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했던 경험
성도님들은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이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다음 주 결혼식이 있는데 행복 중에 하나에 들어가겠죠? 제인생 중 언제 행복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인거 같습니다. 제가 3시면 해가 지는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하버드대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기차역에 축하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군대 전역할 때도 행복했었습니다. 27개월을 마치고 부대를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했던 곳을 빠져 나올 때 기뻤습니다. 또 뒤늦게 취업했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제가 20대 때 선교 활동한다고 성경책 끼고 왔다 갔다 하면서 30살이 되도록 취직도 하지 않고 부모님 걱정을 많이 끼쳤었습니다. 그러다 취업해서 어머니 축하를 받았던 때가 눈에 선합니다. 또 자매를 만나서 결혼했을 때도 아주 행복했습니다. 제가 33살 노총각이 구제를 받았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째 딸이 태어났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주위에서 예쁘다고 칭찬해 주고 심지어 아동복 회사에서 모델하자고 제의도 왔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아들하고 4살 때 한겨울에 방문과 바깥 베란다 문 다 열어놓고 안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북극곰 놀이할 때 행복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하교 졸업했습니다. 이제는 옆에 가면 저를 징그러워합니다. 역시 가장 큰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 받았을 때 아주 행복했습니다. 성도님들은 언제 행복하셨습니까?
2. 저자 모세에게는 본문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행복이란 단어를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검색했습니다. 26,976건이 나왔습니다. 세상에서는 행복에 대해 쓴 책이 한 트럭입니다. 오늘은 성경 창세기 2장에서 행복론을 찾아보겠습니다. 창세기 저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모세 BC1446년경에 기록했답니다.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 같은 시대에 썼습니다. 창세기는 싯점이 창세 때부터 하나님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가 모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순전한 상상력인데요? 모세가 가장 불행 할 때 창세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롤러코스터 인생이었습니다. 40년을 대 이집트 왕자로 살다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당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의 자리에 있다가 살인자가 되어 미이안 광야로 도망 갑니다. 이 광야에서 그야말로 양 똥치는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습니다. 모세가 왕궁에 살 때 창세기를 기록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 가장 괴롭고, 가장 비참할 때 기록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 민족은 왜 이집트의 노예로 몇 백 년 동안 괴롭힘을 받는가? 나를 지도자로 세웠다고 하는데 나는 평생 이 미디안 광야에게 양똥만 치우다 죽을 인생이구나.” 이런 원망이 들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을 주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태초에 인생들에게 어떤 행복을 주셨고, 우리는 왜 그걸 잃어버렸는가? 하는 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으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형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노예백성을 구하기 위해 갈 때였다면 갈 수 있는 힘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세기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까지 읽도록 한 것은 현재 우리도 창세기 2장을 보면서 모세와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3. 인간의 본질
그럼 창세기2장 7절부터 보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1장은 일반적으로 천지창조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장부터는 인간을 중심으로 다시 창조를 기술합니다. 본문 7절은 인간의 기원, 인간의 본질을 전해줍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창조과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공정과정이 다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장인 정신으로 한 땀 한 땀 빚어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셨으리라는 상상이 듭니다. 그래서 인체는 너무너무 신비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존엄합니다.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신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해도 안 되고 자기를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서 살게 된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자기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게 해 준 분을 전혀 모르고 사는데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본문에서 유추할 메시지는 먼지 철학입니다. 생기가 없어지면 인간은 흙만 남습니다. 흙은 영어로 “dust” 입니다. 먼지입니다. 우리는 생기가 빠지면 먼지뭉치에 불과합니다. 옆에 있는 분 한번 보십시오. 먼지뭉치로 보이십니까? 저희 아버님이 4년 전 돌아가셨는데 화장하고 분골이 딱 한 뭉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지끼리 너무 아옹다옹 싸우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래 봤자 먼지만 날립니다. 또 먼지를 너무 치장하려고 애쓰고 고생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또 먼지 뭉치를 수백 억짜리 아파트에 재워 본들 뭐하겠습니다. 먼지철학만 가져도 욕심이 없어지고 행복이 옵니다.
그 다음에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환경이 행복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가 줄줄 새는 집에 앉아서 “나는 행복해!”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고 나오는데요. 하나님은 특별한 공간,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4. 에덴동산의 환경
여기 환경이 어떠했을까요? 9절을 보십시오. 우선 먹을 걱정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 이 난리를 하지 않습니다. 살려고 죽도록 일하지 않습니까? 에덴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과일나무가 즐비했습니다. 성도님은 어떤 과일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어릴 때는 시원한 배가 좋았는데 요즈음은 사과가 좋습니다. 사과는 다양한 맛이 있습니다. 에덴에 과일 생각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과일을 찾아봤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일본의 유바리멜론이라고 합니다. 경매로 2,800 만 원에도 팔렸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과일 찾아보니 무등산 수박입니다 19kg 한 통에 199,900원입니다. 빨리 겨울이 가고 수박 먹는 철이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이런 비싼 과일도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5. 인류가 불행하게 된 원인
인류 최대의 불행은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본문 9절과 16,17절은 이 죄와 죽음이 왜 왔는지 단서를 제공합니다. 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리고 이 나무는 어떻게 하라는 명령을 주셨죠? 16,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이거 따먹으면 천년만년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좀 전에 인간이 살려고 발버둥 친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린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죽음 앞에 장사 없고, 죽음이 주는 두려움, 불안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은 죽음이 없는 곳,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걸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하셨습니다 선과악은 우리말로 옳고 그름입니다. 하나님이 경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기어코 명령을 어기고 따먹었습니다. 먹으라는 생명나무 열매는 안 먹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서 인간은 에덴을 상실했습니다. 현재는 실낙원을 한 상태입니다. 이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온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죄인의 속성에는 청개구리 성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아이들이 저녁에 아무 말 안하면 알아서 일찍 어 오다가 “11시까지 꼭 들어와!” 이렇게 명령하면 꼭11시 넘겨서 들어옵니다.
본문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신학적 의미를 논하기에는 오늘 주제가 행복이기 때문에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세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인류가 불행하게 된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낙원을 상실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이 있습니다. 인류가 유토피아를 추구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복론 책도 한 트럭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또 개인과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입니다. 오늘 아침도 한바탕 하신 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전쟁 중입니다. 중동의 화약고가 터지려는 조짐도 보입니다. 북한에서도 막 하루가 멀다 하고 포를 쏘고 있습니다. 이 모슨 현상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입니다. 선과악의 기준이 각자에게 있기 때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안 먹고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가야 행복이 있습니다. 현재는 영적으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로 기인한 문제가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주 행복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그 소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6.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
선악과 문제에서 한가지 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16절을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아담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금령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위험한 선악과에 접근금지 장치를 했습니까? 30만 볼트 고압 전기 담장 했습니까? 위험표지판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아담부부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은 자유로울 때 행복한 존재입니다. 군대가 힘든 것은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적로도 그렇고 조직구성도 그렇습니다. 쥐를 예로 듭니다. 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쥐에게 치즈에 입을 댈 때마다 전기쇼크를 주어서 치즈를 못 먹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쥐의 머리에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치즈를 훔쳐 먹는 것은 나쁘다.”란 생각을 넣어서 자발적으로 못 먹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강제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할 때 만족하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30만 볼트 담장 치지 않으셨습니다. 행복의 조건에 자유 중요합니다.
7. 에덴에 흐른 4대강
10~14절은 에덴의 환경 중 4대강을 소개합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 이름의 뜻을 찾아봤습니다. 비손은 ‘풍성하다’고 ‘기혼’은 ‘터져 나가다’고 ‘힛데겔’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유브라데’는 ‘달콤하다’입니다. 4대강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었습니다. 베델리엄은 진주를 말하고 호마노는 붉은 줄무늬 보석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에덴동산의 강 뚝은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홍수가 나도 절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행복의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너무 터부시하는 것도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물질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물질로 인간을 빚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은 물질로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나 나는 세상이 싫어하면서 산속에서 혼자 사는 은둔주의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부자들은 모두 나쁜 사람으로 몰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공산주의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의식주의 욕구, 성욕, 다른 기본욕구들 다 하나님이 선하게 주신 것입니다. 다만이 이것이 선을 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욕, 정욕 이러면 곤란하지만 그 자체는 선합니다.
8. 아담에게 준 사명
그리고 또 하나님은 아담이 무위도식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고” 경작하고 지키는 일은 죽도록 일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서 관리하고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몸과 마음과 머리를 써서 일을 했습니다. 저같이 퇴직 때가 5년 정도 남은 분들은 빨리 퇴직하여 무위도식 하고픈 마음이 절로 듭니다. 일터가 야생정글입니다. 저희 직장도 명예퇴직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저의 손을 잡으면서 당부했습니다. “절대 나오지 마라! 쓸어도 쓸리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꼭 붙어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젖은 낙엽 전법 아직까지 쓰고 있습니다.
아담이 주로 무슨 일을 했을까요? 19-20절을 보십시오. 이름 짓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면 마직 막으로 문패를 답니다. 이 건물은 내 소유다는 선언입니다. 이름 짓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종지부를 아담에게 찍도록 위임하신 일입니다. 현재 이름이 있는 동물 종류가 150만 종입니다. 아직도 이름 없는 종이 1000~2000만종이라 합니다. 아담이 적당한 이름을 지으려면 동물의 속성과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이 창조적인 일을 할 때 행복이 있음을 유추합니다. 세상은 창조성을 인정해 주고 습니다. 창조교육, 창조경제란 말도 씁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줍니다. 어떤 현대 작가가 남성 변기를 놓고 “샘”이라고 작품 이름을 붙였답니다. 이게 무려 176만 달러, 한화로 22억 8천 8백만 원에 팔렸답니다. 이분 이름이 뒤상입니다. 창조적인 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치매에도 좋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창조하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동물과 자신은 아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원숭이 아무리 훈련해 봐도 젓가락 리듬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진화했다는 것은 아예 생각할 수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동물을 숭배하는 것은 더 말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동물이 모두 암수 짝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자기의 짝이 될 만한 것은 동물 중에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담의 짝을 만들어 이끌어 주십니다.
9. 가정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 돕는 배필의 의미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마지막으로 가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루어주시고 행복한 모습은 본문 18-25절까지 입니다. 18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계속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좋지 못한다는 표현이 본문에 나옵니다. 아담을 만들어 놓고 가만히 보니 별로 안 좋네 하면서 하와를 만들겠다고 즉흥적으로 생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에 좋지 못했다는 뜻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완성단계로 가는 중간과정이라는 뜻입니다. 그 완성단계가 바로 돕는 배필 하와를 만들어 이끌어가는 단계였습니다. 배필(配匹)에 한자 배를 보면 사람 키만 한 술독 앞에 한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술 잘 익었나 안 익었나를 살펴보는 형국에서 만들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는 옆에 나란히 서서 도와주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배필의 존재의 의미는 아담과 동등하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기능적으로 더 우월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여성은 재질이 흙과는 재질의 차이를 보이는 뼈로 만들었습니다. 색깔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최고의 도자기는 소의 뼛가루가 40% 섞어서 만든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본차이나들이 여성입니다.
하와를 만드는 과정은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합니다.(21절) 그리고 하나님은 유사 이래 최초로 외과 수술을 집도합니다. 옆구리를 가르고 갈빗대 하나를 꺼내 하와를 만드십니다. 혹시 형제님들 자기 갈빗대 한 개 어디 갔나 찾아보지 마십시오. 24개 다 있습니다. 아담만 없습니다.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메시지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봅니다. 아담의 잠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뼈의 개념은 생명과 동일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뼈에서 피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죽고 그 허리에서 생명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 상에서의 장면과 겹쳐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어머니를 사도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동생도 여려 명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이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사도 요한에 부탁하시는 것은 앞으로 육신의 가족이 아닌 영적인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생명의 역사로 인해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아담의 허리에서 하와를 만드신 사건 속에도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면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자기의 짝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만들어 이끌어 오시는 하와를 보고 첫 눈에 자기 짝 임을 알고 외치는 시가 23절입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살이요 내 뼈라는 표현은 바로 “하와가 나네! 나와 같네!”란 뜻입니다. 분리 되지 않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서로 비방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입니다. 이 문장은 아담이 반복법과 대구법을 사용한 최고의 감탄이요. 사랑고백입니다. 그러면 형제님들도 아담과 같은 마음으로 자매님들에게 고백 해보시기 바랍니다.
10. 가정의 행복 조건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룬다 합니다. 두 개의 개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한 몸이 되는 조건이 부모를 떠나라고 합니다. 이는 부모를 고려장 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두 사람이 연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정의 행복조건을 봅니다. 자식을 잘 못 떠나보내는 분들을 헬리콥터라에 비유합니다. 자식 주변을 계속 헬리콥터처럼 돌면서 참견합니다. 부모 품을 잘 못 떠나는 자식을 캥거루에 비유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이 불행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행복의 원천, 행복의 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지켜야 행복합니다. 한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30‐40대 기혼 여성들에게 ‘007같이 합법적인 살인 면허를 준다면 누구를 제일 먼저 쏠 것인가?’라고 물었답니다. 1위가 남편입니다. 또 신학대학에서 예비 목사님들 1000명에게 물었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 사모님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90%가 “아니라”고 나왔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석에 보니까 나라별로 결혼에 대한 속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먼저 러시아 속담입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라. 바다로 떠날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할 때에는 세 번기도 하라.”고 합니다. 다음은 에스토니아 속담입니다.“한 가마의 빵을 잘못 구우면 일주일을 망치고 추수의 수확이 나쁘면 일 년을 망치고 불행한 결혼을 하면 일생을 망친다.” 끝으로 한국 속담입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면 평생 원수, 아내를 잘못 만나도 평생 원수.” 였습니다. 어쨌든 원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정은 서로 예수님을 배우는 장이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부인의 사진을 수첩에 넣고 다니면서 힘들 때 마다 꺼내 봤답니다. “아니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렇게 합니까?” 물었답니다. “내가 이 부인의 잔소리를 20년을 들으면서 참고 살았는데 뭘 못 참겠는가!”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이렇게 했답니다.
결론적으로 인생의 행복의 키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엄마 품을 떠난 아이가 행복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품 안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지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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