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쓰나미
저희 집에 감기 쓰나미가 왔습니다. 아들은 지난주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안 좋다고 예배를 빠지겠다 합니다. 순간 꾀병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집에 남아서 혼자 게임하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강한 어조로 “너 예배드리다가 쓰러지면 아빠가 바로 응급실에 싣고 갈테니까 무조건 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눈물을 보이면서도 주일학교와 주일예배는 참석했습니다. 예배 때 옆에 앉았는데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설교 시간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아내에게 말해 먼저 집에 갔습니다. 오후 4시쯤 집에 들어갔는데 아들은 열이나고 머리가 아파서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병원에 가보니 A형 독감으로 학교도 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머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고혈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고혈압으로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꾀병이라고 오해 했던 일로 매우 미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잘 해 주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복음의 일꾼이입니다. 그가 이렇게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와 유사한 미안한 마음,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대적 배경
오늘 본문은 바울이 유대의 왕 아그립바와 총독 베스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시대는 AD55 년입니다. 바울은 30세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35년 동안 복음을 전합니다. 약2만km를 이동했고 약56개 지역을 방문합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 갔다가 로마병사들에게 구금됩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감옥에 있습니다. 후에 새로운 총독이 오는데 이름은 베스도입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오자마자 로마황제에게 재판을 요청합니다.(행25:12)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 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의 상고 문을 써서 황제에게 보내야하는데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 때 마침 아그립바 왕이 인사하러 옵니다. (행25:13) 아그립바는 총독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온 것입니다. 눈도장은 아주 중요한 도장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놔야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이 위협받지 않습니다. 아그립바는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헤롯대왕의 손자의 아들입니다.(막6:16) 좋은 왕이 아닙니다. 눈도장 찍으러 외숙모인 버니게와 같이 왔는데요. 두 사람은 불륜관계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이니까 바울의 죄목에 대하여 잘 알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오늘 본문 26장은 총독 베스도가 자신의 임명권자인 로마 황제에게 사도바울의 상소문을 써서 보낼 내용을 얻기 위해 청문회를 여는 장면입니다.(행25:26)
청문회
청문회 상황을 한번 상상해 봅니다. 행25:23절을 왕이 크게 위엄을 갖춥니다. 천부장들이 자리를 합니다. 천부장은 병사 천명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시중의 높은 사람들도 접견 장소에 들어 왔습니다. 요즈음으로 하면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시의원, 지방 유지들이 다 모입니다. 접견장소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치형의 구조물들이 즐비합니다. 왕과 총독이 앉은 자리는 위압감을 줬습니다.
왕과 총독과 사도 바울의 복장도 대조적입니다. 마치 화려한 왕궁에 초라한 행색의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손목에는 쇠사슬을 찼습니다. 총독이 상소문을 어떻게 써주느냐에 따라 앞으로 자신이 로마에 가서 살지 죽을지가 결정되는 자리입니다. 본문의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는 슈퍼 갑입니다.
바울은 현재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행24:27)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1절을 보면 바울이 손을 들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보통 오른 손을 들었고짧은 손가락 두 개는 접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중하고 엄숙하게 말할 때 취하는 행동이랍니다. 바울의 행동은 여유가 있고 당당합니다.
본문 26:29절은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바울은 묶인 것만 빼고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으로부터 “제발 너는 나와 같이 살지 말아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부모가 된 우리는 자녀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애들아 제발 너는 나같이 살지 말아라.”똑같이 합니다. 세상에서는 자신과 같이 살라고 권면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총독과 왕에게 합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아와서 이런 말을 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베스도 총독의 말입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You are out of your mind.)” 사도 바울의 삶은 한 마디로 미친 삶입니다 누구에게? 예수님과 복음입니다.
미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예 한 가지만 들고 넘어가겠습니다. 미쳤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초점을 잃고 늘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분들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결혼하신 형제님들은 미친 마음 한 번 씩 가져 보셨죠? “맨스 플래인(mansplain)”란 신조어가 있습니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남성들은 항상 여성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려고만 드는 자세를 말합니다. 7세 남자아이들도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자신의 능력이상을 할 수 있다고 뽐낸다고 합니다. 청년 남성들이 연애할 때 상대방에게 “이 오빠가 다 설명해 줄께!”하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이에 속합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다들 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맨스플래너가 되어 보셨죠? 미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별도 따옵니다.
고전4장9-13절에나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어도 비천하게 되어도, 예수님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정처가 없어도 괜찮았다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다가 예수님께 미치게 되었습니까?(행26:13) 처음에 그는 예수님께 멀쩡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핍박합니다. 예수 이단을 잡아서 죽이고자 눈이 빨개서 찾아다녔습니다. 본문 26:11절에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회당에서 채찍질 하게하고 강제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시킵니다.
엔도슈사쿠 침묵
일본의 작가 엔도슈사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핍박 가운데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갈등과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그리는 소설입니다. 여기에 보면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에 대하여 박해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일본은 펄펄 끓는 유황 온천이 많은데 그 온천 바로 앞에 세우고 뜨거운 물을 몇 방울씩 몸에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성화를 발로 밟고 지나가게 하거나 침을 뱉으며 매춘부라고 욕을 하라고 합니다. 못하면 온 동네를 개처럼 끌고 다니다가 십자가에 매달아서 밀물썰물이 있는 바닷가에 세우고 진이 빠져 죽게도 만듭니다. 밀물이 들어올 때 목까지만 차는 곳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또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몸을 돗자리에 말아서 작은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밀어 넣기도 합니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양쪽 귀에 피가 떨어지도록 상처를 내고 죽을 때까지 거꾸로 둡니다.
사도바울의 구원간증
행8:3절을 보면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다합니다. 잔멸이라는 단어는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서 황폐화 시킨다는 표현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교회 초토화를 위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해서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행9:2) 바울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명목 하에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26:14절을 참고합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 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바울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면 할수록 마음의 고통은 컸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고통을 가시채를 뒷발질하며 받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말합니다. 소가 밭을 갈 때 앞으로 안가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이 이 채찍으로 때립니다. 소가 아프다고 말을 더 안 듣고 뒷발질까지 하면 더 세게 때립니다. 반항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커집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바울의 삶이 이런 고통스런 삶입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가문에서 최고의 랍비에게서 공부합니다. 당시 최고 엘리트 바리새인입니다(행26:5) 이런 그가 도대체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몰두하였을까요?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고(행26:6) 또한 열 두 지파가 간절히 바랐던 소망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망입니다 메사야가 오면 이 땅에 다윗과 같은 왕국을 세워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로마의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정치적인 왕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 한 민족만의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 방법도 이들기대와 반대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왔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을 믿지못하고 부활도 거짓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유대민족의 최대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핍박하면 할수록 고통만 더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예수님은 어떻게 만나 줍니까?
시에스타
행26:13절을 보십시오. 중동지방의 정오는 너무 더워서 다 쉬는 시간입니다. 시에스타(Siesta)’라고 합니다. 태양이 가장 따갑게 내리 비취는 시간 바울은 이 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력한 빛으로 바울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리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 고합니다. 예수님은 신자와 자신을 동일 시 합니다.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바울은 실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3일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 멀었던 바울 눈을 뜨게 해주고 동시에 영적인 눈도 뜨게합니다. 예수님은 원수와 같았던 바울을 용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웁니다.(행26:16) 바울은 이 예수님의 은혜가 늘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고전15:9,10)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무엇보다 자신이 옛날에 핍박했던 성도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특히 죄 없이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테반 집사님의 해같이 빛나는 얼굴도 잊히지 않았습니다.(행7:55) 이때마다 바울은 자기가 핍박했던 성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을 롬1:14절에서는 빚 진자의 마음이라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바울은 세상 만민에게 빚졌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끝으로 성도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믿음을 가진 자신과 같이 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과 복음에 대하여 너무 맑은 정신은 아니십니까? 우리가 은사에 따라서 “네가 교회에 미쳤구나! 전도에 미쳤구나! 성경에 미쳤구나! 말씀에 미쳤구나! 섬기는데 미쳤구나! 가르치는데 미쳤구나!” 하는 평가를 받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사도행전26:1-7
“[1] 〔바울이 변명하다〔행 9:1-19; 22:6-16〕〕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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