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데리고 오션 700, 피크아일랜드 같은 실내 물놀이 시설을 가끔 갔습니다. 놀이 기구 중에 큰 물통에 물이 꽉 차면 쏟아지는 기구가 있습니다. 물통이 기울어 물이 쏟아질 때 아이들은 아래서 물벼락을 맞으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 기구의 물통이 뒤집혀 텅 비면 또 물이 서서히 차올라서 꽉 차고 임계점이 다다르면 다시 쏟아집니다. 이 장면을 영적인 것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십니다. 자기 부인하는 과정을 물통의 물을 비우는 과정으로 보면 됩니다. 우리가 비워지면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통에 차지도 않았는데 일을 많이 하면 부작용이 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 지친 분들은 은혜가 찰 때까지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주인공입니다. 베드로는 좌충우돌하면서 자기 부인을 하는 과정을 겪고 거기에 주님이 사랑으로 채우고 사명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는 시각을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라는 시각으로 교제해 보겠습니다.
1. 네게 무슨 상관이냐?
1절을 보십시오. 디베랴 호수가 나옵니다.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를 다른 말로 디베랴 호수라 합니다. 2절에 보면 갈릴리 가나 사람이라 하여 갈릴리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갈릴리의 지명의 뜻은 “둥글다”입니다. 실제 갈릴리는 남·북으로 80km, 동서 56km입니다. 갈릴리는 쓸모없는 땅, 있으나 마나 한 땅, 이방에 갈릴리라 부르며 당시 유대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더 무시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받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한 복음 역사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라는 증거 아니겠습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땅이 있었습니다. 그 바로 위가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위에 갈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마리아와 유대는 수백 년 남북으로 갈라져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 리가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마리아 속하지 않고 유대에 속했을까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BC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의 손을 빌려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지역적인 편의성을 무시하고 갈릴리를 유대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이때부터 유대 사람들이 갈릴리로 많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 조상들도 갈릴리 나사렛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갈릴리 땅은 예수님이 나고 자라고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최적의 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이 갈릴리 지역은 무시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면 복음 역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옥에 갇혔을 것입니다. 갈릴리는 하나님께서 복음 역사의 전초기지가 되도록 세상 역사를 움직여 가면서 준비한 땅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손길을 볼 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없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고 교회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그럼 수많은 교회 중에 현재 속한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활동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말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끝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도 간에 서로 섬기고 세워주고 권면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함께 순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부분과 연관된 구절을 먼저 살려보겠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 20-22절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이 끝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장면입니다. 한 참 따라가다 돌아보니 사도 요한도 열심히 예수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요한이 최고의 경쟁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인생 챙기기도 바빠야 할 텐데 요한의 인생까지 궁금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뭐죠? “네게 무슨 상관이냐.”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질문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한 지체로 존중하고 도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되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너는 나만 보고 잘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사람을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갑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자기에게 정해진 트랙을 가면 됩니다. 남의 트랙에 관심은 가지고 응원은 해야겠지만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향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실제 트랙이 있는 운동 경기에서 남의 트랙 밟거나 넘어가면 실격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신앙 생활하면 사람에 따라 신앙이 흔들립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남의 인생사를 많이 궁금해합니다. 자기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혼자 밥을 못 먹습니다. 혼 밥 못합니다. 혼자 먹으면 서로 이상하게 봅니다. 그래서 가끔 tv를 보면 2인분을 시키고 다른 한 사람이 곧 올 것처럼 말하면서 혼 밥을 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인생으로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요한에게 두신 주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베드로는 그것을 존중하고 힘껏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2. 양을 치는 자세
본문 2절을 보십시오. 7명의 제자를 소개하는데요. 5명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입니다. 나머지 2명의 제자는 주석을 보면 안드레, 빌립이랍니다. 7인의 어부가 의기투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3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 삼세번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상황이 제일 안 좋을 때 배반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힘들 때는 말 한마디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 체포되어 재판장으로 막 끌려가시는 순간 베드로는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자기 코가 석 자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삼세번씩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이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찾아와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오늘 3번 사랑 고백을 받는 장면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떠나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강원도 사나이 대 사나이에 일어난 일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주 낯 간지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짓궂을 정도로 집요하게 3세 번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의도적이었냐 하면 베드로가 세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근심스러운 표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사람을 돕습니다.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그날 밤고기가 단 한 마리도 안 잡힙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결국은 빈 그물, 빈손, 빈 배인 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도 텅텅 비었습니다. 7명의 어부는 평생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고기 있는 포인트 모르겠습니까? 적어도 7명이 한 마리씩은 잡아서 7마리는 잡혀야 정상조업입니다. 한 마리도 못 잡는 상황은 이들의 마음을 비우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업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본문 6절과 11절을 참고하면 그 후 예수님은 이들의 빈 그물을 채워주십니다. 오른편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거대 물고기 153마리가 올라오게 하십니다. 153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153이 당시 물고기 전체 종류로 봅니다. 저는 굳이 153을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만큼 성경이 사실이라는 방증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실제 세어 본 물고기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심으로 제자들의 빈 그물, 빈 배, 빈손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제자들이 3년 전에 어부를 그만두고 예수님 제자로 떠나면서 얼마나 큰소리쳤겠습니까? 가족들에게도 내가 큰 자리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잘살게 해 주겠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거지꼴이 돼서 고향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했는데 빈손으로 가족들한테 들어가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심정이겠습니까?
본문 15,16,17절을 참고합니다. 본문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삼세번 사랑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 없는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 3번 모두 이런 대답을 합니다. 17절 마지막 대답은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란 말이 더 붙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자신 없는 대답을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펄펄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다른 제자들이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절대 안 버린다.“(마태 26:33)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잡아가지 말라고 말고의 귀까지 잘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펄펄 뛰던 베드로는 온데간데없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주도권마저도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사랑 고백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자기 부인이 된 베드로를 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표현도 원어 적으로는 자기 부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면서 100% 자기 부인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또 자기가 살아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기 부인이 100% 되는 순간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펄펄 뛰었던 베드로 자신이 죽고 빈 가슴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사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보통 세상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그렇게 열심히 도와주었는데 배반하고 도망가면 포기하기 쉽습니다. 부활한 후에도 예수님은 2번이나 제자들을 찾아가서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러면 딴사람 찾아보기 쉬웠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젊고 유능한 인재가 많았습니다. 70인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70인 주변에는 120명 제자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12명은 얼마든지 다시 뽑아 사명을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베드로 한 사람을 포기치 않고 세우십니다. 끝까지 사랑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습니까? 빌라도도 한번 찾으러 갈 법합니다. 빌라도도 만나서 “당신 죄도 없는 나를 넘겨?”하고 죄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 가야바도 있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채찍질한 로마 군병들도 한 번쯤은 찾았어야 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첫째도 제자들, 두 번째도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도마는 개인적으로 옆구리에 손을 넣어 확인까지 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선택한 자들만 철저하게 찾았고 끝까지 돕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섬기는 모습 보면 눈물겹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밤새도록 실패한 제자들의 언 가슴을 녹이려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십니다. 성냥도 없던 시절에 숯불도 피우십니다. 숯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무를 때서 연기를 참아가며 숯을 만드는 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21장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예수님은 그 숯불로 또 생선과 떡 요리까지 해 놓으셨습니다. 7명의 장정이 먹을 음식 몇 접시 가지고 되겠습니까? 한 사람당 3인분을 먹는다고 하면 식수 인원은 21일분은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잡은 생선도 좀 가져오라 하셨고, 즉석 생선 숯불 요리도 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손수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하십니다. 생선 뼈도 정성스레 발라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거룩한 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으로 손수 떡과 생선을 가져다 차리고 먹게 하셨습니다. 너무 디테일하게 섬기십니다. 떡과 고기 툭 던져놓고 알아서 손질해 구워 먹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디테일한 섬김과 질문에 베드로의 언 마음은 이미 다 녹아내렸고 사명을 회복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회복시키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5. “내 어린양을 먹이라.” 16절 “내 양을 치라.” 17절 “내 양을 먹이라.” 16절에 내 양을 치라하셨습니다. “치라”라는 단어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직업이 돼지치기였습니다. 바로 그 돼지 치기 할 때 치라와 같은 단어랍니다. 돼지를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돼지한테 빗자루 던져주고 “너의 집은 네가 알아서 치워!” 하면 되겠습니까? 매일 팔을 걷어붙이고 오물을 치워 줘야 합니다.
제가 8개월 전에 아들 하나를 집으로 들였습니다. 저의 숨겨둔 자식이 아닙니다. 길고양이 출신 고양이 한 마리를 들여왔습니다. 구내염으로 다 죽어가던 고양이 수였는데 이름은 오레오입니다. 구내염은 자가 면역질환으로 입속이 다 헐어서 침도 못 삼킬 정도로 아픈 병입니다. 심하면 음식을 못 먹고 굶어 죽습니다. 구내염은 고양이에게는 최악의 병입니다. 이 고양이가 죽을 그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처음에 저는 고양이 키우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더 빠져들었습니다.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 구내염도 이제는 아주 많이 좋아진 상태입니다. 고양이 치는 일 그냥 밥만 주면 될까요? 안 됩니다. 오줌똥을 하루 두 번 치워줘야 합니다. 털도 구르밍 해야 합니다. 고양이의 사냥본능도 해소해야 해서 사냥놀이도 해야 합니다. 물도 신선한 물로 하루 두 번 갈아 줘야 합니다. 따뜻한 잠자리도 챙겨줘야 합니다. 야행성이어서 새벽에 꼭 놀아달라고 웁니다. 저는 이 고양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일방적으로 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고양이는 일방적으로 복을 누립니다. 고양이 한 마리도 치려면 아주 디테일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유대 회당에 들어가서 폼 잡고 설교만 하고 찬사 받으면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돌보아야 할 양은 베드로의 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자기 아이 보다 남의 아이를 돌 볼 때 더 조심합니다. 그렇게 남의 양 돌보듯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양에게 하듯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양 칠 때 지시하면 양이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다. 뒤에서 몰면 절대 안 갑니다. 본을 보여야 뒤따라갑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양을 치는 자세로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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