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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설교참고자료모음

신앙의 마라톤, '무거운 것'을 벗어던져라!(히브리서12:1-13절)

by 명주(明珠) 2024. 7. 15.

 

오늘 말씀본문은 히브리서12:1-13절입니다. 12장을 열어주는 단어는 “이러므로”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11장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요소 중 하나가 “전후 문맥을 살펴라!”입니다. 원래 성경은 장절이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장절은 16세기경에 읽힘 성을 위해서 넣었다고 합니다.(장수1,189장 총 절수 31,173절) 장절이 없었다면 성경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다.

문맥에 따른 성경해석



전후 문맥을 무시한 사례를 한가 지 들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절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많이 봅니까? 빵집이나 식당에 많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에게 충고했던 세 친구 중 빌닷이란 사람의 말입니다.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보면 빌닷이 극심한 고난에 처한 욥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은 못해줄 망정 오히려 권선징악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틀로 충고합니다. 그는 욥의 자녀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네가 이런 고통을 격는다.’는 비난조의 말을 하는 과정에서 방금 읽은 예언의 말을 합니다. 그는 판단하는 말로 욥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빌닷의 말을 어디에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말이 좋다고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걸어놓고 나중에 창대해 졌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문 열 때도 미약하고 중간에는 조금 더 미약하다가 나중에는 IMF로 아예 가게 문을 닫게 되면 말씀과 다르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합니다.

화평



엡2: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평입니다. 영적으로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어놓고 남북통일을 이야기 한다거나 유럽통합을 말한다거나 중동 평화를 논하거나, 또는 국내의 영호남의 화합에 관하여 열변을 토한다면 곤란합니다. 그 화평은 이 화평과는 다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져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을 캐치하지 못하면 사람의 계명(마15:9)을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심하면 1.5단 2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벧후1:20)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눅10:41-42절을 읽어봅니다. 본문에서“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현대인의 성경은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번역합니다. 신앙생활은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말씀을 듣기입니다. 말씀의 흐름에 젖어드는 일입니다. 이 한 가지를 빼앗기면 신앙생활이 늘 분주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습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왜 나만 이렇게 바쁜가? 별로 충성하지 않는 것 같은 다른 성도들을 속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히브리서 10장 앞부분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마음을 씻고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도덕률(道德律)이라 합니다. 그래서 세계어디를 가든지 종교입니다. 최소한만 가리고 사는 저 아프리카나 아마존 부족들도 씻김 받는 의식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마음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거역한 원죄 때문입니다.(롬3:10)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씻는 방법을 율법을 통해 알려주었습니다.(히9:19) 황소와 염소의 피를 내서 뿌리고 고기는 제단에서 태우는 제사제도입니다.(히10:4) 이 제도는 어린양으로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죄를 사할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입니다.(요1:36)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 에 피흘려 죽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주홍 같은 죄를 눈같이 희게 씻어 주었습니다.(사1:18) 아프리카 가나에서 오신 영어교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가나는 적도 부근이니까 평생 눈을 눈으로 직접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말이 어렵습니다. 눈과 눈을 한자로 하면 “설(雪)을 안(眼)으로 본다.” 입니다. 가나 출신 영어 선생님은 눈같이 희게 된다는 의미를 평생 한 번도 실감나게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눈을 생전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목격하고 주홍같은 붉은 죄가 눈같이 희게되었다는 의미를 실감나게 느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단번에 영원히 죄가 씻겨 졌습니다.(히10:10)

신앙인의 삶의 자세



그런데 이렇게 씻긴 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0장23절부터 성도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권면합니다. 그 삶이 결코 녹녹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롱과 핍박까지 받았습니다. 오늘날 남아공에 종교법이 만들어 지게 되면 허가받지 않은 자가 복음을 전하다 발각되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복음전도, 기도, 예배장소 등 모든 것이 통제된답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물리적으로 핍박하는 곳이 많습니다. 북한,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수단, 시리아, 이란 방글라데시, 라오스, 부탄, 베트남 등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약50개 국가가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살던 당시에도 핍박이 많았습니다. 핍박받을 때 믿는 자들은 뒤로 물러가기 쉬웠습니다. (히10:39)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파선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렇게 살아간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합니다.

구름 같은 증인들



히브리서 11장에는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나옵니다. 그 중 실명이 거론된 사람이 16명입니다. 14명은 남성이고 2명이 여인입니다. 그 두 명은 누구입니까? 사라와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을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지만 빼고는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수요 집회, 금요기도회, 차량봉사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눈치우기 봉사도 한번 안합니다. 아브라함은 몇 번의 단을 쌓기는 했지만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창12:7 창13:18) 헌금도 일생 딱 한번 드렸습니다. 그것도 자기 것도 아니고 전쟁에서 빼앗은 탈취 물입니다(창14:20) 사라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여서 이집트 후궁에 취업하기도 합니다. (창12:11-15) 그는 사라가 세상을 떠나자 후처를 얻었습니다.(창25: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러면 도대체 아브라함은 무엇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그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면 토 한마디 달지 않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창12:1)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우르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수메르 문명 이 발생한 그 수메르의 수도입니다. 이곳은 상업의 중심지로서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상선(商船)들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수공업자로 아마도 세련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자동차도 세련된 세단을 끌었을 지도 모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았던 사람들은 서울을 벗어나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강원도는 와이파이도 잘 안 터지는 줄 압니다. 더 심한 사람은 다들 감자만 먹고 비탈에서 살고 심지어 전기도 안들어 오는 줄 압니다. 사람들은 도시의 편리한 문화 때문에 그곳을 벗어나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브라함도 우르라는 도시를 떠나야합니다. 그리고 직업도 바꾸어야 합니다. 수공업자에서 소똥, 양똥 치우는 목축업을 해야 합니다. 목축업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접고 과감히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정처 없는 낭만 여행이 아니라 목숨 걸고 떠난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절정은 아들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믿음의 조상들도 하나같이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순종하여 키도 없고 노도 없는 이상한 배를 바닷가도 아닌 산속에서 만들었습니다. 그 배는 방주입니다. 120년 동안이나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과학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유월절 명령에 순종합니다. 순종이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는 아담 때부터 불순종의 피(거역의 피:히12:3)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씁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하면서 히브리서12장으로 넘어갑니다. 1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에서 신앙생활을 경주자에 비유합니다.(히12:1,고전9:24-27) 특히 마라톤 경주와 많이 비교합니다. 마라톤 경주는 장기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사인 볼트같이 숨 안 쉬고 9.69초를 뛰는 경기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인격은 하루아침에 갑자가 변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일생을 거쳐 서서히 변합됩니다. 번개불식 인격변화 없습니다. 구원받고 하룻밤 자고 났는데 사람이 달라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된 성도들은 어린 성도들을 기다려 줘야합니다. 왜 빨리 봉사하지 않을까? 도끼눈을 뜨고 보면 안 됩니다.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들



1절을 다시 보면 경주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으라고 합니다. 당시 마라톤 선수들은 다 벗고 달렸다고 합니다. 물론 필요한 곳은 가렸겠죠? 요즈음 마라톤 경주자들도 최대한 가벼운 신발을 신습니다. 하이힐을 신지는 않습니다. 마라토너 이봉주선수가 아시안 게임 때 신고 뛰었던 운동화를 일명 봉달이화라고 합니다. 한쪽이 145그램입니다. 보통 운동화는 340g입니다. 우리 신발의 반의 무게도 안 됩니다. 신발무게 10g이 가벼워지면 1분을 단축합니다. 봉달이화 순수한 제작비만 9,600만원 들었습니다. 연구비까지 합치면 2억 원이 들었습니다. 왜 이런 예화를 드리는 지 아시겠죠. 신앙 경주에서 무거운 것은 과감히 버려야합니다.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세상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꼽습니다.(마13:22) 우리를 얽어매는 죄도 있습니다. 죄들은 욕심, 분노, 탐욕, 이기심, 정욕입니다. 이런 죄들은 아무리 가벼운 무게 단1g이라도 있으면 달리는 데 치명적입니다. 본문에서는 죄에 대하여는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권면합니다.(히12:4) 죄들은 빨리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신앙 경주에 지치지 않고 잘 달립니다. (요1서1:9)

무거운 짐



신앙경주에서 위로는 우리를 격려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절 전반 절에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증인들은 단순히 관람석에 앉아서 박수만 치는 소극적인 자들이 아닙니다. 당시의 운동경기는 주피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4년마다 한 번씩 올림피아에서 경기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오전에 경기를 승리한 선수들이 오후에 있을 시상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때 이들은 관람석에서 군중들과 함께 동료 선수들을 응원했습니다. 이들은 같은 동료이기 때문에 일반 관중하고는 다릅니다. 선수들이 넘어지면 같이 아파하고 승리하면 같이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격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도 바로 이런 자세로 우리를 지켜보며 격려합니다. 우리를 격려하는 분들은 믿음의 조상뿐 아니라 우리 가까이도 많습니다. 우리 교회 지체들입니다. 관중석에 응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수들은 초인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최고의 응원가는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응원하고 계십니다. 2절을 참고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해줍니다. 바라보다는 것은 예수님 사진을 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을 생각하라입니다.(히12:3)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합니다. 개의치 않았다는 영어 뜻은 무시하다. 경멸하다. 거절하다(NIV:scorning KJV:despising)란 뜻입니다. 부끄럽게 함은 자존심을 건드린 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단은 언제든지 우리의 자존심을 구기는 방식으로 태클을 겁니다. 이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인내할길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이 복수혈전을 치를 필요는 없습니다.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 줍니다.(히10:30)

하나님의 징계


5-11절까지는 징계에 대하여 길게 말씀합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 자녀로 대하는 증표입니다. 부모님이 우리가 뭘 하든 그냥 내버려 두면 친자가 아닙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들도 징계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지 않겠습니까? 징계를 통해서 우리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연날리기로 비유합니다. 연줄을 붙잡고 만 있으면 연은 날지 못합니다. 또 줄이 끊어지면 하늘로 사라지거나 땅으로 쳐 박힙니다. 줄을 적당히 당겼다 놓았다 반복해야 연은 자유롭게 납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놓치 않는다는 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2,13절을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우리의 신앙 경주에서 손발에 힘이 풀려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 완주하라합니다. 또한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격려하여 함께 골인지점을 향해 달려가라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격려하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각자의 신앙경주를 완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히브리서12:1-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1)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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