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마리아는 못 말리는 여인입니다. 단벌 신사 예수님의 옷을 버려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발을 머릿결로 닦으면 또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향유는 인도 수입 산으로 귀족들만 쓸정도로 고가입니다. 본문 여인은 항유를 예수님에게 붓습니다. 지켜 본 제자들은 분개합니다.(마26:8) 또 책망합니다.(막14:5)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보셨죠. 낭비로 보지 않고, 여인의 마음 속 진심을 봅니다. 마리아의 믿음의 행동은 향기가 퍼지듯 만세에 전하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항유도유사건을 기록한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26장(6~13절)과 막14장(3~9절)에 도 나옵니다. 4복음서 중 3개는 관점과 기록연대(AD50~60)가 유사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기록년대는 한 참 후인 AD90년대입니다. 저자 요한의 나이 84살입니다. 이때는 다른 11 사도들 대부분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증거 할 상황입니다. 이 필요에 의해 기록한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대부분의 내용은 생략합니다. 물론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시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도 반복하여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시 기록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추가로 증거 할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마태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이 다른 부분, 요한복음에 추가한 내용만 살펴봅니다.
1.유월절 엿새 전(요12:1a)
본문1절을 보십시오. 첫째로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구체적인 날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사실성을 더합니다.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하면 모호합니다. 또 유월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암시합니다. 향유도유 사건을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준비와 연관 지었습니다.
2.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12:1b)
두 번째로 다른 점은 베다니를 소개할 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입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로를 부활시킨 동네를 부각시켰습니다.
이 동네는 베다니(Bethany)입니다. 예루살렘 외곽 산기슭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시몬이 나병환자였다는 것은 베다니 가까이 당시 사회와 격리되어 살던 환자 촌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주변에 인식이 좋지않은 시설이 들어서면 집값 떨어진다고 데모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예배에 참여하면서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갈릴리 시골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왔습니다. (요11:55) 144km입니다. 쉬지 않고 걸으면 35시간 걸립니다. 낮에만 걸어서 4일 입니다. 긴 여정이었으면 하루라도 여독을 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다니에 머물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 갔다가도 저녁이면 나왔습니다.(막11:19)
베다니에서도 특히 나사로의 집에 자주 머물렀습니다. 이 가정은 베다니에서도 돌봄이 필요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소년가장 노릇을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특별히 사랑합니다.(요11:3,5) 나사로는 책임은 막중한데 비하여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도 찾아가서 썩어 냄새까지났던 그를 마치 잠자는 자를 깨우듯 불러 살려 냈습니다. 기둥 같은 오빠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을 씻겨 주었습니다.(요11:43)
이 일은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고자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너무많아 잡아 죽이지 않으면 로마가 자기 나라를 쳐들어와 땅과 민족을 모두 빼앗아갈 것이라는 결론까지 내립니다.(요11:48)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죽었던 한 영혼을 살린 특별한 장소입니다.
어떤 미국 선교사가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베다니로 지었습니다. 지금은 베다니가 예쁜 딸의 이름으로 까지 쓰일 만큼 아름다운 지명입니다. 유명한 지명입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있는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 받은 곳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3.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요12:2)
2절을 보십시오. 세 번째로 언급한 부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였다.” 입니다. 잔치에는 나사로와
시몬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요12:9)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분위기는 어떠해야 합니까? 잔치 집과 같아야 합니다. 마22:2~4“천국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합니다. 시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하는 아주 유명한 시죠? 5절에서“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償을 차려주시고”할 때 상이란 잔치상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19:7절에 보면“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하여 나옵니다. 잔치 집에서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민폐입니다. 교회에서는 엄숙해야 거룩함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절대 웃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이 아니라 거북한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마음은 지금 잔치집입니까? 초상집입니까? 늘 잔치 집이길 기도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잔치집이 될 수 있습니다.(행13:52)
잔치를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저는 율법주의 입니다.(갈3:12,13) 율법주의는 내 마음에 기준이 많은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느라 마음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잔치집이 아니라 재판정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카리스라는 헬라어로 기뻐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 받은 자들로서 항상 기뻐하는 자 이길 기도합니다. 잔치집이길 기도합니다.(살전5:16)
4. 마르다는 일을 하고 (요12:2)
네 번째로 다른 점은 '마르다는 일을 했다.' 입니다. 이 표현은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과 눅10:38-42절입니다. 마르다는 얼마나 일을 많이 했으면 일을 했다고 특별히 표현 했을까요?
눅10:38-42절은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와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만 경청하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우리는 본문을 말씀을 듣는 것만이 선하다는 결론을 내기 쉽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마르다는 억울합니다.
교회 일만이 최고이고 세상 일은 천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한다고 365일 새벽기도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회사에 가서는 매일 졸거나 창고 같은데 숨어서 자거나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의자가 빠졌습니다. 졸다가 짤렸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좋은 간증 사례로 삼았습니다. 과연 좋은 간증일까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교회 일한다고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아예 방치하는 것도 단적인 사례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전율법인 미쉬나는 특별한 손님 접대법이 있습니다. 손님은 존경하는 스승이나 선지자를 말합니다. 첫째는 주인이 특별 손님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 주어야한다. 두 번째로 특별 손님의 말에 청종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접대 율법을 따라 손님 접대를 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동생을 명하여 자기를 도와 주도록 부탁한 것은 주인의 권리를 예수님께 양도하였기 때문입니다.(눅10:40절) 안 그랬으면 마르다는 언니로서 동생에게 직접 부탁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을 좀 더 좋은 음식으로 좀 더 푸짐하게 대접하려는 의욕이 앞섰습니다.
교회에서 한 달에 한번 가정에서 하는 모임이 식사에서 다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정책과는 다르게 다과의 범위를 넘어 선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상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마르다와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을 많은 음식들로 섬길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 음식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격려해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눅10:41,42절) 그리고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은 마르다와 우열을 정한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뜻으로 봅니다.(눅10:42절)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을 많은 음식들로 섬길 필요 없다고 합니다. 한 가지 음식만으로도 족하다고 합니다. 본문은 격려해 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눅10:41,42절) 그리고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은 마르다와 우열을 정한 것이 아니고 마리아가 처한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뜻입니다.(눅10:42절)
일의 가치는 신성합니다. 요한복음 5:17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소매를 걷고 일하는 여성입니다 형제든 자매든 마르다 같은 분이 없으면 복음역사의 바퀴는 굴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겠습니다.
5. 마리아는, 한 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3절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붓는 장면입니다. 본문은 마리아란 구체적인 이름을 밝혔습니다. 부은 향유의 무게를 한근으로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했는데 본문에는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고 합니다. 머리에도 발에도 부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휘발성이 강해 돌로 만든 병에 담아 입구를 봉해 둡니다. 옥합 ajlavbastron(알라바스트론)은 석고로 만든 주둥이가 긴 흰색 단지입니다. 주둥이를 깨트려야만 향수를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식사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밥상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상상을 하기쉽습니다. 그러나 당시 식사법은 달랐습니다. 로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한 쪽 면은 비워 두어 종들이 음식을 나를 수 있게 합니다. ㄷ자형 식탁은 침대 역할을 합니다. 왼팔은 베게모양에 걸치고 비스듬히 누워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이런 자세를 생각하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합니다.(요13:25) 식사 시간은 3시간입니다. 저희 직장에도 이런 식탁문화를 도입하면 어떨까요? 3시간 점심 먹고 2시간 있다가 퇴근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 향유는 가장 소중합니다. 여인에게 머리는 자존심입니다. 사람의 지체 중 가장 냉대 받는 곳이 발 아니겠습니까?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릿결로 씻겼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 본문은 아름다운 믿음의 향기까지 더해서 냄새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3천만 원의 헌금을 드리면 흔들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30억으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했을까요? Give and Take 식의 신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향유를 돈으로 바꾸어 드렸을 것입니다.단순히 자신들의 가정에 대한 호의가 고마워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랬으면 머릿결로 발까지 씻겨드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신앙과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300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노동자 300명의 하루를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가난한자 300명이 중요한가? 예수님이 중요한가?를 감히 따질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죽어 썩어 냄새나는 오빠를 살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롬4: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으로 부르는 분 이라고 소개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창조주로 봤습니다. 기름을 붓는 예식은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구원자임을 행동으로 고백했습니다.
6.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요12:4,6)
본문4~6절로 넘어갑니다. 끝으로 다른 복음서에는 여인의 행동을 비난한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가롯 유다였다고 밝힙니다. 6절에서는 속마음까지 증거합니다. 어떻게 60여년이 지났는데 마리아 속마음까지 기억하여 기록했을까요? 성경은 사람이 쓴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썼습니다.(딤후3:16)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요1:1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속 죽음을 죽었습니다.(사53장) 부활 승천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다시 옵니다. 처음왔을 때는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 발 한번 씻겨드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시골의 한 여인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정도로 소박했습니다.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올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를 뚫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지구를 침공하듯이 옵니다.(살전4:16) 그 때가 되면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고민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때 후회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이 지금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드리는 자되길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같이 믿음의 향기를 풍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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