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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요한복음17:1-5, 20-26)

by 명주(明珠) 2024. 7. 15.

복음서에 예수님이 기도한 사실은 밤이 새도록(눅6:12) 새벽미명(막1:35) 따로 한적한 곳에 서(눅5:15)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기록이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내용을 알려줍니다.

요한복음 17장1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기도는데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냐 감았냐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겠죠? 눈을 감는 것은 하나님께만 마음을 집중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응시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눅22:41) 하늘을 응시한 것은 나중에 얻을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위함이고(벧전1:11) 땅을 응시한 것은 땅에서 받을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땅에서 받을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에 때는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지만 자신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몇 번에 걸쳐 말씀합니다.(요7:6, 요2:4) 요7:8절은 아직 때가 차지 못했다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에도 어머니 마리아에게 때가 이르지 못했다고 하면서 청을 거절합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 촌각을 다툴 때도 예수님은 즉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죽은 후에 갑니다.(요11:6) 사람들이 원하는 때는 늘 시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는 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구약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면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고 하나님이 명령한대로 동물들을 암수 쌍쌍이 방주 안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문을 닫습니다.(창7:9 7:16) 문을 닫자마자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 질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홍수는 7일 후에 시작합니다.(창7:10) 이 7일 168시간이 노아에게는 120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성령의 열매중 하나가 오래 참음입니다.(갈5:22)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인격 중 중요한 요소입니다.(벧후1:6, 야고보1:4, 히10:36)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1-5절까지 8번이나 반복하는 단어가 아버지입니다. 17장 전체에는 무려 38번이나 반복합니다. 아버지 호칭에 담긴 어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스럽게 부르는 “아빠!”뉘앙스 입니다. 저희 아들은 저를 부를 때 아빠 앞에 성을 붙여서 “임아빠!”라고 부릅니다. 아빠란 호칭은하나님과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수시로 하나님 아빠를 찾는 성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계속 1절b절을 보면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합니다. 이 말씀은 4절과5절을 연결하는 말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4절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일”은 십자가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영화롭게 하다는 영어로 “Glorify”입니다. 다른 번역은 “영광스럽게 하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만민 구원은 예수님이 이땅에 온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쉬운 길, 꽃길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흑암 속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마4:16) 예수님은 이 길을 영광의 길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 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본문22절과 24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영광을 안겨 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져야만 우리도 그와 연합하여 영광을 누립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이 누렸던 모든 영광이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이 영광이 얼마나 큰지 사도 바울은 롬8:18절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영광을 바라본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은 톱으로 켜는 고통도, 용광로에 들어가는 고통도 견뎠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이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가난한 신자입니다. 예수님 믿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형통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면 곤란합니다. 축구선수가 편안하게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만 보고 있기만 한다면 불행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부상의 위험도 없고 땀 흘리지도 않아도 되고 시원한 음료수도 마음껏 마시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모든 축구선수는 그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단 1분 1초라도 나가서 뛰려고 서로 경쟁을 합니다. 축구선수는 필드에 나가서 뛰는 것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는 벤치 전담 맨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17장2,3절 영생을 주심



본문2,3절 참고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과 권세에 대하여 주목해보겠습니다. 먼저는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에 대하여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에서는 영생을 멸망과 대조하여 말씀합니다. 요3:16절은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설명이지 영생이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은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요3:16절을 모르면 간첩입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복음송도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신앙 출발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출발만 한 것에 머물러 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분이 오늘날 성장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문제점을 우리는 모두 “요한복음 학교의 3학년 16반”을 평생 다니고 있는 형국이라고 진단합니다. 신앙출발한 지 1년 후에도 “저는 3학년16반의 김 아무개입니다. 출발한지 10년 후에도 요한복음학교 3학년 16반 이 아무개 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스릴러 영화 같이 한을 품고 죽은 원혼이 계속 3학년16반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3학년16반은 예수님을 믿어 세례받고 죽었다 깨어나면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습합니다. 이 신앙을 “불신 지옥! 예수 천당!”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이 구호 하나로 평생을 삽니다.  3학년16반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 영생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존속한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영생에는 완전하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꽃에 비유하면 꽃이 만개해서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함과 같습니다. 작품으로 말하면 완벽한 작품이어서 더 이상 덧붙이거나 다듬거나 손볼 필요가 없습니다.

롬6:22-23절“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은 거룩함에 이르는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영생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제시합니다.

또 본문 은 영생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합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만 아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연예인을 알듯이 연예인의 키, 몸무게, 혈액형, 조각 같은 외모만을 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성격, 속성까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같이 살아가며 아는 것입니다. 하나가됨을 말합니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둘이 한 몸이되었다는 표현처럼 완전한 연합입니다.

하나 되는 것은 본문 17:21절에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 통속으로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대 인격, 존재와 존재, 속성이 서로 한통속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본문 23절과 25,26절에서 “안다”는 말씀이 6번 반복합니다. 신앙은 얼마나 아느냐의 싸움입니다.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2. 권세



2b절을 보면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받은 것이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권세는 권위, 세력, 힘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권위를 싫어합니다. 권위하면 독재자, 폭군의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택시운전사란 영화가 천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0년입니다. 당시 젊은 세대는 위의 권세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특징이 반항이었습니다.청바지와 통기타 문화가 저항 정신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권세가 정당하지 못한 권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세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영화포스터



예수님의 권세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지만 군림하지 않아 누구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많이 데려 오자 제자들이 통제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말리지 말라고 합니다.(눅18:15-16, 막10:16, 막9:36) 예수님의 권세는 겸손함에서 나오는 권세였습니다.
 
권위의 반대말을 자유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권위에 대한 나쁜 경험을 많습니다. 학교, 가정, 국가 또는 군대에서 권위에 억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권위하면 무조건 배척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교회 내에서 말씀의 권위에 순종해야하는 우리들에게 잘못 작용하면 신앙 성장에 방해 요소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지속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야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늘 제자리 인 것 같아 절망합니다. 신앙이 거꾸로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떳떳한 얼굴보다는 이런 통회하는 심정을 받습니다.(시51:17) 우리 모두가 만민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권세 아래서 날로 신앙 인격이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와 같이 하나 되어 만민을 구원하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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