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예화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파란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노래를 학생들 앞에서 부르라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하고 불렀는데 선생님과 친구들이 첫 소절에 박장대소합니다. 알고 보니 빛 발음을 잘못했습니다. 머리 빗는 빗으로 발음했습니다. 국문법에서 빛을 읽을 때 한 음절일 때는 모두 디귿으로 읽고 뒤에 조사가 올 때는 받침의 음가를 살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빛, 머리빗은 "빋"이고 뒤에 조사가 붙으면 우리들 마음에 ‘비치’ 있다면 해야 하고 남에게 빚이 있다는 ‘비지’이고 당신 앞에 머리빗이 있다는 ‘비시’로 발음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창세기1장1-4입니다.
빛의 창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첫날 첫 번째로 창조한 것이 빛입니다. 빛 이전 땅의 상태는 혼돈(without form), 공허(void), 흑암(darknesㅅs)이 가득합니다. 이 세계는 카오스(Chaos)입니다. 하나님이 빛(Light)을 만들자 흑암이 물러가고 질서가 잡힙니다. 카오스의 반대는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성경은 요한1서1장5절 뿐 아니라 야고보서1“17, 시편27:1, 딤전6:16에도 하나님을 빛으로 소개합니다.
빛의 중요성
빛이 얼마나 중요하고 오묘하며 빛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개하기 위해 빛의 물리이론을 소개합니다. 빛을 이해하려면 아인슈타인을 언급해야합니다. 상대적이라는 의미를 설명하려고 그가 인용한 심리적 시간의 상대성입니다. 영희는 뜨거운 난로 위에 2분 동안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습니다. 철수는 아름다운 여인과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눕니다. 누구의 시간이 더 빨리 갔다고 느낄 까요? 난로 위에 영희의 2분은 2시간처럼 느끼고 철수의 2시간은 2분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어떤 상대냐에 따라 시간이 빨리가고 느리게 간 것처럼 느낍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7살 고등학교 시절부터 빛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합니다. 9년 동안 26살까지 몰입합니다. 그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슈타인 당시 제일 빠른 이동수단은 기차입니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앞문과 뒷문에 거울을 달고 기차 중간에서 빛을 양쪽으로 쏘는 상상을 합니다. 기차 안에 사람은 빛이 동시에 거울에 반사되었다가 되돌아오지만 기차 밖에서 보는 사람은 앞문과 뒷문 거울까지 갔다 오는 시간이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기차안의 사람이나 기차 밖의 사람이나 빛의 속도는 동일하다는 결론입니다. 빛은 빨리 달리는 기차 안에서 앞쪽으로 쏘던 뒤쪽으로 쏘던 항상 속도는 1초에 30만 키로 미터,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 속도입니다. 이모순을 설명하려면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시간과 길이, 공간이 바뀌어야 합니다. 빛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놓았을 때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시간이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고 길이가 축소되거나 늘어나고 질량이 커지거나 줄어든다는 이론이 이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입니다.
쌍둥이 역리
그래서 쌍둥이 중 한 명이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나이 차이가 난다는 아이러니가 나왔습니다. 외부에서 날이오는 뮤온이라는 입자가 있는데 빛의 속도 가까이 움직이고 수명은 100분의 2초며 606미터를 갑니다. 이론적으로 606미터밖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뮤온은 땅위에서 검출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대기는 80km가 넘습니다. 그런데 이 뮤온을 지구상에서 검출합니다. 뮤온의 수명이 길어져 606미터를 날아갈 것이 60km를 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맞다는 증거입니다.
일반상대성 이론
일반상대성 이론입니다. 사과가 지구로 떨어지는 것은 두물체간에 인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력은 왜 생기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태양과 지구사이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의문을 명쾌하게 설명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입니다. 일반상대성 원리에서 꼭 등장하는 원리가 등가성원리입니다.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우리의 몸은 땅으로 꺼질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은 엘리베이터가 가속하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가속도로 생기는 관성력과 중력은 같다가 등가성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등가원리로 중력의 원인을 가속도로 설명을 했고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도는 것과 같은 원리를 수학의 기하학을 도입하여 주변의 시간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질량이 크면 클수록 휜정도가 크고 주변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는 이론이 일반상대성이론입니다. 지구가 태양으로 빨려들어 가지 않고 잘 매달려 있는 이유도 휘어진 공간을 따라 돌기 때문으로 설명합니다.
1919년에 ‘스탠리 에딩턴’이라는 천문학자가 달이 태양을 가리는 개기일식 때 태양 뒤쪽에서 오는 별들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태양 뒤 쪽의 별들이 조금씩 이동해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태양주변의 휘어진 공간을 따라 지구에 별빛이 굽어 들어온다는 증거입니다. 이 일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맞음을 증명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든 빛이 기준입니다. 빛의 속도가 항상 동일하기 때문에 첫째 움직이는 계에서 시간은 느리게 갑니다. 두 번째 움직이는 계에서는 운동방향으로 길이가 수축합니다. 세 번째 질량이 있는 물질에 에너지를 계속가해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올리면 올릴수록 그 에너지는 질량으로 바뀌면서 질량이 계속 커지게 됩니다.-질량과 에너지 등가원리E=mc2- 여기까지가 특수상대성이론이고 빛의 속도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기준으로 가속도의 원리까지 접목시켜 질량이 있는 주변의 시공간은 휘어있다는 것이 일반 상대성이론입니다. 성경에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3:8)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의하면 충분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집
고린도후서5:1절에 보면 우리에게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상에 두고 하늘로 가시는 목적이 우리의 거처를 예비해 놓으시러 가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미래에 거처할 집 또는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거처가 혹시 우리가 현재 사는 아파트 보다 약간 큰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으시겠죠?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스케일도 우주적이실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별 하나씩은 떼어주시거나 더 통 크게 은하계 하나씩 수제비 떼듯 뚝뚝 떼어 주실 지도 모릅니다. 은하계 한 개에는 약5,000천개의 태양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염려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과학기술로 우리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화성까지 가는데도 6개월이 걸립니다. 그런데 빛의 속도로도 수백만 광년씩 걸리는 별과별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를 어떻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가듭니다. 안 든다고요? 저는 듭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가능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빛의 속도 이상으로 움직일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지구에서 안드로메다까지는 빛이 200만년 동안 가는 거리에 있습니다. 빛의 속도로 가면 시간이 안가고 길이가 줄어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안드로메다까지 돌다리 건너듯이 건너 갈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
본문 창세기1장3절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 첫날 빛을 만들어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합니다. 이 빛으로 온 세상이 가득차서 발광체가 필요 없고 시간도 멈춰버린 영원한 세계가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계시록21장 23-25절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계시록 21장은 영원한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합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에는 발광체인 해와 달이 별도로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어린 양인 예수님이 등불입니다. 만국이 이 빛 가운데 다닙니다.
에덴동산도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26-27절은 하나님은 사람을 설계 할 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었습니다. 형상과 모양은 성품을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대로 정의롭고,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괴로운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먹거리까지 다 챙겨줍니다. 피를 흘려 먹어야하는 육식은 없었고 채식위주입니다.
창세기2장7절은 하나님이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자 산 존재(Living soul)가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생기가 없는 인간은 흙덩입니다.
창세기2:22절에 하나님이 결혼도 시켜 주었습니다. 하와는 뼈로 만들었습니다. 뼈는 5개의 세포와 섬유질, 단백질, 인, 나트륨, 마그네슘, 탄소, 불소로 이루어진 아주 우수한 재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평생직장도 잡아 주셨습니다. 작명소 CEO입니다 창세기 2장19절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이끌어다 주었습니다. 아담은 동물의 특성을 살려 이름을 지었습니다. 지구상에는 100만종이 넘는 동물이 삽니다. 아담은 지혜를 발휘하여 이름을 지으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마음껏 도왔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전 인류를 최대의 불행으로 빠트릴 수 있는 검은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는 빠지지 않도록 강력한 경고 표지판도 세워주셨습니다. 이 표지판은 마음에만 세워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경고 표지판이 하나 섰는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입니다.(창2:17) 어떤 분은 선악과 주변에 수십만 볼트가 흐르는 경고 울타리를 왜 치지 않았느냐? 고 따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선악과 주변에 무엇을 하셨다면 인격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경고 표지판을 무시했죠?.(창3:6)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했습니다.(창3:5)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
창세기 3장 7절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얘기치 않은 결과가 왔습니다. 자기들이 벌거벗을 줄 알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가렸습니다.(창3:7) 아담과 하와는 그동안도 계속 쭈~욱 벗고 있었습니다. 환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마음이 바뀌어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무화가 잎으로 가리는 존재가 된 것 입니다. 무화가 잎은 가리기에 별로 좋지 않은 재료입니다. 금방 말라버립니다.
창세기3장8절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습니다. 이런 아담을 하나님은 찾아갑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낯에서 낯은 원어로 “파님”입니다. 파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도 있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뜻도됩니다. 이 단어는 빛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씁니다. 민수기6:25-2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기를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빛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흑암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절대 의존적인 존재였던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자기들이 창조주가 된 양 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복을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도 하나님 없이 만들어온 역사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과연 성공한 역사입니까? 사람들은 수많은 문명을 건설했고, 훌륭한 제도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로마서1장21-32절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한 죄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욕, 우상숭배,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악독, 비방, 미움, 능욕, 교만,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21절에서는 마음이 어두워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인류의 역사
어두워진 마음에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빛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1장9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 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46절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빛을 얻었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데전5:5, 엡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황이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금새 어두워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잘 못 가르쳐 주었던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속성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으로 진단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내가 내 주도적으로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고 통제하려고하고 나 중심적으로 모든 상황이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 때문으로 오늘 말씀에 비추어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절대성에 대하여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기준이시고 절대적이고 불변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우리는 어두움에 쉽게 떨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의 권세가 두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체와 영혼까지도 지옥에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금이 갔기 때문입니다.(마10:28)
마가복음 11장22절에 보면 무화가 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시자 단 하루 밤 사이에 뿌리부터 마르는 기적을 확인하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 자체가 이해불가 상황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 바로 눈앞에 계시고 손을 내밀면 잡히는 곳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발 좀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하나님을 믿으라
끝으로 요한복음 20장19절을 찾아보고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본문에서 안식 후 첫날은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첫날과 영적으로 보면 같은 날입니다. 본문에서 첫날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어두움의 세력인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첫날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모든 흑암과 어두움을 물리치신 날과 같습니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방안에 모여서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두움 가운데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벽을 뚫고 방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부활의 빛으로 그 방은 환하게 밝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마음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지금 상황은 평강을 주실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제자들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은 엠마오를 향하여 줄행랑을 쳤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최대23km 떨어져 있는 촌 동네라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멀리까지 도망을 갔을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이용했을까요? 그래도 제자들 중 좀 나야야할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 목을 매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 타임은 책망을 하셔야할 타임입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버리고 엠마오까지 도망갔는가?” 하는 제목으로 반성문 A4지 10장씩 쓰게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본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두움 속에 있던지 주님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빛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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