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기록시기
요한계시록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 기록 당시 나이가 90살입니다. 시기는 AD95 년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입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즉위하자 마자 자기는 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너가 하나님과 같이 될까봐 선악과를 못 따먹게 했다. (창3:3)”라고 사단이 유혹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내가 신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교만의 죄입니다. (잠언16:18) 그런데 모든 사람들 본성 속에는 “내가 신이다.”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회사 조직에 응용해 봅니다. 세상 회사나 조직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깁니다. 교회는 반대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깁니다. 회사나 조직에서 상사 곧 윗사람의 자존심을 건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 내가 신이라는 의식이 밑바닥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자존심을 잘 세워줄 줄 알면 진급을 잘합니다.
2.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배경-밧모섬으로 유배 간 사도 요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신이라고 선언했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은 눈에 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미티안 황제 때 기독교인을 가장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네로 황제 때는 기독교인을 죽여 그 기름을 태워 조명으로 쓰고 그 아래에서 파티를 즐겼습니다. 토미티안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추방하고 맹수와 결투하게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을 맹수의 밥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이때 사도 요한도 핍박받아 밧모 섬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밧 모섬은 당시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했답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정치범으로 몰렸습니다. 사도요한은 12제자 중 막내였습니다. 10대 때 제자로 부름 받아 90평생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좀 평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노인의 몸을 이끌고 유배를 갔습니다. 밧모섬이 인도네시아 발리 섬 같았을까요? 아닙니다. 밧모섬은 돌섬입니다. 돌섬인데 소나무는 있어나 봅니다. 밧모는 그리스어로 송진이란 뜻입니다. 돌섬에서 노인이 무엇을 먹고 살았겠습니까? 돌섬에는 채석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돌을 깨는 막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갔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요한계시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 계시록1장19절은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없는 성경은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없으면 “이 세상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 가고 어디에서 어떻게 끝나는가?”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덕분에 우리는 세상 역사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역사가 끝난 이후에 대하여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가는 삶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3. 묵시문학적 기법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黙示文學, Apocalyptic literature)적인 기법으로 쓰였습니다. 묵시의 묵의 한자는 잠잠할 묵(黙), 조용할 묵(黙), 이고 시는 보일 시(示) 입니다. 잠잠하고 조용하게 보여주는 기법이란 뜻입니다. 묵시문학은 주로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는 문학 장르입니다. 묵시문학은 특히 하나님 백성에 대한 핍박이 극심 심할 때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전달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서와 유사한 말씀이 많습니다. (다니엘7:9, 10:6) 상징적인 표현을 쓰는 기법으로 계시록이 쓰였기 때문에 우리는 문자 그대로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실제 큰 나팔 소리이니 듣는 우리 귀가 먹지는 않을까? 예수님 머리가 백발처럼 희니 할아버지를 상상하고, 불 꽃 같은 눈이니 레이저 광선이 나가지 않을까? 입에서는 칼이 나오고, 발은 주석이니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로봇 발로 상상하면 안됩니다. 본문의 상징적인 언어는 구약에 같거나 유사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표현을 참고하여 본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4. 주의 날 성령에 감동되어
그러면 10절부터 보겠습니다.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은 주의 날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주의 날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날, 주일 날을 뜻합니다. 그리고 미래적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요한은 주일에 예배 드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본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라는 표현은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에 감동됐다 하여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이단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 성령님을 잘못 이해한 이단입니다. 성령으로 이상한 체험을 시켜 준다고 하면서 막 뒤로 넘어지게도 합니다. 거품 물고 넘어지게도 합니다. 신비주의, 은사주의 다 성령님과 관련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나온 주의입니다. 오늘 본문 에서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은 주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고 죄사함 받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성경 말씀과 함께 우리를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오늘 주일인데 낚시하러 바다에 가지 않고, 골프채 들고 필드에 나가지 않고 교회에 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말씀교제 하러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성령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 받으러 일부러 산에 들어가 소나무 뿌리 뽑으며 100일 기도 안 해도 됩니다.
5. 7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방식
11절을 보십시오.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예수님이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기록은 파피루스에 했습니다. 4미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배달부가 어느 교회부터 갔겠습니까? 밧모섬에서 제일 가까운 곳부터 갔습니다. 이곳이 에베소였습니다. 80km 정도 떨어졌습니다. 에베소에 원본을 전달하면 손으로 필사하기 시작합니다. 몇 날 며칠을 베꼈을 것입니다. 복사기가 있었으면 수백 장 복사하여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사 장비가 없으니 손으로 일일이 베꼈습니다. 베끼고 나서 사본은 두고 원본은 에베소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로 갔습니다. 그곳이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에서 베끼고 나면, 그 다음 버가모, 그 다음 두아디라, 그 다음 사데, 그 다음 빌라델비아, 그 다음 라오디게로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본문의 순서대로 교회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렇게 베끼고 베끼다 보면 사본이 많아집니다. 현재 남아있는 성경사본들은 25,000개나 됩니다. 고고학에서는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때 사본 수가 얼마나 많냐 적냐를 따집니다. 성경의 사본 수를 감히 따라올 책이 없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5개, 헤로도투스 역사 8개, 줄리어스 시저 전쟁기가 10개 있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믿고 성경은 잘 믿지 않습니다. 25,000개의 사본이 있는 성경은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안심하고 믿으십시오.
6. 나팔 소리의 의미
본문에서 나팔은 군인들 깨울 때 썼습니다. 요즈음은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한답니다. 직접 나팔은 불지 않고 MR을 쓴답니다. 제 군대생활 할 때는 논산 훈련소에서는 썼고 자대 배치 받은 후는 못 들어 봤습니다. 당직사관이 핸드마이크 들고 깨우거나, 마지막 불침번이 형광등 불 켜면 일어난 기억이 납니다. 나팔은 깨우는 역할, 적이 쳐들어왔을 때 경고의 나팔을 불 때 사용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나팔 역할을 합니다. 성경 말씀이 잠자는 심령을 깨웁니다. 가짜를 판별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짜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종의 기원을 쓰고 진화론을 완성한 찰스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생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했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창안한 칼 마르크스도 신학생이었습니다.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늘 깨어 있는 자세, 또 말씀으로 가짜를 잘 분별하는 실력도 필요합니다.
7. 9가지로 표현한 예수님의 모습
본문12~16절까지는 요한이 성령 안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9가지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발에 끌린다고 하여 무도복이 아닙니다. 구약에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당시 죄를 졌고 타락한 사람의 몸은 가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갈 때는 몸을 완전히 덮었습니다. 죄의 몸을 보이면 부정하여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모습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표현합니다. 띠는 바지 내려가지 말라고 허리에 차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가슴에 찼죠? 당시 가슴에는 왕만 금 띠를 찰 수 있었습니다. 왕이 아닌데 가슴에 금띠를 찼다 가는 잡혀갑니다. 끌리는 옷, 가슴에 금 띠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상징입니까? 예수님 제사장이고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대제사장이고, 만왕의 왕으로 계십니다. 3번째 표현은 14절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라고 합니다. 산 꼭대기에 때 묻지 않은 눈 보셨죠? 머리와 털이 희다 그래서 백발 노인이란 뜻이 아닙니다. 흰색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조금도 없다는 뜻입니다. 4번째 표현은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라고 했습니다. 불꽃은 무엇을 태웁니다. 불꽃은 심판과 정화를 상징합니다. 5번째 표현은 15절에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라고 합니다. 주석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그 주석이 아닙니다. 북한의 주석은 주인의 자리란 뜻입니다. 본문에 주석은 합금이나 놋쇠를 말합니다. 주석 같은 발은 온 세상과 온 우주를 밟고 계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6번째 표현으로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물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물소리 들으면서 스트레스 받거나, 시끄러워 못 살겠다고 하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름에 휴가를 물가로 갑니다. 물 소리는 우렁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있고, 파도 소리도 있습니다. 물은 생명수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 7번째는 16절에 “그의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오고.”라고 합니다. 본문은 말씀의 검을 말합니다. 말씀의 검으로 죄와 악과 허물을 도려낸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8번째는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일곱 별은 당시 일곱교회를 상징합니다. 또한 7은 완전수로 오늘날 모든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오른 손으로 교회를 붙들 있다는 뜻은 교회를 권능으로 보호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9번째 표현은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라고 했습니다. 해는 예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찬란한지를 묘사합니다.
9가지 표현을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예수님, 가슴에 금띠를 띤 예수님, 양털 같고 눈 같이 흰 머리털의 예수님, 불꽃같은 눈을 가진 예수님, 빛나는 주석 발을 가진 예수님, 많은 물소리와 같은 목소리의 예수님, 날선 검이 나오는 입의 예수님, 오른 손에는 일곱별을 붙들고 계신 예수님, 해가 힘있게 비취는 듯한 얼굴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크심을 세상에 있는 언어와 대상으로 이 정도 밖에는 표현이 안됩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언어의 한계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8. 우리 마음에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마음에 바로 이 예수님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고생 고생 하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아 있으면 부모님 상상할 때마다 슬프고 눈물이 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고, 고생하다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 모습만 있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늘 힘들고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냄새 나는 마굿간에 오셔서 그저 마리아 품에 안겨만 계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고개만 푹 숙이고 계신 예수님 만 마음 속에 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고 만왕의 왕입니다. 온 우주와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마음에 자리해야 합니다.
9. 죄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 주님을 보았을 때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되었는지 보겠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사도 요한은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옛날에 요한과 예수님은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 요한은 예수님 가슴에 기댈 정도로 친근했습니다. 이렇게 그 앞에 엎드리고 무릎 꿇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박쥐나 올빼미가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에 바쁩니다. 이와같이 죄인들도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 죽고 멀쩡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의복으로 몸을 완전히 가렸듯이 우리는 예수님으로 옷 입혀져 죄가 완전히 가려진 자들입니다.
10. 사도 요한이 두려워 하지 말아야할 이유
본문에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17절 하반절과 18절에 나옵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세세토록 살아있는 자다. 나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가 지금 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는 역사를 여신분이 주님이고 또 역사를 끝낼 분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지구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또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심판과 구원을 완성하실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생사 여탈 권을 가지고 계신분입니다. 물론 사도요한의 생사도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11.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처음 우주를 만들 때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의 질량이 얼마를 차지하는지 아십니까? 50% 아닙니다. 99.85%를 차지합니다. 나머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행성을 합하여 0.15%를 차지합니다. 지구는 몇 프로겠습니다. 0.0003%만 차지합니다. 태양을 농구공 만하게 만들면 지구는 그 위에 점 하나 찍은 셈입니다. 우리는 그 점 안에서 싸우고 지지고 볶고 있는 셈입니다. 그 점에서 더 작은 대한민국에서 이러고 있습니다. 이 점 하나 찍은 지구에 하나님은 또 무엇을 하셨습니까? 밤에 너무 어둡지 말라고 달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별을 만드셨습니다. 별은 모두 자체 발광을 하는 태양입니다. 밤하늘의 별 몇 개 인지 알아보겠습니다. 4000억 개가 모인 것을 은하계라 합니다. 그 은하계가 우주에는 2조 개가 있습니다. 그러면 총 별의 수는 8에다 동그라미 23개 붙인 개수만큼 많이 만드셨습니다. 우주의 크기는 빛의 속도로 930억 년을 달려가야 하는 크기입니다. 그리고 이 점 하나 만한 지구에 하나님은 또 무엇을 하셨습니까? 직접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말구에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선물 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려고 오셨습니다. 마치 거대한 태양이 지구 곳곳을 비추듯이 죄로 어두워진 우리 영혼을 밝히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12. 2000년 전 이땅에서 행한 예수님의 능력
이 예수님의 능력은 2000년 전 이 땅 가운데 계실 때도 언뜻언뜻 나타났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7 귀신 들린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잡고있는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원하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도 얼음판 걷듯 걸었습니다. 죽어 썩어 냄새나는 사람을 오뚝이처럼 일으켰습니다. 치료하는 광선으로 의학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38년 병자, 소경, 한 손 마른 자, 열병 들린 자, 유출병자 단번에 치료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불꽃과 날선 검으로 병을 태우고 도려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중보기도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13. 두려워 말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도 요한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원어로 “알 티라우” “두려워하지 말라우!”라고 하십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 평안하라”고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언제 도미티안 황제가 자객을 보내 자신을 죽일지 두려웠을 것입니다. 돌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90 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했는데 채석장에서 돌가루와 함께 인생 끝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사도요한은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도 요한의 어깨에 주님이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운 생각을 멈추라고 합니다. 마치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추듯이 두려운 생각을 “STOP!”하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은 죄입니다. 죠지 뮬러 형제님이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믿음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주님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을 잡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내 맘대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열쇠로 열어줘야 죽는 겁니다.
14. 교회와 성도 개인에게 천사를 보내어 보호하시는 하나님
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오늘 본문 1장 20절에 나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란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자는 동물 사자가 아닙니다. 천사란 뜻입니다. 일곱 교회의 천사란 일곱 교회를 돕는 천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장 10절에 우리 성도도 각자를 지키는 천사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히브리서 1장 14절은 천사는 구원받을 자들을 섬기라고 보냄을 받았다고 증거합니다. 이 구절은 골로새 교회에서 했던 천사숭배는 잘못된 교리임을 가르칩니다. 교회와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가 보이지 않게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40일 금식 후에 천사가 수종을 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15. 에베소 교회로 돌아온 사도 요한
90살 사도 요한이 두려웠던 것처럼 과연 밧모섬에서 쓸쓸히 마지막을 보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미티안 황제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44세에 자기 방에서 암살당합니다. 해방된 노예에게 칼에 7번 찔려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18개월 후에 에베소로 돌아가서 평안하게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돌섬에서 돌 가루 마시며 인생 끝날 것 같은 사도 요한의 두려움은 지나고 보니 아무 쓸모 없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주님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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