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진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9장1-10절까지입니다. 10절에서 인자는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왔습니다. 잃어버린 자는 특정 계층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입니다.
보통 예수님을 4대성인으로 압니다. 가끔 슈퍼스타라 J라합니다. 4대성인은 예수님(기독교), 공자(유교), 석가(불교), 마호멧(이슬람교)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도를 닦으러오지 않았습니다. 수행하러도 아닙니다. 잃은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찾아 구원해 주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잃어진 자로 여깁니다. 예수님 시각으로 세상 사람은 가출한 자들입니다. 이런 사회가 잘 돌아갑니까? 잃어진 세상에 유토피아 건설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 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살만합니다. 그러나 행복지수는 떨어졌습니다. 집 나온 자들은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찾는 자의 심정 어떠하죠? 예수님은 대충 둘러보다 없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눅15:4절 예수님은 끝까지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는 존재감이 없습니다. 100%중 단 1%입니다. 한 마리 찾다가 99마리를 몽땅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를 쫓는 것은 경제원칙에 어긋납니다. 비효율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해냅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우리와 다릅니다. 예수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생명은 돈으로 계산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 한 생명을 온 우주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귀하기 때문에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포기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으러 왔는데 나는 잃어진 자로 여기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내가 왜 잃어진 자야? 나는 현재 내 삶에 만족하고 잘 먹고 잘살고 있다.’라고 생각 하기쉽습니다.
삭개오의 약력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도 만족할 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름도 좋습니다. 삭개오! 영어로 Zacchaeus! 입니다. 우리말 어감은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뜻은 ‘맑다. 순결하다. 의롭다.’입니다. 예비 부부 있으면 아들 낳으면 Zacchaeus!라고 지어 보기바랍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삭개오는 세리장 입니다 어떤 기관의 장까지 올라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회사에는 평가제도가 있습니다. 그전에는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 다면평가 합니다. 위, 아래, 좌, 우 다 평가합니다. 상관이 평하고, 같은 동료가 평가하고, 후배들도 선배를 평가합니다. 삭개오가 세리장까지 갈 정도면 다방면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삭개오는 가난했습니까? 부자입니다.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세계 부자 순위1위는 빌게이츠라고 합니다. 100조 5천억 원이 자산입니다. 2위는 ‘아만시오 오르테가’라고 합니다. 스페인 사람으로 패션업계의 지존이라고 합니다. 82조7,249억 원입니다. 3위는 워런 버핏입니다. 75조687억 원입니다. 버핏은 자기와 점심 먹는 것을 상품화해서 경매에 부치고 수입금을 이웃돕기에 쓴다고 합니다. 얼마 전 중국 사람이 당첨되었는데요. 점심 식사초대권을 26억 원에 낙찰 받았다고 합니다. 26억짜리 점심 드셔보셨습니까? 이런 그도 얼마 전 신문에 보니까 아침에는 부인에게 3,400원을 타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 다고 합니다. 그것도 기분이 안 좋으면 2,900원짜리를 먹고, 기분이 좋은 날은 부인에게 500원을 더 타내서 3,900원짜리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된다면 저는 매일 아침 굶을 용의있습니다. 한국의 1위는 삼성입니다. 11조8,531억 원이고 세계 112위입니다. 삭개오가 당시 이정도의 부자는 아니었겠죠? 어쨌든 삭개오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결혼을 했을까요? 9절을 보면 가정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사는 동네가 또 살기 좋았습니다. 살기 좋다고 하면 세 가지 나오죠? 물, 땅, 교통입니다. 여리고는 물 많고, 땅이 비옥하고, 교통이 좋아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여리고는 ‘작은 낙원’이라까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성읍입니다
지금도 삭개오의 집이 남아 있습니다. 삭개오의 무덤도 있었고 심지어 유골도 나옵니다. 집은 야자나무로 둘러싸인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집도 튼튼하고 멋있습니다. 삭개오는 사회적인 지위 있겠다. 집 있겠다, 단란한 가정 있겠다, 또 경제적으로 부유하겠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잃어진 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찾지 않아도 될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고민이 무엇이었을까요?
키가 작은 삭개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세상은 공평합니다. 삭개오가 키까지 컸다면 너무한 것이죠? 과연 키 클려고 예수님을 찾았을까요? 나폴레옹 키가 작았습니다. 축구영웅 펠레도 작았습니다. 중국의 모택동도 작았습니다. 우리나라 강감찬 장군님도 작았습니다. 작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삭개오의 작은 키는 군중들 틈에 계신 예수님을 보는데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삭개오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작으면 올라가면 됩니다. 본문은 돌무화과 나무입니다.
삭개오의 고민은 ‘잃어버렸다.’ 라는 말씀에서 찾아야합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소외되었다.”입니다. 삭개오는 무엇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까?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삭개오는 뭇 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리는 죄인입니다.
주일날 모친님들을 교회차로 모시고 다니다 보면 과거 얘기를 얻어 듣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재미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일제시대 얘기를 듣다가 그만 내려야할 집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래서 일본말로 빠꾸를 해야 했습니다. 지난주 이야기의 주제는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일본사람 나빠요.”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한국 사람들도 나빴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죄 없는 가족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인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나쁜짓한 한국 사람을 상상하면 삭개오의 상태가 이해됩니다.
우리나라 세금은 크게 국세와 지방세로 나눕니다. 국세는 내국세와 관세로 나눕니다. 내국세에는 10가지 종류의 세금이 있습니다. 지방세에는 15가지 종류입니다. 예를 들면 담배소비세, 레저세, 도축세, 주행세, 공동시설세 같이 생소한 것도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금 명목을 많이 만들어 거둬들이는 사람입니다. 계산방법 복잡하게 해서 많이 거둬들였을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았다고 합니다. 당시 세관들은 군인을 동원해 세금 강제 집행도 합니다. 영장 없이 길가는 사람들 짐도 샅샅이 뒤지기도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관들을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에게 사람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창기, 도둑, 강도와 같은 급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회당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법정에 증인으로도 채택되지 못합니다. 세리의 돈은 헌금으로도 받지 않을 정도입니다. 삭개오는 유대 사회에서는 철저히 소외된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잃어진 자입니다.
삭개오의 고민
삭개오 입장에서 보면 시대에 편승하여 열심히 살아온 죄 밖에는 없습니다. 그의 인생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삭개오는 세리고시 패스를 위하여 엉덩이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153 모나미 볼펜 한 자루씩 써버리며 단어 외웠습니다. 시원스쿨 영어학원, 야나두영어학원(야 !나두영어해 줄임말), 해커스토익 학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삭개오는 단 한 번에 세리고시를 패스했습니다. 세관에 출근 할 때도 지각한번 안합니다.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합니다. 야근은 밥 먹듯이 합니다. 야근하느라 심지어는 첫째 아이가 태어난 줄도 모르고 일했습니다. 그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나라가 빼앗긴 마당에 변변한 취업자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취업절벽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세리 장까지 올라갔습니다. 돈도 벌만큼 벌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친구들에게 왕따 당합니다. 세리장까지 올라가는데 볼펜 한 자루 사주지도 않은 이웃들까지 침 뱉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야근 하느라 아이들과 한번 제대로 놀아주지 못합니다. 여행도 못했습니다. 세리장이 되어서 이제 시간이 좀 남아서 고등학생이 된 딸과 대화를 하려니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어색하니까 서당 훈장님 같이 일장 훈계만 잔뜩 늘어놓습니다. “화장하지마라. 스마트 폰하지 마라. 단어 열심히 외워라. 수학은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우는데 좋다. 성경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주일날만 들고 가지 말고 제발 쫌 읽어라.”하며 온통 요구하는 말만합니다. 아이들도 삭개오 아빠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사랑하는 아이들로부터도 소외되었습니다. 부인에게는 임신 때 잘 못해준 것을 평생 껌씹듯이 씹히며 살았습니다. 부인은 남편을 정말 남의 편같이 대합니다. 심지어 웬수라고도 까지 합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가족들부터 어느새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밤이면 쐬주 한 병을 까서 마셔야만 잠을 자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할 지경입니다. 본문에는 이런 내용 전혀 없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한 저의 추측입니다. 어쨌든 삭개오는 예수님을 찾아야만할 정도로 영혼의 고통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삭개오의 고통의 원인
삭개오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삭개오의 고통의 원인을 본문 3절과 8절에서 엿봅니다. 3절을 보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어떻게 바뀝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릅니다. 주는 영어로 Lord는 곧 하나님! 구세주!를 지칭합니다.
삭개오의 불행의 원인은 주인을 떠난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데 있습니다. 로마서1장21-32절을 참고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어둡고 어리석게 되어 사람, 새, 짐승, 기어다니는 동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마음을 터치하지 않으니 죄악들 속에 뒹굴며 살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이 마음에 없자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했습니까? 돈입니다. 돈만 된다면 불법도 정당화 하였습니다. 돈만 된다면 가난한 동족들의 고통도 외면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돈만 벌면 행복이 넝쿨째 굴러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돈만을 추구하며 산 인생에 남은 것은 죄인이라는 낙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의 실상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롭고 불안합니다. 죄책에 시달리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방법과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삭개오를 또 하나 괴롭힌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 그 자체와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별개입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우리 곁에 없으며 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이 말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육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여태 쌓아온 소유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의 자아, 나의 주체를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혼자 잘살아갈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기를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산업사회를 거치며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자본주의는 사익추구 극대화가 가능한 사회입니다. 이것이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불행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입니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경쟁으로 기가죽고, 파괴적입니다. 대안이없습니까? 성경은 잃어진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이 대안이라합니다.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새 출발 할합니다.
삭개오를 먼저 알아 본 예수님
예수님은 삭개오를 어떻게 찾아냈습니까? 본문은 무시 받던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림같이 펼쳐집니다. 삭개오와 만난 시점은 예수님이 이제 모든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 한 후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둔 시점입니다. 삭개오는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 빼고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마지막 구원열차를 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한 사람을 만나려고 여리고로 들어갔습니다. 1절에서 들어가셨다는 원어 표현은 길을 헤치며 갔다는 의미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벼랑 끝에서 떨고 있는 양을 향하여 풀숲을 헤치고 찾아 가는 목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삭개오는 사실 가난 한 자도 아니요, 병든 자도 아니었고, 눈이 먼 자도 아니었고, 귀신 들린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키를 크게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달려오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한번 보기만을 원합니다. 이런 그를 찾아가신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이 풍성한 분입니다.
5절은 예수님은 나뭇잎 속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 삭개오를 기어코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 비참하게 된 삭개오의 인생 전체를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쳐다보며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삭개오야!’ 여태 그 누구도 삭개오를 사랑의 눈으로 보아 준적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인격적으로 불러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매국노, 로마의 앞잡이라고 하며 죄인 취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눈길로 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의 삶은 의미가 생겼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하고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뭇사람이 죄인의 집이라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집으로 당당히 들어갔습니다. 집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음식을 나누고 하얀 밤을 지새워가며 얘기를 나눴을 것입니다.
삭개오 변하다
예수님을 만나자 삭개오의 태도가 변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평생 남에게 뭘 준다는 것은 몰랐는데 소유의 절반을 떼어 주었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기 때문에 절반을 내어 놓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절대 속여서 빼앗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에는 1/5만 갚으면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삭개오는 회개도 화끈하게 합니다. 그가 재산을 내놓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목적이 돈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긁어모으는 인생에서 주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임하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어떤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까? 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합니다. 삭개오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도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대표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과 동급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은 삭개오를 다시 그 사회로 복귀 시켜 주셨다는 의미도 됩니다. 삭개오는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왕따 당했던 사람인데 그들과 같은 형제로 당당히 살아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삭개오는 예수님과 만났던 그 뽕나무를 평생 동안 찾았다고 합니다. 그 감격적인 장소를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예수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삶에는 외로움 고독 이런 단어는 없습니다. 죄책감도 없습니다. 로마서 8: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합니다. 삭개오도 받아준 예수님은 그 어떤 죄인도 다 용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죽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도 없습니다.
요한복은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까지는 육체가 죽는 과정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한 부활의 소망 때문에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시달려 무기력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삭개오야! 재키우스! 하시면서 제2 제3의 삭개오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잃어진 자가 있다면 이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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