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글로벌 시대입니다. 지구촌이라고 합니다. 유발하라리 라는 작가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 역사학과 교수입니다. ''사피엔스(Sapiens)''책의 저자입니다. 책 내용 중 인류를 통합한 3가지 요소를 돈, 제국주의, 종교로 소개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첫째입니다. 머니는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심리 구조물입니다. 돈은 상호 신뢰 시스템 아래 작동 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교환 가능성 때문입니다. 돈이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돈은 세계 모든 사람이 신뢰합니다. 돈의 2가지 최고 가치는 교환과 신뢰 가치입니다. 돈을 준다면 세계 누구하고도 함께 일합니다. 요즈음은 돈의 90%가 컴퓨터 서버에만 있습니다. 돈 거래는 전자 데이터를 파일로 옮기는 방식으로 합니다. 전 세계가 단일 경제권임을 보면 돈을 인류통합의 첫 요소로 꼽은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두 번째 통합요소는 제국주의입니다. 제국주의는 힘센 나라가 약한 나라를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함을 말합니다. 부정적인 방법이지만 인류를 통합하는데 역할을 했다합니다. 오늘 본문 시대 배경도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요소는 종교입니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사례를 듭니다. 콘스탄틴은 믿음이 있었다기보다는 정치적 통합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무엇으로 통합해야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에베소서1장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통일, 연합, 통합 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면서 본문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1장9절을 참고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본문은 요한이 자신을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곳은 밧모섬 입니다.
동참하는 자는(fellow-partaker) 동반자, 동료란 뜻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자신을 소개하는 구절을 통해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환난에 동반자, 예수님의 나라에 동반자, 예수님의 인내에 동반자입니다.
1. 사도 요한
요한의 이름 뜻은 “예수님은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요한은 12사도 중 나이가 가장 어렸습니다. 90~100살까지 장수했습니다. 1세기 기독교의 산증인입니다. 보통 제자들은 스승님을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가슴에 부담없이 기댔습니다.(요13:25)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합니다.(요19:27) 요한은 “있는 집” 아들로 추정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만날 때 일꾼들을 남겨두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막1:12) 당시 일꾼 고용 능력이 있으면 부자였다 합니다. 요한은 10대에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80평생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면 말년에는 관광도 하고, 자서전도 쓰면서 우아하게 보내면 좋았을 텐데 지금 어디에 있죠? 돌섬에 유배 왔습니다. 동굴에 갇혀 살았고 광산에서 부역도 했다 합니다. 돌섬에서 고생하는 요한을 예수님은 만나 주고 눈물을 닦아 주고 장차 있을 일들을 계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인류와 세상의 마지막도 알려줍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은 요한처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가 읽고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쓴 서신입니다. 또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환난을 이기도록 돕는 서신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기질을 4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울질로 분류합니다. 모세,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질은 한 예민하는 예민 남 여를 말합니다.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고, 심사숙고 형이고, 남 앞에 나서기 보다는 뒤에서 따라가며 일하는 형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완벽주의자여서 걱정을 많이하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도 많다 합니다. 누가 상처 주는 말을 하면 마음 판에 꾹꾹 새깁니다. 평생 복수심을 불태우는 형입니다.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장작구이로 만들자고했습니다.(눅9:54) 예수님은 이런 그를 우레의 아들로 별명을 지어줍니다. 우울질은 기록을 잘 한답니다. 그래서 저술가가 많습니다. 노트 필기를 완벽하게 한답니다. 선생님이 하는 말씀은 토씨하나 빼지 않고 받아 적습니다.베드로는 다혈질이어서 잘 못 받아썼습니다. 성경도 베드로 전후서 두 개입니다. 내용도 짧습니다. 8개 장 밖에 안 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1,2,3서, 요한계시록까지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총 50개 장 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비롯하여 다양한 성격의 12사도를 연합시키셨고 동역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무시 할 수없는 분들이 뒤에서 묵묵히 참고 따라 주는 우울질 형-입니다.
2.형제의 의미
요한이 자신을 너희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는 원어로는 “아델포스”입니다. 원어 몇 개 알아두면 있어 보입니다. 포스작열하고 외우십시오. 신약성경에서만 아델포스 343회 나옵니다. 국어사전에 형제는 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들이라고하니 형제란 말에 자매님도 포함합니다. 우린 예수님의 보배 피가 흐르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며 동고동락했던 12사도의 권위는 대단합니다. 수천 명씩 회개도 시켰습니다.(행2:4, 행4:4) 병자도 낫게 합니다. 사도들의 그림자만에만 닿아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림자 밟기가 아니고 그림자 닿기 경쟁이 치열합니다. 사도들이 지나가면 길에 요를 깔고 드러누웠습니다. 어떤 분들은 침대까지 들고 나와 깔았습니다.(행5:15)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죄 때문에 사도들 앞에서 즉사하기도 합니다.(행5:5,10) 사도 요한은 당시 사도의 권위를 내세워 “나는 사도다. 나는 제자다, 나는 장로다.”하고 소개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형제라고만 소개합니다. 겸손한 표현입니다. 90살의 대 사도가 같은 동급의 형제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요한이 젊었을 때는 안 그랬습니다. 사마리아에 불을 내려달라하기도 했고.(눅9:54) 12사도가 아닌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자 금하기도 합니다.(눅9:49) 엄마 치맛바람을 이용해 예수님께 인사 청탁도 했었습니다.(마20:20) 과거 요한은 마음이 편협하고 자기중심적 입니다 정치적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의정 우의정에 앉을 욕심도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겸손해졌습니다.
형제란 무엇입니까? 같은 피가 흐르고, 서로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넘치는 관계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기쁨과 슬픔을 언제나 같이 하는 사이입니다. 입술로는 형제라고 불러도 마음에 진정한 형제애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교회 형제자매는 잠시 보고 끝날 사이가 아닙니다. 영원히 같이 갑니다. 새 하늘 새 땅까지 갑니다. 서로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서로 스타일이 다르더라도 용납하고 연합해야 합니다. 우울질이 다혈질을 이해하고, 점액질이 담즙질을 챙겨야 합니다.
3. 예수 안에
다음 알아볼 말씀은 예수의 입니다. 영어로는 “in jeus”이고 “예수님 안에”로 번역합니다. “예수님 안에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란 말씀이 바울 서신에만 164회 나옵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죽으신 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장소도 한국에서 약 8천 64키로 떨어진 예루살렘입니다. 어떻게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 우리에게까지 예수님 안에 있게 되었을까요? 시공을 초월하여 사역하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죽은 영을 깨우고 하나님을 알아 볼 수있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해줍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증표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원어로 밥티조라고 합니다. 밥티조의 뜻은 무언가에 푹 담가서 영구적으로 변하는 것, 본질이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흰 천을 물감에 담근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오이 피클의 예도 들었습니다. 오이를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식초 용액에 담그면 본질이 달라진 피클이 된다합니다. 피클이 되는 담금을 밥티조라 합니다.
세례의 의미를 구약을 인용해 설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0장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건넌 사건에 비유합니다. 모세를 통해 시퍼런 홍해가 갈라졌고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듯 건넜습니다. 본문에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고 란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따라 걸어 나오는 백성들과 모세를 동일 시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속한 자로 간주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하여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 속하여 부활했고, 예수님께 속하여 율법을 지킨 자가 되었습니다.(롬6:3) 예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본질이 바뀐 새사람입니다.(고후5:17)
4.환난
네 번째 단어는 환난입니다.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 탄탄대로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환란이 있습니다. ‘환난’이라는 원어 뜻은 ‘들립시스(thlipsis)’라고 합니다. 고대의 탈곡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보리타작기와 유사합니다. 탈곡기는 원통에 철사로 톱니바퀴를 설치합니다. 그 위에 보리단을 얹고 돌리면 낱알이 떨어지는 원리입니다. 탈곡기에 털리는 보리 입장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위협할 때 “보리타작 한번 해 볼 테야!” 합니다. 당시 성도가 받는 환난은 그만큼 고통스웠다는 뜻입니다.
요한 당시 황제는 도미티안입니다. 철권 통치의 대명사입니다. 자칭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헌금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지 말고 자기한테 보내라합니다. 거역하면 사자 밥이 되게 합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측근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원로원은 죽은 그에게 “기록말살형”이라는 형벌을 내렸다합니다. 얼마나 살아 생전에 악했으면 그의 기록을 완전히 지워 없애는 형을 내립니다. 사도 요한을 바위섬으로 유배 보낸 사람도 도미티안입니다.
환난은 우리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합니다.(삼하7:14) 성도의 환란은 쇠를 두드리고 담금질하여 단단하게 만들 듯이 우리 신앙을 순수하게 만듭니다.(욥23:10) 환란이 있는 이유는 사단의 방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거듭나서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방해 공작이 시작됩니다.(딤정3:7,마13:39) 하나님이 환난을 허용도 하지만 또 환난을 극복할 힘도 줍니다.(고전10:13)
환난이 없어서 문제였던 백성들 예로 듭니다. 사사기 18장7,10, 27,28절에 나오는 라이스 백성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외부와 교류(시돈지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살다가 망한 백성으로 나옵니다. 단 지파에게 칼에 죽고 불태워 죽고 초토화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3절은 말합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평안 할 때가 최대의 환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미래를 결코 낙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딤후3장1절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른다고 합니다. 평안할 때 더욱 깨어있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5.나라와 인내
사도 요한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나라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성경에서 나라란 말씀이 나오면 주권과 관련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우리 성도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마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가시적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 나라가 없다면 우리가 어렵게 신앙생활 할 필요 없습니다. 최대한 즐겁게 잘 먹고 잘다가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장차 유업으로 받습니다. (갈4:7)
요한은 인내 하라고 합니다. 인내는 우리가 갖추어야할 최고의 신앙 인격입니다. 사랑의 속성도 오래 참음입니다.(고전13:4) 본문 10절부터 17절까지는 우리가 오래 참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으라고 합니다. 본문에 묘사한 예수님은 음성은 나팔 소리 같고, 맑은 물소리 같고,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고, 눈은 불꽃같고, 발은 빛난 주석 같고, 입에서는 날선 검이 나오는 것 같고, 얼굴은 태양이 힘 있게 비치는 것 같고, 다 같고로 소개합니다. 같다는 말을 잘못 오해하여 예수님을 그릴 때 눈에 레이저가 나오게 그리면 안됩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요한은 발에 엎드러졌습니다. 숨도 못 쉬고 죽은 자 같았습니다. 그 전에는 가슴에 기댔던 요한입니다. 현재의 예수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눈부시게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요한의 마음에 고생 고생하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만 있으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타난 예수님은 심판의 주, 영광의 예수님입니다.(계19:16) 이 예수님이 새롭게 요한의 마음에 자리 잡을 때 요한은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음으로 이 주님을 바라보고 어떤 고난도 넉넉하게 이기는 강릉교회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요한계시록1장9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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