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 수요집회에 거의 정각 8시에 도착했습니다.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출발하려고 일찍 나왔는데 아파트 1층 주차장에 주차한 제 차 뒤를 가로막는 주차를 누가 해놨습니다. 아직 8시도 안 되었습니다. 주차브레이크 내리고 중립인가하여 밀어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핸드폰 전등 켜고 전화번호를 알아 차주에게 전화했는데 꺼져있습니다. 4번이나 반복해서 전화했는데도 여전히 꺼져있습니다. 아파트 방송실에 부탁할까 하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서 저희 자매 차로 바꾸어 교회로 오느라 지각할 뻔했습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차 키를 교회 사무실 앞에 흘리고 와서 한 형제가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 앞에서 분노가 목구멍 9부 능선까지 올라왔는데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 제목이 분노와 평정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제 제목을 미리 아시고 더 실감 나게 말씀을 전하도록 이런 상황을 연출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의 다윗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평정심을 유지했고 일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평정심은 평안한 마음 고요한 마음입니다. 평평할 평(平) 고요할 정(靜)자를 씁니다. 분노는 성낼 노(忿) 성낼 분(怒)자를 씁니다.
학자들은 우리 사회를 분노 사회라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듭니다. 음주 단속에 불만을 품고 차에 휘발유를 붓고 파출소로 돌진한 사람 있었습니다. 10대가 호기심에 외제 차를 쳐다만 봤는데 20대 운전자가 자기를 째려봤다면서 시비가 붙어서 칼부림 난적 있습니다. 주차 시비도 많지만, 아파트 층간소음 참지 못해 망치 들고 올라가고, 칼 들고 올라간 예도 많습니다. 길 가다 아무나 때리는 묻지마 폭행도 많습니다. 끔찍한 분노범죄도 잦습니다.
요즈음 코로나 19로 거리 두기가 장기화하니까 고립으로 인한 분노가 더 쌓입니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조사에 의하면 한국 사람의 분노 도가 독일보다 6배 높습니다. 국민의 반이 분노감정을 느낀답니다. “마스크 좀 써달라!”는 요구에 시비가 붙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평정심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경은 분노의 원인을 하나님과 불화 관계로 봅니다. 에베소서 2:14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고”라고 말합니다. 평정심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 관계가 회복될 때 지속 가능 합니다.
1.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삼상17;1-11)
본문 1절에서 11절입니다. 양진영으로 군대가 대치하고 있습니다. 분노에 찬 거인 한 명이 이스라엘 군을 위협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일 동안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한 명 나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1로 대결하여 지는 쪽을 종 삼겠답니다. 본문 3, 4절을 참고합니다. 본문 2절 “전열을 벌이다.”는 군대가 횡대로 늘어서 대치 중이란 뜻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었습니다. 골짜기에 상수리나무가 많았나 봅니다. 엘라는 상수리 나무란 뜻입니다. 상수리는 참나무과입니다. 골짜기 넓이가 400m입니다. 골짜기 양쪽으로 있는 산 높이는 50m입니다.
이 대치 상황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 축소판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게 보이지만 성경은 두 진영밖에 없다고 봅니다. 예를들면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마음의 할례 받은 자와 무할례 자,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 의인과 죄인, 하나님 편과사탄 편입니다.
본문 5~7절에는 골리앗을 길게 소개합니다. 골리앗 이름은 방랑자란 뜻입니다. 키 2m 95cm, 갑옷 무게 57kg, 창 날만 6.8kg입니다. 골리앗은 항상 앞에 방패든 자를 대동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대표 장수 1:1 대결을 요구했는데 1:1은 인도주의적으로 보입니다. 문헌에는1:1은 미신에서 나왔다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1:1로 싸워 이긴 쪽은 반드시 이기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없는 미신은 우리주위에도 많습니다. 예를들면 ' 빨간색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 ' 중국이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진시황제가 빨간색을 자기만 독차지하고 싶어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자는 잡아다 죽인 데서 유래했습니다. '축구 골대 맞추면 진다. 미역국 먹으면 시험에 미끄러진다. 모서리에 앉지 마라. 문지방을 밟지 마라. 밤에 손톱 깎으면 귀신이 쫓아다닌다. 밤에 휘파람 불면 뱀 나온다. 애인에게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 아홉수는 안 좋다. 내 뒤 담화하면 귀가 간지럽다. 돼지꿈은 행운이 온다. 이사는 손 없는 날 간다. ' 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습니다.
4절에서 골리앗의 출신지 가드는 역사적 유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1장22절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명하며 호흡이 있는 자는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 합니다.(신20:16)
하나님의 전쟁은 영적전쟁으로 우상을 몰아내고 심판을 대행합니다. 여호수아는 세개의 도시는 완전히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가드입니다. 삼하21:16-22절을 보면 골리앗 동생들이 4명 있습니다. 가사는 또 사사 삼손의 눈을 뽑는데 일조한 들릴라의 고향입니다. 삼손 시대 때도 이스라엘은 국가가 몰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아스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간 도시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군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 이스라엘 진영의 다윗 소년(삼상17:12-30)
본문 12-40절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본인이 원했거나 의도한 바는 없습니다. 아버지 심부름 왔다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모욕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본인이 그 치욕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어린 다윗 기특합니다. 그런데 이 다윗에게 대노하는 사람이 있의니 큰형 엘리압입니다. 엘리압 이름 뜻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입니다. 다윗은 “사랑 받는자.”입니다. 28절을 보면 “네가 어째서 여기 있냐? 치던 양들은 어디에다가 내팽개치고 왔느냐? 이 교만하고 완악한 동생아!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구나. 전쟁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호통칩니다. 완악은 입에 담기조차 악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먼 거리를 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까지는 24km입니다. 형들 먹을 음식을 싸 왔습니다. 당시는 정규군대가 없었고 필요할 때마다 군사를 모집합니다. 군량미도 집에서 자체 조달합니다. 다윗이 가지고 온 음식량이 많고 무거웠습니다. 고생하며 먼 길 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심은 외면당하고 욕만 실컷 먹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판사판 공사판이다고하며 막 나가기 쉽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합니다. “형이 뭔데! 형이 내 맘을 그렇게 잘 알아! 형은 그렇게 잘났어?” 하기 쉽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밭은 자였습니다. 왕입니다. 위에 형들 7명이 기름 붓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삼상16:11-13) 왕궁 출입도 이미 하고 있습니다. 특권의식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형 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야! 왕이야! 왕! ” 하며 반발하기 쉽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나는 말 한마디 물어본 것뿐인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야단이십니까?” 최대한 말꼬리를 낮춥니다.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눈 치켜뜨고 말했다면 형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30절을 보면 다윗이 이 말을 하며 돌아섰습니다. 다윗은 분노를 잘 다스렸고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3. 사울의 허락(삼상16:31-39)
33절을 보면 두 번째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이 나옵니다. 사울 왕의 설득입니다. 사울은 이 싸움은 소년과 용사의 싸움에 불과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다. 고래와 새우의 싸움이니 포기하란 의도로 말합니다.
사울 왕은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다윗이 나가겠다면 용기백배 해줘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태클을 겁니다. 이때도 다윗은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합니다. 35~37절을 보면 광야 경험을 말합니다.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단호한 말에 사울도 더 만류 못하고 허락합니다.
사울 왕이 자기의 군복과 놋 투구와 칼을 줍니다. 다윗 몇 발자국 걸어보니 자기 스타일이 아니어서 벗어버립니다. 자기만의 스타일 대로 목동 막대기와 물매만 가지고 나갑니다.
물매 훌륭한 무기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란 영화 참고합니다. 감자 만한 돌을 6-8번 돌리다 던지면 초속 35m/s로 날아갑니다. 45구경 권총 총알을 받아내는 만큼의 충격량입니다. 문제는 정확성입니다. 다윗은 이를 위해 광야에서 수없이 물 매질을 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고(삼상16:13절). 처음 한 일이 수금을 타서 사울 왕의 악령을 내쫓는 일이었습니다. 수금은 9-10줄로 된 현악기이고 기타보다 맑고 부드러운 소리가 납니다. 수금 연주로 악령을 쫓은 걸 보면 음악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후로 찬송가도 만들고 악기 제조도 했습니다.
한나라의 왕이 악령에 들리자 나라 상황이 어려워집니다. 지도자들이 평정심을 잃으면 분별력이 흐려집니다. 평정심을 잃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면 핵무기 사용승인을 하여 인류를 불행으로 떨어지게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윗은 궁중 악사요 호위무사로 활동했고(삼상16:21) 왕궁 심부름도했습니다. 특권의식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집에 오면 평소와 똑같았습니다. 양을 돌 보러 광야로 갔습니다. 아버지 심부름도 합니다. 왕궁 출입하면 양치기 친구들 불러놓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양 치는 일은 가장 천한 일입니다. 현재 다윗이 돌보는 양도 장차 자기 몫은 없었습니다. 위로 형이 7명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분배가 큰형이 배로 가져갑니다. 나머지 순서대로 7명에게 나누다 보면 8번째인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자기 양도 아닌데 목숨 걸고 돌보고 지킵니다. 사자의 입에 들어간 양까지 포기치 않고 빼앗아 왔습니다. 참 목자의 모습 엿봅니다.
다윗은 7번째에게 한 번쯤 불만 표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기름 부은 자예요. 제가 언제까지 양 똥을 치워야 하나요? 이제 잔심부름 만은 7번째 형 시키세요.” 크러나 다윗은 한결같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아버지 심부름 갈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양지키는 자들에게 양을 부탁하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삼상17:20) 전쟁터에 서도 형들 만날 때 짐을 짐 지키는 자들에게 맡기는 것 잊지 않았습니다.(삼상17:22)
4.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삼상17:40-47)
본문41에서 49절까지입니다. 다윗이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막대기를 들고 나오는 다윗을 본 골리앗은 나를 개로 여기느냐며 저주하고 찢어 죽이겠다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 보고 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개는 가장 싫어하고 금기로 여겼습니다 (왕상21:23, 왕하9:36) 골리앗 스스로 개의식 가졌 습니다.
정신의학 신문에 사람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 중 하나가 “낮은 자존감”이랍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사소한 일에도 분노합니다.
45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의 “만군의 여호와”는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보호자”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요새요 방패란 뜻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 믿고 담대합니다. 다윗은 관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실제 체험한 신앙입니다.
5. 다윗의 승리(삼상17:48-49)
49절에 보면 돌 한 개로 골리앗 이마에 정확히 맞춥니다. 1타1 즉사시켰습니다. 항상 그랬었습니다. 광야에서 급소가 아닌 사자의 엉덩이를 맞추면 역공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 다윗이 골리앗 앞에 평정심을 잃었다면 백발백중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위기에 양치기 목동을 등장시킵니다. 다윗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쟁 비전문가입니다. 전쟁 초보입니다. 전쟁을 칼과 창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씁니다. (고전1:28) 우리도 이 하나님 안에서 만은 조금 못나도, 학벌이 조금 부족해도, 언변이 조금 안 좋아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강의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 왕의 인구조사 결과(역대상21장1-14절) (0) | 2024.07.17 |
---|---|
기구한 운영을 타고난 요아스 왕(요엘2:25-32) (0) | 2024.07.17 |
창세기 행복론(창세기2:7-25) (0) | 2024.07.17 |
천지만물과 인간의 기원(창세기1장-1-6 / 26-31절) (0) | 2024.07.17 |
모세의 마지막 노래(신명기 32장 7절, 11절, 44-52절) (0) | 2024.07.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