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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 스토리(창세기24장15~25절, 25장)

by 명주(明珠) 2024. 7. 15.

주인공은 리브가 입니다. 리브가는 “그물 끈”이란 뜻입니다. 한나는 자비, 라헬은 순한 암양, 사라는 공주, 룻은 우정이란 뜻입니다. 리브가는 그물 끈입니다. 여인의 이름으로는 기분 좋은 이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물 끈의 기능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물 끈이 끊어지면 고기는 잡지 못합니다. 리브가의 성격을 이름의 의미로 유추해 봅니다. 리브가는 단호하고, 근면하고, 성격이 급했습니다.

난센스 퀴즈 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있는 음식메뉴는 무엇입니까? “아무거나(anything)”입니다. 메뉴 고르라 하면 아무거나 하는 분 들이 있죠? 여러분은 주도적인 성향이십니까? 아니면 아무거나 메뉴를 좋아하는 형이십니까? 오늘 교제는 주도적인 성향의 리브가의 훌륭한 점과 실수한 일을 소개하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제1장 가야 할 때입니다.(창24)



본문은 창세기24장:15~25절참고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20마리의 낙타와 함께 800km를 여행합니다. 여행기간은 20일입니다. 뜨거운 모래사막도 지나왔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종은 리브가에게 달려갑니다.(17) 그리고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마시게 해 달라 합니다.(17) 예수님이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요4:9) “당신은 가나안 남자로서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하며, 썸을 타려하나이까? 당신이 알아서 떠먹으세요!”하고 쌀쌀하게 거절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썸 타다는 신조어로 ‘수작을 걸다.’란 뜻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어떻게 합니까? 친절하게 물을 주었습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낙타에게도 물을 줍니다.(19)

낙타에게 물을 주는 리브가



지금부터 리브가가 낙타에게까지 물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설명합니다. 첫째는 우물이 깊었습니다. 중동지역의 우물은 보통 30m까지 팠다고 합니다. 물까지는 계단을 통해서 내려갔습니다. 두 번 째는 물 긷는 항아리는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무거웠습니다. 셋째는 물의 양이 많았습니다. 낙타 한 마리는 100L의 물을 마십니다. 그러면 20마리면 몇 리터? 2,000L죠! 숫자로만은 감이 안 오니까 1.5리터짜리 페트병으로 환산하면 1,333개 분량입니다. 리브가가 세월아 네월아 하며 걸어 다녔습니까? 아닙니다. 뛰어다녔습니다. (창24:20) 리브가는 물을 기르면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졌었을 것입니다. 낙타가 물을 먹고 난 뒤 아브라함의 종이 잠잘 곳을 청하자(23) 자기 집에 짚과 사료가 충분히 있다고 하면서 기꺼이 초청도합니다.(25) 리브가는 적극적으로 섬겼을 뿐 아니라 마음씀씀이도 넓었습니다.

리브가의 성격은 청혼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도 엿보입니다.(34-49)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해도 그 누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이방 땅으로 보내겠습니까?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어떻게 처음 본 늙은 종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형님인 아브라함과 이삭이 직접 왔다면 모를까요? 당시는 가족관계증명서도 없었습니다. 물론 스마트 폰으로 영상통화도 안됐습니다. 또 신랑감이 코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혹시 입이 삐뚤어졌는지 손가락이 양쪽에 5개씩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시집을 보냅니까? 또 몸은 멀쩡하다 손 치더라도 성격이 혹시 사이코 패스일지 어떻게 압니까?^.^

창24:50,51을 보면 가족들은 리브가를 보내기로 합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리브가의 뜻을 반영했는지는 본문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혼사가 성사되자 바로 다음날 떠나고자합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창24:55절을 참고합니다. 바로 데려가지 말고 최소한 며칠 길게는 열흘 정도만 머물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지 말라고 간청하자(57) 이번에는 리브가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합니다. 리브가는 무엇이라 합니까? 58절을 보십시오. 리브가는 즉시 가겠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보면 오히려 리브가가 가족들 보다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지금이 즉시 가야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만약 리브가가 며칠 또는 열흘을 더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온갖 유혹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이웃집 친한 친구 가 ‘얘 한 번 더 생각해봐라! 주변에도 멋진 신랑감이 많은데 꼭 그렇게 멀리 가야겠느냐’며 만류했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마음이 바변하기 쉬웠습니다. 얼마 전 의사 청년과 혼담이 오가다 깨진 일을 아쉬워하며 마음이 변하기 쉬웠습니다. 또 은근히 리브가를 마음에 두었던 이웃집 오빠 K군이 장미 천 송이를 들고 와 “오늘이 리브가 당신을 마음에 둔지 천 일째 되는 날입니다.” 하고 고백해서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항상 “며칠 또는 열흘”이 문제입니다.

리브가는 며칠 또는 열흘을 더 있어야할 것 같은 유혹을 뿌리치고 바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모와 함께 떠난 리브가는 그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리브가를 성경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평합니까? 창24;16절은 심히 아리땁다(very beautiful: fair)고 합니다.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심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창24:60절다시 보십시오. 리브가를 천만인의 어미로(the mother of thousands of millions:KJV) 축복합니다. 한 두 명의 어미가 아니고 “thousands of millions”입니다.

성경은 리브가 같은 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리브가는 적어도 공주과는 아니었습니다. 30m계단을 단숨에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외모보다는 마음이 호수같이 넓었습니다.

자 그러면 리브가가 어떻게 가야할 때임을 알았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단호한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까? 은금 패물, 브랜드 의류에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아니면 자기 사는 곳이 지겨워서 탈출하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은 성숙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기도의 종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24:12), 하늘의 하나님(24:7), 땅의 하나님(창24:3)께서 이 모든 일을 인도하셨음을 일관되게 증거합니다.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란 호칭이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창24:1, 3, 7, 12 ,21, 26, 27, 31, 35, 40, 42, 44, 48, 50, 52) 리브가는 종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가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았습니다.(창24:51) 처음 보는 종과 함께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갈 생각을 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능한 하나님을 믿었을 때 즉시 가겠다는 결단했습니다.


제2장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창22:9-10, 창25: 19-28, 창26장, 창27장)



참고할 본문은 창세기 27장23~35절입니다. 리브가는 주도권을 잡는 형이며 성격이 급하다고 서두에 소개합니다. 이런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어떤 남편을 붙여 줍니까? 정반대 성격의 이삭입니다. 리브가편에서 이삭을 보면 한 마디로 ‘속 터지는’ 남편입니다. 이삭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형입니다. 싫어도 싫은 내색은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합니다. 바가지를 긁어도 그저 웃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웃음이란 뜻입니다.

이삭의 성격은 우물을 파고 양보하는 데서 엿봅니다. 이삭은 총 몇 개의 우물을 팠습니까? 7개입니다. 이삭은 우물을 메우고 쫓아내는 주변국들과 충분히 싸울 힘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창26:13,14) 그러나 이삭은 4번씩이나 양보를 합니다. 리브가는 이런 이삭이 바보 같아 보일 수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변 왕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삭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창26:26-33) 이 우물 양보 사건은 구약에 선으로 악을 이긴 최초의 사건입니다.(롬12:21)

이삭의 성격은 기도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이삭이 자녀가 없는 문제를 놓고 몇 년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20년간 하나님께 간구(intreated:KJV)합니다. 40세에서 60세까지 기도합니다.(창25:21) 리브가는 20년간이나 뚝심 있게 기도하는 이삭이 또 속 터지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심으로 응답합니다. 그것도 쌍둥이로 주었습니다. (창25:19-26)

기도의 열매로 얻은 에서와 야곱의 성격이 또 공교롭게도 반대입니다. 에서는 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즐겼습니다. 외모는 야성미가 있었습니다. 한류열풍 있지 않습니까? 에서도 가나안류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외국 여자들이 털 복숭이 에서 사진으로 자기 방을 도배하기도 합니다. 에서는 여기에 혹 해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부모의 근심을 삽니다.(창26:34) 요즈음 박보검 같이 키 크고 얄상한 남성이 인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고등 시절에는 에서같이 털 있는 남성이 인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는 털 나게 하는 연고가 유행입니다. 친구들은 얼굴에 구레나룻가 나게 바르기도 하고 또 가슴에 V자형으로 털이 나도록 바르기도 합니다. 야곱은 이런 외향적인 에서와 반대로 조용히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또 어머니를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성격의 이삭은 반대 성격의 활달한 에서를 사랑합니다. 반면에 활달한 리브가는 조용한 야곱을 사랑합니다.(창25:27,28)

당시는 장자권은 맏이에게 가는 것이 사회통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통념을 뒤집는 선택을 하시죠? 차자인 야곱을 뱃속에서부터 선택합니다.(창25:23) 이를 알고 있었던 리브가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어느덧 이삭도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졌습니다.(창27:1) 그런데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성취는 감감 무소식입니다(창25:23) 리브가는 이러다 에서에게 축복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행동에 나섭니다. 일명 축복갈취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내용은 생략합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도청작전도 있습니다.(창27:5) 염소고기 별미요리 만들기도 있습니다.(창27:14) 변장술도 등장합니다.(창27:9-16) 물론 거짓말은 처음부터 기본으로 깔고 갑니다.(창27:19) 당시 리브가의 입장에서 상황은 급합니다. 이삭은 형 에서에게 이미 축복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창27:3,4)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쓴 것은 리브가의 실수 같아 보입니다.

창27:12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조용한 성격인 야곱의 소극적인 의사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비주도적인 사람은 적극적으로 반대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싫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씩 웃기만한다면 그것이 바로 “싫다!” 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리브가는 두려워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고 한번쯤은 이것이 과연 정당한 방법인가? 고민할 시간을 가졌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폈어야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어떻게 합니까? 야곱의 의견을 묵살합니다. 창27:13절을 보십시오. “저주? 그거 내가 다 알아서 받을 테니까! 너는 내말만 들어!” 합니다.(창27:13) 리브가는 모든 상황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조정 가능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에서가 얼마나 분노할지 몰랐습니다. 속은 에서는 아버지가 죽는 날을 D-day로 정하고 동생을 죽이고자 합니다.(창27:41) 야곱을 그냥 두면 사냥꾼 에서에게 죽을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할 수 없이 에서의 분노가 풀릴 때가지만 잠시 집을 떠나있도록 합니다.(창27:45) 그러나 이 잠시는 영영이 됩니다. 리브가는 이때 야곱을 떠나보낸 뒤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또한 한 배에서 난 두 아들이 원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리브가를 중심으로 성경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가 만약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보면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아픔은 겪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27장이후의 내용을 보면 리브가는 실수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 12지파를 탄생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롬8:24) 우리가 비록 잠시 딴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내어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십니다.(고전10:13, 시23:4)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딤후1:7)

여기 계신 여러분은 지금이 가야 할 때입니까? 아니면 조용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려야 할 때입니까? 만약 가야 할 때라면 “며칠 아니면 최소한 열흘을 함께 머물게 하라(창24:55)”라는 유혹에 속지 마시고 즉시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기다려야할 때라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쓰기보다는 성경을 펼쳐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겠습니다.(시편62:5,행17:11) 선택은 여기 계신 여러분의 각자의 숙제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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