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막히지 않고 잘 통한다.”입니다. 그래서 서로 오해가 없음입니다. 불통은 “회선이나 연락선이 끊겨서 통하지 않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입니다.
소통은 오늘날 화두입니다. 시민소통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도 있습니다. 불통은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불통은 갈등을 낳습니다. 요즈음은 개인주의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와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고 합니다. 불통의 속어는 콩가루입니다.^^ 불통인 집안을 콩가루 집안으로 부릅니다. 콩가루의 반대말은 찰떡이겠죠?
오늘 말씀에서는 선지자 3명이 나옵니다. 엘리야, 말라기, 세례요한입니다. 이들은 콩가루와같이 하나님과 불통인 이스라엘을 소통시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영어로 Peacemaker입니다.
1. 말라기
말라기 이름 뜻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인적사항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부모가 누구인지 문헌에 없습니다. 말라기서를 통해서만 짐작합니다.
2011년에 기차사고가 있었습니다. 철길을 걷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열차와 부딪쳐 숨졌습니다. 학생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철길로 귀가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왜 건강한 학생이 기차를 미리 피하지 못했을까요? 이어폰을 꽂고 있었답니다. 열차 소리, 기관사가 보내는 경고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학생, 청년들 이어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의 문제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말라기 때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지 100년이 지난 때입니다. 막 돌아왔을 때는 신앙이 좋았습니다. 그러다 100년이 지나자 불통의 신앙으로 바뀝니다. 낡은 가죽부대 같이 변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하고 말씀하면 이들은 “주께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반발합니다.(말1:2) “너희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하고 책망하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하고 반발합니다.(말1:6)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고 하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하고 반발합니다.(말2:16)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말1:6) 재물도 아무거나 드렸습니다. 저는 동물, 병든 동물을 드렸습니다.
제사는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평강을 줍니다. 말2:5절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합니다.(말2:4,5)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는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죄를 범합니다. 이방여인과 결혼합니다.(말2:11) 그리고 아내를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아내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뿌리며 호소합니다.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제단을 가리 울 정도입니다. (말2:13) 말라기 시대는 가정의 기초가 무집니다. 하나님의 경고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귀를 막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장까지는 이런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은“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마지막 날입니다. 이날이 오면 기회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역사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실 때가 있습니다. 끝낼 때가 있다는 사관이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기독교 사관이라고 합니다.
2.엘리야
엘리야 시대는 말라기 시대에서 500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왕은 아합이고 부인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이방여인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엣바알입니다. 바알 우상의 이름을 땄습니다.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 우상에 빠졌습니다. 바알은 태양신입니다. 이들은 자녀를 제물로 바알에게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왜 우상을 섬깁니까?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는 모르는 영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미노제라 합니다. 이 두려움은 자동차가 내게 와서 부딪칠 것 같은 무서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압도적인 권위, 절대타자로서 느끼는 무서움입니다. 이것이 우상들을 섬기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가 생깁니다. 우상은 근본적인 두려움을 없애주지못합니다. 우상은 생명과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18장25-29절을 보면 바알 우상숭배 지도자 450명이 자기들이 쌓아 놓은 제물에 불을 붙여 달라고 비는 종교의식이 나옵니다.
이들은 제단 주위에 앉아 처음에는 조용히 바알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알 바알 바아알 바알!!” 그런데 아무응답이 없자 일어나 제단주위를 뛰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안 되자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자해합니다. 미친 듯이 떠들었다고 나옵니다. 이 의식에서 생명과 평안과 기쁨은 찾지못합니다. 고통만 느껴집니다. 우상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생명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시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19:10절을 보면 엘리야를 한 마디로 소개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한 자 입니다. “열심이 특심하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불이 붙는다.”입니다.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는 소주 광고가 있었습니다. 소주가 가슴에 불을 댕긴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의 가슴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러자 갈멜산에서 바알 우상 지도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왕상 18:37절을 보면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야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대결 당시 엘리야는 태울 제물을 나무가 아닌 12개의 돌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물을 흥건히 뿌리게 합니다. 그 물이 흘러 도랑이 생겼습니다. 자연 발화 가능성을 0으로 만들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이 불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불이 뜨거웠는지 12개의 돌까지 다 녹았습니다. 주위에 흙도 다 태웠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백성들의 마음속에 우상들도 같이 다 탔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불은 무엇으로 당기고 있습니까? 소주는 아니겠죠? 세상에 있는 그 무엇들로 당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불을 당 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불을 당 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세례요한
본문 5절의 엘리야는 신약의 세례요한입니다.(마17:10-13) 세례요한의 시대는 가장 어두운 시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없는 고통은 매우 컸습니다.
하나님과 불통하면 사람들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합니다. 당시 헤롯대왕은 2살 이하의 남자아이를 다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파리 목숨 취급합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들을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합니다. 형식적이고 율법적이고 독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세례요한은 회개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자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사방의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메시지는 힘이 있었습니다.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례요한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세례요한의 정신은 2가지입니다. 첫째광야정신 두 번째 소리정신입니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광야로 나갔습니다. 약대털옷 한 벌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광야정신은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살지 않고자하는 청빈정신을 반영합니다. 마치 강을 거슬러 가는 연어와 같은 삶입니다.
두 번째는 소리정신입니다. 이사야는 세례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신학 사상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합니다. 말씀의 통로 역할만하고 자기는 사라졌습니다. 강단에 서는 자세도 이와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강단은 처세술, 세상철학, 연애의 기술, 장수 비결 등을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전달되어야하는 자리입니다. 저도 세례요한의 소리정신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기억하고 돌이키라!
본문은 우리에게 2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기억하라 입니다. 4절은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기억하라"는 말은 (Remember, Recall, call to mind) 상기하다. 마음에 생각나게 하다란 뜻입니다. 현재의 나의 감정과 사상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호렙’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장소입니다.
본문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씀으로 돌아가라 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입니다. 성경에 모든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에서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영생이 있고 구원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성경에 대하여 열린 귀를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는 관계의 회복, 소통에 대한 예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그는 5절의 엘리야이고, 엘리야는 세례요한이고 세례요한은 뒤에 오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의 멀어진 마음을 돌이킵니까?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멀어진 근본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예수님이 하여야할 일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막힌 담을 허무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2:14는“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소통이 원활할 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6절 하반부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저주로 그 땅을 친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돌이키는 순서에 우리는 교훈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입니까? 자녀가 먼저입니까? 아버지가 먼저입니다.
로마서5장에 보면 아직 이라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5:6)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롬5:8)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일 때(롬5:10)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먼저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 표현에 자녀들이 반응하여 돌아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미국의 소아과의사 스폭 박사가 쓴 육아서적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절대적인 자기편이 있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고 교회가 소통하고 결합할 수 있는 팁 하나를 얻는다면 부모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교회의 먼저 된 자들이 마음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그 사람 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내편 한 사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한 분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불통에서 소통으로 가는 지름길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야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불화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야 사람과의 관계도 개선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최종 종착지는 언제나 말씀입니다. 성경 앞에 모두 바로 서야 하나 됩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 지금보다 수 십 배는 더 찰진 찰떡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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