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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겨자씨 믿음의 의미(누가복음9장28~48, 17장5~6)

by 명주(明珠) 2024. 9. 5.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에서 의사를 하다 40세에 복음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분입니다. 이분이 설교한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인데 이곳에 40년 동안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겼던 장로분이 있었답니다. 이분이 죽기 전에 목사님 저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더 강하게 더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다짐했답니다. 저희가 지난 수요일에 남겨진 자들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내용 중 휴거하지 못한 여주인공이 혼란한 마음으로 인근 교회를 방문합니다. 교회에는 놀랍게도 목사님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주인공이 휴거하지 못한 이유를 묻자 중요한 것은 믿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평생 성경을 가르쳐도 믿지 않으면 비극입니다. 예수님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요한복음6:28-29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일보다 믿음입니다. 40년 봉사한 장로님이나 영화 속에 올라가지 못한 목사는 평생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불철주야 힘썼지만 믿음이 없어 낭패당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높은 산에 올라가 영광스럽게 변화한 예수님이 나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5대 사건 중 하나라 합니다. 5대 사건은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본문의 변화입니다. 수요집회 오시는 성도님은 오늘 내용은 다 훤히 꿰고 계신 줄 압니다. 따라서 내용을 요약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의 시점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1년 반 된 시점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싸우기만 했습니다.(9:46, 22:24, 9:34) 예수님께서 인류 구속역사를 위하여서 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시청각 교육을 하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데리고 가려면 12명 다 데리고 가시지 하필 3명만 데리고 가십니다. 이 일이 9명의 제자에게 화근이 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와 선지자도 나타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황홀해서 거기서 눌러살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으로 예수님은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이니, 그의 말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다음날 산에서 내려왔는데 9명의 제자가 귀신 들린 아이 하나를 놓고 못 고쳐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한탄하시고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본문에 패역은 어그러질 패(), 거스를 역()을 써서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름을 말합니다.

 

이 사건과 연결되는 사건을 누가복음175,6절에 기록을 했습니다. 17:5-6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본문과 병행 구절은 마태복음 17:19-20절입니다. “19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믿음을 말씀하시며 겨자씨와 뽕나무와 산을 소품으로 씁니다. 뽕나무를 언급한 것은 뿌리가 강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 어릴 때 뽕나무는 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 변에 많이 심었습니다. 뽕나무 뿌리가 튼튼하여 둑이 무너지는 걸 방지했습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강해 안 뽑히는 나무인데 믿음은 그걸 뽑아 던질 정도로 강하다는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당시 사람들은 너무 작아서 적어도 겨자씨보다 더 작은 건 없다고 강조할 때 언급했답니다. 우리도 쥐방울 만한 이라든지, 쥐 뿔도 모르는 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작고 있으나 마나 한 것을 표현합니다. “거의 없다, nothing.”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겨자씨는 볼펜 점 하나 만한 씨앗입니다.

겨자 밭과 꽃

 

제가 신앙생활 초기에 믿음은 뽕나무도 뽑고, 산도 바다에 던진다고 하여 시험해 보았습니다. 뽕나무나 산까지는 필요 없고 볼펜을 놓고 시험했습니다. 볼펜을 놓고 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믿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볼펜 10제 앞으로 움직이게 주십시오.” 하면서 손가락으로 볼펜을 향해 찔러보았습니다. 근데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믿으면 된다 했는데 기독교 2,000여 년 역사에 뽕나무가 뽑혔거나 산이 들려 던져진 사례는 없었습니다. 에베소 서 28절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2000년 동안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이런 모순에 대하여 묵상하고 교제하고자 오늘 제목을 겨자씨 믿음의 의미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차이가 있습니다.

 

겨자씨 믿음의 첫째 의미는 주석 적으로 본문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질적 요소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나옵니다. 작지만 완벽한 믿음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꼭 뽕나무나 산이 무 뽑히듯 뽑혀 던져질 이유가 전혀 없으므로 그런 기적이 안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겨자씨 믿음의 의미는 구약의 사건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구약에 비슷한 사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입니다. 모세의 시내 산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입니다. 모세의 시내 산 사건은 출애굽기 19, 20장에 나옵니다. 당시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산 아래서는 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에 만든 금송아지가 애굽에서 우리는 인도해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 앞에서 여호와의 축제일로 정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우상에게 드리며 먹고 마시고 뛰놀며 축제를 즐겼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 광경을 보며 돌 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그리고 레위인들로 우상숭배 죄를 지은 백성 3,000명을 칼로 죽입니다.(32:28) 이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된 마음이 나타난 구절이 출 32:1입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3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입니다. “우리를 인도할”“우리를 위하여”“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한입니다. 온통 하나님은 어디 가고 우리만 남아 있습니다.

 

이 백성들과 오늘 본문에 9명의 제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들은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친 경험이 이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96절에 나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 내어 쫓는 일을 한번 경험한 9명의 제자는 자기들의 능력으로 쫓아낸 줄 착각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은 쏙 빼고 제자 3명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 경쟁이 치열했는데 이 일로 9명의 제자는 속으로 칼을 갈았을 것으로 추측 가능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귀신에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오자 이번이 한 건 할 기회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멋지게 귀신을 쫓아내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도 제자 중에 있다는 존재감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또 예수님께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능력을 주신 예수님은 어디 가고 온통 이들의 마음에는 자신감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귀신을 쫓아낼 리가 만무합니다.

 

그다음은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했습니다.(9:22,23)저희 직장에서 규정을 만들 때, ”~를 할 수 있다.“란 표현을 가끔 씁니다. 이 표현을 쓰는 이유는 할 수 없는 상황을 염두 해 두기 때문입니다. “해야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표현은 못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를 할 수 있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할 수 있다는 표현은 쓸 수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작정하시고, 계획하시면 그게 그대로 이루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활할 수도 있고 잘하면 부활안 할 수도 있어이런 신앙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 할 수도 있고, 까닥하면 안 할 수도 있어~” 이런 신앙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과 아버지의 믿음을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겨자씨 믿음에서 한 가지 의미를 찾는다면 히브리서 11장을 참고합니다. 11장에는 아벨의 믿음으로, 에녹의 믿음으로, 아브라함 자신의 믿음으로,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표현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 야곱, 요셉, 모세는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의 하나님의 믿음은 사람의 실수와 허물과 상관없이 끝까지 그 사람을 완성의 자리까지 끌고 가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윗하면 성경이 물매 돌 한 개로 골리앗을 죽인 멋진 사람으로만 소개하지 않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감추려고 충신 우리아를 죽인 죄와 허물의 사람으로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다윗 왕국이 예수님의 왕국의 그림자로까지 높여 주십니다. 그래서 시편32:1절에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겨자씨 믿음은 나의 경험, 나의 노력, 나의 능력이 온전히 부인된 상태, 나의 옛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고 하여 자기 자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온전히 부인된 사람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려고 해도 아예 내세울 것이 없이 연약하기만 합니다. 아이는 부모를 100%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서두에서 읽은 마태복음 1719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 했냐고 묻자 20절에 겨자씨 믿음을 말씀하셨고, 21절에는 이런 것은 금식과 기도로밖에 이런 유가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없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는 금식과 기도로 나옵니다.

 

기도의 본질도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자기가 부인된 상태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고백이 기도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우리의 육체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는 죽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금식함으로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렇게 무력하고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가 금식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밥을 굶으면서까지 성의를 보이니 하나님께서 뭔가를 들어 주셔야 한다고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겨자씨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만 의지 하는 신앙 행위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다는 의미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924)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긍휼만 바라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온전케 된 아들을 아버지에게 돌려줍니다.

 

946-48절을 읽겠습니다. 제가 군대 시절에 후임 병사가 소설책 한 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소설 제목이 이청준 작가가 쓴 당신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이 소설 내용이 본문과 연관이 되어 소개합니다. 소설은 소록도를 배경으로 했습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끼리 모여 사는 섬입니다. 전남 고흥에 있고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을 각색한 소설입니다. 소록도 환자들의 유일한 꿈은 빨리 나아서 거기를 떠나 육지로 가 평범하게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곳에 부임하는 병원장들은 이들의 꿈과는 반대였습니다. 그 소록도를 개조하여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태가 괜찮은 환자들을 낙원 건설에 동원하고 거의 죽어 나가도록 일을 시킵니다. 그러나 병원장이 이렇게 하면 할수록 환자들은 계속 탈출을 시도합니다. 병원장들은 자기 명예욕, 공명심에 가득 차 소록도 환자들의 꿈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낙원처럼 좋은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날을 위한 보은의 날 감사 행사를 합니다. 바로 이날 병원장은 어떤 나환자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소록도는 나환자들의 천국이 아니라 자기 과시욕에 빠진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라 메시지를 주는 소설이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소설의 병원장처럼 힘으로 남위에 군림하는 천국을 꿈꾸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처럼 손가락 하나로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나라를 꿈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 뭇사람을 섬기는 사람만 있는 나라입니다. 현재 교회도 서로 낮아져 섬기는 사람만 있다면 작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그대로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집니다. 천국은 지시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 낮아져 섬기는 사람만 있는 곳입니다. 왕도는 낮아져 섬기는 왕, 겸손의 왕도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처럼 인격이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올해 성경 2번 통독한 사람이 성경 1번 통독한 사람을 무시한다면 안 읽은 것만 못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내 산과 변화상을 비교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시내 산에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습니다. 변화 산에서는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들고 산 아래 내려왔을 때는 징벌로 3,000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반대로 변화 산에서 은혜의 예수님이 산 아래 내려왔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살아나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고 오시자 귀신이 뽕나무처럼 뽑혔습니다. 율법의 산, 우상의 산, 인본주의의 산이 들려서 던져지는 영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겨자씨 믿음을 배워서 남을 살려 주는 신앙인격의 소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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