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은 생육신의 한 사람입니다. 강릉 김 씨입니다. 조선 3대 천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시습은 생후 8개월에 글을 깨쳤답니다. 3 살에는 글을 지었답니다. 5 살 때 대학과 중용을 마스터하여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세종대왕에게 까지 소문이 나 5살 때 왕궁에 들어가 글을 지어 바쳤습니다. 그랬더니 세종대왕이 칭찬하고 비단을 선물로 줄 정도였습니다. 김시습은 금오신화 비롯하여 20편의 저작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다가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살았답니다. 이분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이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사람은 천재라도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방황하다 사찰에서 59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와 아직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으로 이미 우리 마음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미래적으로는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가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내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위로부터 나야 가능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탄생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 이후로 우리도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하여 위로부터 나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계속 일어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김시습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줄어들도록 해야 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임해서 이번 10월 20일 침례식에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는 10절 하반절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나고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통치와 영광만 있습니다. 하늘은 또 죄와 고통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나 몰라라 하고 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나의 뜻 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가 늘 살피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살피지 않고 인간적인 의욕과 열심을 내면 내는 만큼 손해입니다. 또한 하나님 뜻이 아니면 그 길을 가지 않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한편으로 보면 무서운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완벽히 이루어진다면 공산주의가 다 무너져야 합니다. 공산주의 말만 공산이지 공산당이 특권을 다 차지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무너져야 합니다. 현재 전 세계 1%의 부자들이 나머지 99%를 다 합친 재산보다 2배가 많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주주의, 신본주의로 바뀌어야 합니다.
또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은 생명이 살아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너무 맛있는 음식을 맛보거나, 너무 황홀한 자연경관을 보면 누군가 같이 먹고 봤으면 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특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뜻은 혼자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불완전하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에는 병자들이 없다고 했는데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성도가 병으로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를 위해 중보기도 하여야 합니다. 질병에서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아야겠습니다.
네 번째는 11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구하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무서운 요구이십니다. 우리는 10년 치 양식, 노후 대비 양식까지 구하기를 잘합니다. 또한 그 양식을 자손에게 물려주기도 합니다.
본문을 좀 달리 말하면 단순하게 하루치 양식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복잡하지 않게 심플(Simple)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심플하지 않으면 신풀(Sinful)하게 된답니다. 신은 죄(Sin)에 붙이는 말입니다. 심플하지 않으면 심플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훈련을 한 일이 구약의 만나 사건입니다. 당시는 하루치만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2~ 3일 치를 거두었습니다. 많이 거둔 양식은 아침에 다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하루 이상의 양식을 위하 수고한 모든 수고는 썩는 양식을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6일 차에는 2일 치 양식을 미리 거두라 했습니다. 그다음 날은 안식일이어서 미리 거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꼭 7일째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실수로 하나님이 내려주지 않나 하고 나갔었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내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또 먹이시니까 그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라는 의미도 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니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뜻입니다.
다섯 번째는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본문은 우리가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큰일 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운전하면서 뒤에서 빵빵 거리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에게 살인 심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변엔 늘 원수들이 생겨납니다. 그럼 우리는 다 구원받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과의 연합의 교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상에서 다 사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위치에서 원수의 죄를 이미 용서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3:34절“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는 이미 원수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자들로서 남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기는 적어도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남을 7번까지는 용서해야 하냐고 예수님은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490번 하라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유치원 원장이 여주인공의 외아들 5살 아이를 유괴하고 죽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유괴살해범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주변에서 성도들이 자꾸 용서를 강요합니다. 그래서 용서하러 교도소에 갔는데 범인도 이미 용서받았다과 하면서 얼굴이 너무 평온했습니다. 여주인공은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그 후로하나님을 원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돕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체험하러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체험한 입장이 아니라면 용서하라고 남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이 백데나리온 자기에 빚 진자를 용서 못한다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로마에 마친 50년 치 세금에 해당하는 큰 액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의 증오를 밀어내야 진정한 용서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흙탕물에 맑은 물이 들어와 흙탕물을 밀어내면서 깨끗해지듯이 예수님도 용서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율법적으로, 기계적으로 용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더 커지기를 자연스럽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기도가 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본문에서 시험은 마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악도 일반적인 악이 아니라 악한 자란 뜻으로 동일하게 사탄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는 영적인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편에 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탄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을 유혹을 이기셨고 십자가를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밟으셨습니다.
현재 세상은 하나님이 악을 어느 정도 누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떻게 누르고 있습니까? 사회법으로 누르십니다. 형법, 민법, 도로교통법, 법 많습니다. 또 사람의 양심을 사용하셔서 악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4절을 보면" 위정자들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위정자들을 세워 악을 제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악을 제어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면 세상은 금방 악으로 가득 차고 종말이 옵니다.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 마귀, 귀신과의 영적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일상을 귀신과 연결시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단들 중에는 귀신론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돌부리 걸려 넘어져도 귀신이 그랬다 합니다. 머리가 좀 아파도 귀신의 역사라 합니다. 본인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넘어진 것입니다. 본인이 건강관리 잘못하여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억울해한답니다. 내가 안 그랬는데 다 뒤집어씌운다고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잘 넘어갈 때는 내가 할 수 있을 때, 내가 성공했을 때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저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하면 유혹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에게 유혹이 된 거는 만들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왜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죄를 졌습니까? 그가 목동이었으면 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왕이라서 모든 걸 할 수 있으니 죄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됐다 싶을 때, 성공했을 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해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사탄은 성도의 감정을 자극하여 유혹을 많이 합니다. 분을 내게 하여 성도 간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가인도 자기 분에 못 이겨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분노가 일 때 “아 이거는 사탄의 장난이구나!” 알아차리고 분을 내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상으로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 대해 다 교제했습니다. 그러면 다 같이 주기도문으로 기도드리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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