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의 비유
본문 양과 염소는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입니다. 십자가 사건 3일 전입니다. 유언과 같은 비유 말씀이므로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열처녀의 비유
25장에 첫 번째 나오는 비유는 열 처녀에 비유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열 처녀 모두 등불을 준비합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열 처녀 모두 같이 졸았습니다. 어디에서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운명이 갈립니까? 아주 사소한 부분입니다.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 사러 갔다가 낭패를 당합니다.(마25:1-12)
달란트의 비유
이어지는 두 번째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아주 작은 일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돈을 땅에 파묻습니다. 감자 씨앗도 아니고 묻어버립니다. 묻을 힘으로 은행에 라도 가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안 해서 낭패를 당합니다. 다른 두 명의 달란트 받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어떤 칭찬을 받습니까?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 입니다.(마25:14-30)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계속 이 작은 자 정신이 이어집니다.
비유의 원어 표현은 “파라볼라” 입니다. “팔아 버려!”가 아닙니다. 영어로는 parable입니다. 한자로는 견줄 비(比) 깨우칠 유(喩)입니다. 수학에서 평행선을 Parable line이라고 합니다. KTX 기차선로를 상상해 보십시오. 선로는 두 개가 나란히 이어집니다. 비유는 이와같이 핵심진리 한 가지에 촛 점을 맞추어 사용합니다. 하나의 핵심 진리가 있으면 그 진리 전달을 위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비유의 단어 뜻
비유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단어 하나하나 짝 맞추기식의 풀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이 휘발유, 경유, 등유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비유풀이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비유는 대응하는 하나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화나 신화하고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 밀접한 것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당시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찾아 보기 어렵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장차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공중으로도 지상으로도 반드시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16절을 보면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일컫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도 또 달란트의 비유도 양과 염소 비유도 세상의 주인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일관되게 말합니다. 주인이 언젠가는 권리를 행사하러 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올 때는 혼자 안 오십니다. 천군 천사와 함께 옵니다.(눅2:13) 지구 밖에서 예상치 못한 때에 옵니다.(살전5:1-3) 침공하듯이 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올 때는 가장 무력하고 연약한 한 아기 속에 왔습니다. 가장 낮은 마구간에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 반전입니다. 눈부신 영광 가운데 옵니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았던 베드로는 넋이 나가서 같이 눌러 살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공개적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할 일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와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32절을 보십시오.“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예수님은 먼저 모든 민족을 모읍니다. 빌2:10절은 하늘과 땅, 땅 아래 있는 자들까지 예수님이 이름 앞에 무릎 굻게 한다고 말합니다.
민족의 종류는 1만6천이지만 분류는 두 종류로 분류합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대륙별, 소득분위별 없습니다. 선진국 후진국 출신 분류도 없습니다. 빈부귀천 구분하지 않습니다. 수도권 지방 출신 구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양 계열과 염소 계열 2가지로 나눕니다.
성경의 숫자 2는 나눔, 분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섞는 걸 싫어합니다. 넓은 문 아니고 좁은 문,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고 반석 위 지은 집, 거짓이 아니고 참, 어둠이 아니고 빛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른편에 의인 왼편에 악인을 둡니다. 오른손의 어원은 ‘옳다’에서 왔고 왼손은 ‘외다’란 옛 고어에서 왔습니다. ‘외다’의 뜻은 ‘그르다’입니다. 양을 의인에 염소를 악인에 비유합니다. 그야말로 비유입니다. 염소 자체가 나쁘다는 뜻 아닙니다. 염소는 잘못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양은 흰털을 가졌고 염소는 검은 털입니다. 성격적으로도 양은 온순하고 염소는 난폭하며 거칩니다. 염소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당시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썪어 키웠습니다. 3:1의 비율입니다. 양은 겁이 많아서 계곡을 지날 때 염소를 시범조교로 썼습니다. 양은 무식하게 풀을 뿌리까지 싹 슬어 먹는 습성이 있습니다. 큰 풀만 뜯는 염소를 썪어놓아야 목초지를 보호합니다. 양은 끼리끼리 붙어 있는 습성이 있어 여름에 쪄죽기 쉽습니다. 먹이를 먹을 때 한꺼번에 몰려 압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뿔 달린 염소를 사이에 두어 양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양은 겁이 많아 물먹다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갑니다. 자기를 잡아먹는 유령 동물로 착각합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반드시 분리해야 할 때는 잠잘 때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밤낮 일교차가 심합니다. 양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약합니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 재워야 합니다. 양은 잉꼬부부입니다. 수컷은 암컷을 끝까지 지키려는 속성이 강 합니다. 다른 수컷이 접근하면 죽자 살자 싸웁니다. 염소는 잉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양과 같이 재우면 밤새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분리합니다.
예수님은 오른편 양계열의 사람들에게 어떤 은혜를 줍니까? 복 받을 자들. 하늘 나라를 상속 받을 자들, 의인이요, 예수님의 형제요,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라 합니다.(마25:34,37,40,46) 눅19:17절에 보면 신자는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합니다.
왼편에 선 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저주받은 자들, 지옥 불 못에 집어넣을 자들, 영벌에 처할 자들이라 합니다.(마25:41,46) 예수님이 오면 염소계열의 사람들은 더 이상 구원 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이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양 계열로 신분 세탁 불가능합니다. 검은 색을 흰 색으로 염색도 불가능합니다. 양 가죽 뒤집어 쓰고 줄 바꿔 설 수도 없습니다.
영벌과 영생, 지옥과 천국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렇게 나눈 기준이 무엇입니까? 한나라를 구하고 못 구하고입니까? 구약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 노릇을 했고 안했고 입니까? 아니면 모세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였고 아니였고 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이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 남에게 주어도 상을 잃지 않음
35,36절을 보면 예수님이 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일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도움을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러자 37-39절에서 의인들은 도무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답변으로 예수님은 작은 자 말씀을 합니다. 40절을 참고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고” 본문에서 작은 자이긴 작은 자 인데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지극히는 원어 발음 ‘엘라키스토스“로 매우 작은, 극히 작은, 중요하지 않은, 사소 한이란 뜻입니다. 바로 이 작은 자에게 작은 사랑을 베풀었고 안 베풀었는지 여부가 이들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작은 자는 무시하기 쉬운데 이들은 달랐습니다.
왜 기억이 없다고 했을까요? 기억을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작고 사소했다는 뜻입니다. 또 매우 일상적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밥 먹듯이, 숨을 쉬듯이 나도 인식 못하게 작은 자들을 섬겼다는 뜻도 됩니다. 이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정신 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입니다.
염소계열이 심판 받는 이유
42,43절을 보십시오. 왼편에 있는 염소계열의 사람들이 심판 받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악을 행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만 하는 것을 안 한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을 형제에게 한 것을 기억하고 알아 주는 분입니다.(마10:42)
그러면 작은 자를 섬겨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작고, 소외된 자를 나의 형제로 표현합니다. Your brother 가 아니라 My brother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으로 인정해 줍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과 동일시합니다.(행26:14)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작은 자 섬김의 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상종도하지 않았던 세리와 죄인들과 한 상에 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개, 돼지 취급했던 이방 여인을 딸로 받아 주었습니다.
장발장 예화
빅토르 위고의 소설 장발장의 한 대사를 인용합니다. 원제가 레미제라블인데 프랑스어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용서와 구원과 사랑을 그린 소설입니다. 2012년에 뮤지컬 영화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00만을 기록했답니다. 이 영화에서 장발장이 죽고 나서 방을 걸어 나가면서 하는 마지막 노래의 자막이 이렇게 나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자만이 신을 볼 수 있다.”입니다. 영어 대사를 직역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To love another person is to see the face of God.)입니다. 오늘 양과 염소의 비유의 결론을 반영하는 대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 사소 한 것을 크게 보시는 하나님 안에서 여기 계신 성도님 모두가 큰 위로를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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