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가니니 일화
영국 런던 어느 거리에서 초라한 행색을 한 노인이 구걸했습니다. 발 앞에 적선을 위해 모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합니다. 비까지 내려서 모습이 매우 처량합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누구도 동전 한 닢 던져 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바이올린 소리가 형편없었습니다. 중간 중간 잡음도 났습니다.
어떤 외국인이 다가왔습니다. 동전은 넣지 않고 바이올린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선율이 나옵니다. 삽시간에 군중들이 몰렸습니다. 물론 돈 통도 가득 찼습니다. 금화, 은화까지도 던져졌습니다.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군중 속에서 알아 본 사람이 소리칩니다. “야! 파가니니다! 파가니니다!”
여러분도 음악에 문외한인 저와 비슷한 반응입니다. “도대체 뭘 파가라는 거야? 파가니니가 누구야?” 니콜로 파가니니는 18세기 이탈리아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랍니다. 행실은 추천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란 제목으로 2014년에 개봉했습니다. 연주하다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는데도 감동적인 연주를 했답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은 연주를 들을 때 마다 기절해버렸답니다. 같은 바이올린인데 누구의 손에 들려지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났습니다.
2. 모세의 노래
오늘 본문은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부른 노래입니다. 유언과 같은 노래입니다.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면 신세 한탄이 나올 법도 합니다. 반대로 본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넘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떻습니까? 몇몇 유명인의 유언을 찾아봤습니다. 버나드 쇼는 죽을 때 “내 우물쭈물 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란 말을 남겼습니다. 이브 몽땅은 “시간은 흐르고 추억은 남는다.”라고 합니다.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잠을 잤구나!”란 말을 했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잘 아시죠.“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전태일 민주 열사는 “엄마 배고파”였답니다. 태조 왕건은“인생이란 원래 그렇게 덧없는 것이다.”하고 죽었답니다. 중광 스님은“괜히 왔다 간다.”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하고 했답니다. 이완용다운 유언이죠. 대부분 유언은 인생의 덧없음, 허무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릅니다.
2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언어의 마술사 같습니다.
1-43절까지가 모세의 노래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는가.”라는 관점으로 정리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영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감(五感)으로 감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딤전6:16) 또 귀로 직접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맛볼 수도 없습니다. 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촉감으로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신체의 기능에 비유하여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말하는 하나님(32:1),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32:12,13), 손을 쓰는 하나님(32:39,41) 등으로 표현합니다.
4. 신인동형론, 신인동성론
두 번째는 인간의 성품에 비유합니다. 본문에 보면 질투하는 하나님, 진노 하는 하나님, 분노하고, 염려하고, 슬퍼하는 하나님으로(32:16,21,22,27)나옵니다. 하나님을 우리 신체 기능에 비유하는 것을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이라합니다. 성품에 비유하는 것을 신인동성론(神人洞性論)이라고 합니다. 주의할 점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기억하는 하나님 하면 하나님도 건망증이 있어서 우리를 깜빡 잊어버렸다가 다시 기억한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기억하는 분입니다. 또 질투하는 하나님 하면 막장 드라마나, 삼각관계 상상하면 안 됩니다. 슬퍼하는 하나님 하면 인간들의 분노, 좌절 때문에 슬퍼하는 하나님으로 상상하면 안 됩니다. 범죄 한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 영적인 분노로 이해해야 합니다.
5. 옛날을 기억하라
7절을 참고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본문은 동사가 6번 나옵니다. 기억하라(Remember), 생각하라(Consider), 물으라(Ask) 2번, 설명하라(Explain), 말하라(Tell)입니다. 무엇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무엇을 묻고 설명하라는 말입니까? 옛날 일, 역대의 연대는 지나간 시대, 지나간 세대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역사를 기억하라 입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자녀들은 역사한 하나님에 대해 부모에게 물으라합니다. 부모들이 역사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분문에 기억하고, 생각하라고, 명령합니다. 요즈음은 생각을 방해하는 시대입니다. 생각의 힘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많습니다. 우리 뇌는 가소성이 있습니다. 가소성이란 어떤 작업을 반복하면 그 방향으로 더 잘할 수 있게 뇌의 회로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방향이든 긍정적인 방향이든 상관없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힘을 키웁니다.
6. 자녀를 가르치라
본문 7절과 연관된 구절이 46, 47절입니다. 참고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모든 말,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둘 뿐아니라 지켜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헛된 일이 아니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헛된 일은 텅 빈, 허상을 말합니다. 허상은 신기루에 비유합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신기루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신기루는 오아시스가 실제는 먼 곳에 있는데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지표면에 있는 뜨거운 열기가 거울 역할을 하여 그렇게 보입니다. 지친 여행자가 모르고 계속 신기루를 쫓아 헤매다 보면 목숨을 잃습니다. 오아시스는 지하수가 나와 만들어집니다. 지층 깊은 곳에서 물이 나오기때문에 사막 한가운데서도 마르지 않는답니다.
본문 7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역사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E.H 카아라는 역사학자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말합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19세기 초 영국 국교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당시 문제를 3개의 단어로 축약하면 무사안일주의, 세속주의, 형식주의입니다. 교회에서 좌석료 곧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비국교도라 합니다. 19세기 초는 영국 성인 1/3이 국교회를 나와 비국교도가 되었답니다. 국교회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하도록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는 국왕이 머리가 된 셈입니다. 오늘날도 국교회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합니다.
7. 죠지뮬러에 관하여
신앙위인 중 기도의 아버지 죠지뮬러를 소개합니다. 죠지뮬러는 1805년 프러시아인 크로펜스타트(후 독일 편입)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세무 공무원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세무공무원 계십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그래서 어려움 없이 자랍니다. 어린 시절은 노름, 도둑질 등으로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전합니다. 비행 청소년이었고 좋지 않은 곳을 많이 비행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버지가 교회 헌금하라고 준돈 횡령해서 스위스에 친구하고 놀러갑니다. 14살에 술과 도박으로 밤을 새우느라 어머니 임종도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다 전합니다. 호텔에서 사기 치다 감옥도 갔었습니다.
이런 그가 1825년 11월 20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계기는 조그만 토요일저녁 기도 모임에 갔는데 합심기도를 했고 무명의 형제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 매우 감동을 받았답니다. 그 후 친구와 함께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문을 읽고 듣는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남을 체험합니다.
구원 받은 지 2개월 만에 선교사로 살겠다고 결단했다가 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영국으로 갑니다. 그는 성경지식협회를 설립해서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자들을 교육합니다.
그는6개 언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이 능력은 성경보급과 문서사역에 쓰임 받습니다. 죠지뮬러는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 받은 분입니다. 1만 명 이상의 고아를 돌본 고아의 아버지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고아원 운영의 재원 한화로 75억이 넘었는데 모두 기도로만 충당한 기도의 용사입니다.
8. 독수리의 비유
오늘 본문 39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나니 내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란 표현이 있습니다. 처음 파가니니 예화에서도 바이올린이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지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는 예화 드렸습니다. 죠지뮬러가 사단의 손 안에 있을 때 어릴 때부터 비행 청소년이 되어 쓸모없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으로 빚어졌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고 돌보셨는가를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는 행위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검은 독수리를 말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멸종위기 1호입니다. 천연기념물 243-2호입니다. 그래서 잡아먹으면 잡혀갑니다. 독수리 알도 푸라이 해 먹으면 안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독수리 수명은 최대 80년입니다. 알도 단 두 개만 낳습니다. 그래야 되겠죠? 수십 개 씩 낳으면 지구상에 토끼, 뱀 , 너구리 다 사라지겠죠? 알 두 개도 다 키우지 않습니다. 알 상태에서 암놈이 한 개의 알이 확실하게 살았다고 여기면 하나는 깨뜨려 버립니다. 만약 두 개가 모두 부화했다면 먼저 태어난 형이 반드시 동생을 둥지에서 떨어뜨려 죽입니다. 냉정한 동물의 세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본문에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는 표현은 새끼가 95일 정도 크면 훈련시키려고 둥지 밖으로 몰아낸다는 뜻입니다. 비행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범을 보인다는 뜻입니다. 어미가 먼저 날개를 파닥이면서 이렇게 나는 거야하고 모범을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4,000미터까지 올라가는데 거기서 떨어지면 독수리 새끼는 뼈도 못 추립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어미가 최대한 붙어서 날다가 떨어지면 바로 받아줍니다. 독수리는 이런 행동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래서 강인한 날개를 갖도록 돕습니다.
또 업는다는 표현은 싣다, 운반하다, 떠받친다는 뜻입니다. 이는 새끼를 적의 위협에서 방어하고 구출한다는 표현입니다.
이상에서 하늘의 왕자 독수리는 태어난 것이 아님을 봅니다. 독수리는 만들어집니다. 목숨을 건 혹독한 훈련을 거쳐 2미터의 날개를 펴고 4,000미터 상공을 유유히 자유자재로 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인도하실 때 이렇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30년 애굽의 노예 생활을 경험하게 합니다. 출애굽 때도 10가지 재앙 속에서 탈출시킵니다. 척박한 광야 속에 집어넣고 40년을 보내게 합니다. 낮엔 구름 기둥, 밤엔 불 기둥으로 인도합니다. 만나를 떨어뜨려 먹여줍니다.
독수리 비유에서 기억할 것은 어미는 둥지에 새끼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낭떠러지로 일부러 떠밉니다. 몇 천 미터 상공에서도 과감히 떨어뜨립니다. 죽는다고 소리 지르면 받아냅니다. 독수리 새끼 입장에서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안전합니다. 지금까지 어미가 떨어뜨려 죽인 새끼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9. 모세의 최후
본문 49,50절.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50.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모세는 느보 산에서 죽습니다. 나이는 120세입니다. 느보산 해발800미터이고 가나안땅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멀리서 둘러보기만 하고 죽으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하라는 대로 순종하여 느보산에 올라가 숨을 거둡니다.(신34장:5,7) 하나님은 모세가 왜 죽는지 소상히 반복해서 말합니다.
본문51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므리바에서 반석에 물이 나오게 한 사건은 민수기 20장1-12절에 자세히 나옵니다.
당시 모세는 말씀만으로 반석에 물이 나게 하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로 2번 바위를 칩니다. 이 행위가 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했다고 보시죠? 거룩이란 단어를 깨끗하다는 의미로 보면 안 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매우 높고 위대한 속성을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렸습니다.
누가복음12:48절 말씀을 참고하면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많이 맡은 이에게 많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 영적인 이유는 모세가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율법과 사람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각자 하나님께 받은 분량만큼 귀하게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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