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의 지혜 예화
강사가 강의 중에 하나님이 번개를 써서도 죄를 심판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한 학생이 찾아와서 질문을 합니다. 전날 밤 학생 집에 소나기가 내리면서 번개가 쳤는데 아침에 버드나무가 맞아 두 동강이 났습니다. 강사님에게 “버드나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강사님 지혜를 발휘합니다. 강사님은 강대상을 두 번 두드리면서 “학생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떠들면 회초리로 칠판을 이렇게 두드리죠? 조용히 안하면 너희도 이렇게 된다는 경고용입니다. 번개에 맞을 확률은 60만분의 1인데 번개가 학생 집 버드나무에 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합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일으키는 재앙은 메뚜기 재앙입니다.
요엘서 1장1절입니다. 요엘서는 소선지서 입니다. 분량이 작아서 소선지서 입니다. 3장입니다. 요엘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요엘의 아버지는 브두엘 입니다.(요엘1:1) “하나님의 성실”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요엘에 대한 정보는 더 없습니다.
주석가들은 본문에 나오는 두로, 시돈, 블레셋(3:4), 애굽, 에돔(3:8) 여호사밧 골짜기(3:2) 등을 참고하여 배경을 남 유다 왕 요아스 때라고 주장합니다. 요엘서에는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요아스는 7살에 왕좌에 올라 40년을 다스립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있습니다. 열왕기하10,11,12장과 역대하 24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요아스 왕의 탄생 배경
요아스가 1살 때입니다. 요아스의 할머니 아달랴가 요아스 뿐 아니라 모든 형제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본문에는 멸절, 진멸이란 말을 썼습니다. 왜 할머니 아달랴가 이렇게 했을까요? 아달랴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아합, 이세벨은 악하기로 유명하고 전국적으로 바알 우상 숭배에 빠뜨린 장본인들입니다.
아합 왕 때 남유다와 결혼정책을 맺어 딸 아달랴를 왕후로 보냅니다. 남유다로 온 아달랴는 남유다 왕국까지 우상숭배로 물들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시는 하나님이 택한 나라 남북 모두 모두 악을 행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를 통해 예후라는 왕을 기름 부어 세웁니다. 예후는 북이스라엘 왕 뿐 아니라 남 유다 왕과 추종 세력들까지 모두 죽입니다.
아합 왕의 아들 70명의 머리를 베서 광주리에 담아 전시하기도 합니다. 이 때 요아스의 아버지이자 아달랴의 남편도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문병 갔다가 죽습니다. 아달랴 입장에서는 친정부모가 다 죽었습니다. 형제도 죽었습니다. 남편까지 죽은 셈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아달랴는 손자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다윗왕가의 씨를 다 말리고 여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가를 통해 메시야를 보내겠다 약속합니다. 이 약속이 끊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 여호야다였고 아내가 여호세바입니다. 바로 이 여호세바 공주가 그 피바람 속에서 1년 된 핏덩이 요아스를 빼돌립니다. 그리고 남편 여호야다와 함께 유모를 고용해서 성전에서 몰래 6년을 키웁니다. 요아스아 7살되 던 해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반격을 시작합니다.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왕궁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아달랴 여왕과 그 세력을 다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합니다. 왕권을 되찾고 성전도 수리하면서 순수성을 회복합니다. 이것이 요아스가 7살에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스토리입니다.
혁명을 성공한 요아스는 처음엔 선정을 베풉니다. 문제는 완전한 개혁을 못합니다. 산당들은 제거하지 아니하고 남겨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분향 합니다.(열왕기하12:3)그 과정에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살에 늙어 죽습니다.(역하24:15)
이때부터 요아스 왕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비겁하게 되어 아람 왕이 쳐들어오자 적은 숫자인데도 겁먹고 두려워 하나님의 재물을 내어 줍니다. 왕궁 금덩어리들도 갖다 바치면서 항복을 합니다.(왕하12:18) 또 유대 방백들과 함께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경고 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서 책망도 합니다. 요아스는 스가랴마저도 성전 뜰에서 돌로 쳐서 잔인하게 죽입니다.(대하24:21)
의인을 죽이는 시대는 그만큼 악하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도 직접 인용합니다. 마23장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재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사가랴의 피가 그 피입니다.
요아스 시대의 죄악상
요엘 시대의 죄를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시대입니다.(요엘2:32) “이제라도 내게로 돌아오라”란 명령을 반복합니다. 술에 취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요엘서1장5절) 시대가 어두우면 알코올 의존도가 높아집니다.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욜1:8, 13) 소제는 곡식 가루를 태워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제는 포도주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없다는 것은 예배 자체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라면을 끓이다 보면 어느 시점까지는 잠잠히 있다가 임계점인 100도에 도달하면 일제히 끓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도 악에 대하여 참고 경고하고 지켜보다 임계점이 오면 심판합니다.'
메뚜기 재앙
하나님이 이런 시대에 메뚜기 재앙을 일으킵니다. 본문 2;25절을 다참고합니다. “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본문에 밭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은 각기 다른 곤충이 아닙니다. 메뚜기입니다. 표현만 다르게 합니다. 주석가들은 본문을 4번 메뚜기 떼가 휩쓸었다고 해석합니다. 메뚜기를 군대라고 표현합니다. 메뚜기 얼굴이 말을 닮아서 그런지 기마병에도 비유합니다. 요엘서1장과 2장 11절까지 31개절에 걸쳐서 메뚜기 재앙의 극심한 피해, 무서움을 말씀합니다. 먹어치우는 것을 사자 이빨, 암사자의 어금니로 비유합니다. 사자 무는 힘 제 몸무게 7배 450키로 랍니다. 나무껍질까지 말갛게 벗기고 하얗게 드러났다 합니다. 밭, 토지, 곡식, 각종 나무 다 초토화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즐거움이 말랐고, 두려움으로 얼굴 하얘졌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메뚜기 귀엽기만 합니다. 방학 때 마다 메뚜기 채집합니다. 메뚜기 방아 찧기 놀이 도했습니다. 뒷다리 잡고 있으면 열심히 방아 찧습니다. 색깔도 파란 색깔입니다. 심지어 튀겨서 간식으로도 먹었습니다. 고소합니다. 민간요법에 천식, 백일해, 아이들 경기에 좋답니다. 메뚜기는 대장도 없는데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 의문입니다. 오늘날도 메뚜기 재해가 자주 보도됩니다. 아프리카 중동에 4000억 마리가 창궐했답니다. 우리나라도 해남에서 발생했습니다.
메뚜기의 집단 행동에 대한 실험
2006년 사이언스 지에 실험 내용이 실렸습니다. 도넛 같은 공간에 메뚜기를 넣고 관찰한 결과입니다. 1평방미터 공간에 17마리 정도까지는 제각각 여유롭게 귀엽게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62마리까지 늘어나자 이들의 행동이 돌변합니다. 집단으로 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마치 군대가 행진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메뚜기가 밀집되면 스트레스를 받아 호르몬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장에서 없었던 페로몬이 만들어져서 메뚜기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면 몸집도 커지면서 색깔이 녹색에서 황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메뚜기가 황충이 됩니다. 그러면 2000미터까지 바람을 타고 올라갑니다. 200km까지 이동도 가능합니다. 하루3만5천명분의 식량도 먹어치웁니다. 서울면적의 10배를 휩씁니다.
메뚜기 퇴치법 한 가지만 소개하면 오리를 풉니다. 오리 한 마리가 400마리 메뚜기를 먹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메뚜기 떼가 자기 나라로 올까봐 파키스탄으로 오리부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오리특공대라고 해야 하나요?
미물을 사용하여 심판하는 이유
하나님은 왜 미물을 사용여 심판합니까? 구약에 이, 파리, 개구리, 독종, 세균을 씁니다. 하나님이 미물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는 미물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엄위가 얼마나 큰 가 나타내려 함입니다.
본문 요엘의 일관적인 메시지는 돌이키고 회개하라입니다. 성전에 모여서 울부짖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특히 모이라고 많이 합니다. 2장16-17절을 참고하면 제사장, 장로 뿐 아니라 어린아이, 젖먹이, 신혼살림에 들어간 신랑, 신부까지도 모이라합니다. 유대인들의 신랑, 신부는 결혼하고 1년간은 모든 의무와 책임에서 제외시켜줍니다. 그런데 이들까지도 모여서 회개하라합니다.
2장13절을 참고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옷을 찢는 것은 극심한 재난에 직면했을 때 행하는 슬픔의 관습적인 표현입니다. 당시는 통회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옷만 잘 찢었습니다. 가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행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합니다.
마음을 찢을 때 본문 26,27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주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줍니다. 후에 아주 놀라운 약속을 줍니다. 28,29절은“그 후에 내가 내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2장에 성취됩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때 본문을 인용합니다. 이 설교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3천명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행2:38-41) 주석가들은 요엘서2장을 구약의 성령 강림 장으로 부릅니다.
본문에 자녀들, 늙은이, 젊은이, 남종, 여종 나눈 것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내려준다는 뜻입니다.(32절)
영혼육을 가진 인간
인간의 본질을 영혼육으로 봅니다. 각 기능은 몸은 외계를 인식하고 혼은 자아를 인식하고 영은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우리 영이 죽어 있다가 구원받으면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영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자들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좀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게, 성령님을 주관적으로 역사를 많이 일으키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솟구친다던가 잘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반복한다던가 성령 받으러 높은 산에 가 소나무뿌리 뽑으며 기도해야한다던다가? 어떤 기적을 일으킨다던가 하며 주관적인 역사로 오해하기 쉽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님의 역할에 대하여 아주 객관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자세히 나옵니다. 한마디로 성령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우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깨우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침례 받고 현재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이 성령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안계신데 여기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스키장 안가고, 바다낚시 안가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찬예배도 드립니다. 찬송도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저는 물리전공이어서 확실하게 증명 안 되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또 절에 제 이름을 어려서부터 올리고 보살님의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변해서 강단에 서서 말씀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체로서 늘 우리 곁에서 도움을 주시는 보혜사이십니다.
롬8:11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니” 본문의 영은 다 성령님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령님께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말씀은 이미와 아직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 몸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몸을 죽어도 장차 살려낸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적으로 우리 몸에 생명의 기운을 주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것이 병중에 있는 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제 개인간증하나 말씀드립니다. 제가 커피를 낮12시 이후에 마시면 밤에 잠을 잘 못잡니다. 지난 목요일 날 5시쯤에 잘 안 먹던 햄버거를 하나 먹었습니다. 느끼함을 없애려면 콜라를 마셔야 하잖습니까? 콜라가 없어서 원두커피를 마셔버렸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잤습니다. 아침에 이 부작용으로 천정이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지럼증이 찾아왔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을 갑자기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베게에 고정시키고 하루 종일 누워있었습니다. 어지럼기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롬8:1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제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했습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죽을 몸에 생기를 주신다 했으니까 생기를 주셔서 어지럼증을 낮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90%이상 좋아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성령님의 역사는 성경 말씀과 함께 일어납니다. 말씀을 읽는 가운데 묵상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주시고 또 힘과 위로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안에 성령님이 어디 있나 자기를 분석하고 분해하면 안 됩니다.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의지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크고 두려운 날
31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날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요엘서서 반복하는 예언은 여호와의 날입니다.(1:15, 2:1,2 11, 3:1, 14, 18) 8번 반복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제가 물끊을 때 임계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지켜보다가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극적으로 개입하는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기 때문에 늘 함께 하지만 극적으로 개입하는 날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 심판, 본문의 메뚜기 재앙도 한 예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좀 더 확장하면 세상의 종말을 암시합니다. 이때가 되면 무시무시한 자연 재앙이 닥칩니다. 본문 30절부터 보면 하늘과 땅에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있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 합니다. 최후의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32절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많은 공적을 남겨서 구원이 아닙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고, 두려운 날입니다. 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그날이 축제의 날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아직 진실 되게 회개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올해는 꼭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날마다 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화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탁탁 두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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