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를 강같이
아모스서는 정치인들이 많이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5장24절입니다5장 24절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 지어다.” “정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 대통령 탄핵 때도 법관님이 부결정문에서 인용했다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살던 동네 옆에 사해가 있었습니다. 흐르지 않아서 죽은 바다입니다. 아모스는 사해라는 자연의 원리를 생각하며 말씀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2. 성경용어를 다른 곳에 쓰지 말자
성경을 영적인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인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적으로 거듭난다느니, 경제적으로 거듭나다느니. 거듭난다는 말을 제일 많이 씁니다.^^ 영적으로나 예수님을 통해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최근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액션영화 제목에도 썼습니다. 영화 관계자들도 다만 죄 사함 받고 사단의 손에서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에게 한 소녀가 찾아왔답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답니다. 소녀의 사정을 들어보니까 혁명에 가담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소녀의 간구에 정의대로 해야지 살려줄 수 없다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간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듣자 황제는 아버지를 풀어줬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3. 긍휼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한자도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긍(矜)자 불쌍히 여길 휼(恤) 자를(恤) 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습니다.(惻隱之心)이라했습니다. 맹자는 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까지 했습니다.
4. 불공정 사회
최근 경제 신문 기사를 하나 봤습니다. 1면에 “국민 60% 불공정하다.”란 제목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60%60%씩 나 우리 사회를 불공정사회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내용을 봤습니다. 1003명이 설문을 했습니다. 1003명이면 대한민국 인구 77천만 명의 0.0014%입니다. 1003명으로 전 국민 60% 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습니다. 또 설문 내용을 보니까 “불공정한편이다.”가 46.8%이고 “매우불공정하다.”가 13.6%였습니다. 두 개를 합쳐서 60.4%가 나왔습니다. “불공정한 편이다.”를불공정한편이다.” 불공정하다에 끼워 넣기가 약간 무리가 있었습니다. “무엇 무엇 편이다.”이니까 확정적인 의견은 아닙니다. 저는 그냥 “이분들은 보통이다.”라고 답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기사는 우리 사회가 매우 불공정하다고 여기고 상당한 불만을 가진 기자님이 쓴 기사라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반대로 제목을 “그래도 국민 40%는 공정하다.”란 제목으로 쓸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사회의 공정여부를 따져 기사의 진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비뚤어진 마음으로 보면 다 삐뚤게 보인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보면 무조건 다 깎아내리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씀드리려고 기사를 인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악풀 본능이 있는 듯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본능입니다. 긍휼한 마음으로 사건을 보았다면 설문에서 40%의 공정함이 더 크게 보였을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여당편도 야당편도 아니고 예편입니다. 예수님편입니다.
제가 보기엔 과거보다는 우리 사회가 많이 공정해졌습니다. 제가 어릴 때 관공서 같은 곳에 무엇을 신청하러 가면 명절 같은 때는 줄이 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늦게 온 사람이 신청서 밑에다 빳빳한 만원 자리 몇 장 깔고 “수고 많으십니다.”하고 들이밉니다. 그럼 순서가 뒤바뀝니다. 급행료를 아래에 깐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별로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시청에서 만 원권 밑에 깔면 큰일 납니다. 잡혀갑니다. 오만 원 권 신사임당으로 깔아도 안 됩니다. 김영란 법 위반으로 잡혀갑니다. 요즈음은 번호표가 있어서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5. 아모스 선지자가 살던 시대싱
아모스 당시는 상당히 불의한 시대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갑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본문의 때는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다 전하고 난 후를 말합니다. 본문의 인물은 아모스 빼고 아마샤와 여로보암 왕이 나옵니다. 지명은 벧엘이 나옵니다. 여로보암 왕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왕하14:23-29) 북이스라엘 13대 왕입니다. 그의 치리기간은 BC793-753년 약 41년41 동안 다스렸습니다. 대단한 왕입니다. 정복전쟁을 해서 다윗 왕 이래로 가장 큰 영토 확장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광개토대왕에 버금갑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치적이 많으면 성경에 많이 나올 것 같죠? 아닙니다. 많이 없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하여 평이 딱 한 줄로 나옵니다.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4:24)”입니다..(왕하14:24)”입니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제2의 종교 중심지입니다. 여기에 금송아지 숭배 재단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 아마샤입니다.
당시 죄악상은 아모스서 2장 6~8절에2장6~8 기술합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았다고 나옵니다. 요즈음은 신발이 브랜드 화 되어서 비쌉니다. 당시는 가장 쌌다 합니다.. 그토록 싼 신 한 켤레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종으로 팔렸습니다. 당시는 신한켤레만큼의 긍휼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저당 잡힌 겉옷을 착복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밤에는 겉옷을 이불 대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겉옷을 덥고 자면서 추위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도 겉옷은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어겼고 신전에서 이 겉옷을 깔고 누웠습니다. 그러면 신의 특별계시를 받는다는 미신이 있었답니다. 또 벌금을 과하게 부과한 돈으로 포도주를 샀습니다. 성전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니나노 판을 벌렸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했고 영적으로도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습니다.
6. 회개치 않는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예언
이런 시대에 대하여 아모스는 회개치 않으면 여로보암 2세의 왕가는 망하고 금송아지 우상 신전들은 파괴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신전이 훼파되면 아마샤는 밥줄이 끊깁니다. 그러니 아마샤가 그냥 둘 리 없습니다. 본문 10-13절은 아마샤가 모반하는 내용입니다. 모반은 점이 아닙니다. 계책, 꾀 모에 뒤 업을 반자입니다. 10절 하반절에절하반절에 “땅이 견딜 수 없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뜻은 현재 여로보암 2세로 인한 최고의 안정과 평화의 시기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으로 이 안전과 평화가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계속 11절을 보십시오.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본문 내용은 다 맞는데 딱 한 군데가 틀립니다.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입니다. 아모스7장9아모스 7장 9절을 보면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로 예언했습니다. 아마샤 무엇을 생략했습니까? 집을 뺐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장차 일어나게 될 여로보암 왕가에 대한 예언이었는데 집을 빼니 지금 당장 왕을 칼로 살해한다는 뜻으로 바꿉니다. 여로보암왕 당장 안 죽고41년 다스립니다. 아마샤는 오늘날로 하면 형법의 내란 수괴 죄로 고소합니다. 내란은 국가의 통치 기능을 저해하거나 파괴하려는 행위고 내란수괴는 이를 주동한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벌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아모스가 군사 조직을 했나요? 무력시위를 했나요? 단순히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아마샤 너무합니다.
7. 거짓 선지자 아마샤
12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본문에 아모스를 선견자 야하고 부르죠. 아마샤는 아모스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떡이나 얻어먹을 목적으로 예언하는 사람으로 폄하합니다. 도망가라는 말은 위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공권력을 발동해서라도 죽이겠으니 도망가라는 겁니다.
13절입니다.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선지자가 벧엘 성소에서 예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궁궐의 주인도 궁극적으로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열왕기하14장27열왕기하 14장 27절을 보면 여로보암 2세의 정복전쟁에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 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리에 여로보암 왕이 대신 앉아 있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제사장 아마샤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영적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마음의 성소에 왕이 누구냐의 싸움입니다. 왕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 것들이 앉아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앉아 있느냐? 의 싸움입니다. 우리 성도는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데 도대체 몸속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의 심장 속, 뇌 속에, 아니면 혈액 속에 계십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으로 우리의 인격 속에 거하십니다. 인격은 지정의를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의지, 우리가 느끼는 감정, 우리의 지성에 거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마음 중심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으면 안 됩니다.. 나침판의 N극은 늘 북쪽을 향합니다. 흔들어도 빙글빙글 돌다 결국은 북쪽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사고도 늘 나침반과 같이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겠습니다.
저는 아모스를 고발하는 아마샤의 태도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이 1도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모스를 보니까? 부정적인 말, 모함의 말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서 1장에서 9장까지를 읽으면 아모스의 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징계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내 백성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안 돌아왔다는 표현을 5번이나 씁니다.(암 4:6,.(암 8, 9, 10, 12) 또 하나님을 찾으면 살게 된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아모스는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애가도 부릅니다.(암 5:1-3).(암5:1-3) 애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의 마음이 상처가 되어서 나오는 노래 아니겠습니까?
8. 아모스의 중보기도
아모스 어디 애가만 불렀습니까? 중보기도도 했습니다. 아모스서 7장1에서67장 1에서 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 안 듣는 이스라엘을 메뚜기 떼로 초토화시키려 합니다.. 그러자 아모스는 중보기도를 통해 메뚜기 재앙을 막습니다.(암 7:1-3).(암7:1-3) 또 하나님이 말 안 듣는 이스라엘을 불로 초토화 시키려 합니다.(암 7:4-6).(암7:4-6)
어제 강릉 연곡 계곡에 다녀오다가 화재를 목격했습니다.. 이건 창호란 상호명이 있는 2층 건물이었는데 불이 지붕을 뚫고 나왔습니다. 검은 연기가 77번 국도 도로까지 뒤덮었습니다. 시커먼 연기 속을 지나오는데 가스통이라도 터질까 봐 무서웠습니다. 제가 10살쯤 때는 시골에서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초가집에 불이 난적 있습니다. 초가집이니까 초스피드로 탔습니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제 막내 여동생은 아버지가 목숨 걸고 꺼내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어른들이 양동이로 불타는 지붕에 물을 부었습니다. 불이 꺼지기는커녕 더 많은 불꽃을 내며 더 잘 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물이 증발하면서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경 중 불구경이 최곡 아닙니까?? 저희 집은 타는데 동네사람들은 새벽에 추운데 구경 나왔었습니다. 불 무섭습니다.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이 미웠으면 중보기도 했겠습니까? 아모스 그냥 불구경했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간절히 중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불 심판도 막았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이런 진심을 보지 못하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9. 아모스의 반격
본문 14,15절부터는 아모스의 반격입니다.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다 하셨다 고백합니다. 아모스서에는 내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문장이 무려 60번이나 나옵니다. 15절에서도 여호와 께서가 주어로 두 번 나오죠? 아니 아모스 지금 학력을 위조해도 시원찮을 형국에 나는 선지가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무엘 시대 때부터 선지자 학교가 있었습니다. 벧엘에도 세웠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런 학교 하고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그는 목자 출신이고 뽕나무를 재배했던 농부 출신이었습니다. 촌티가 많이 났을 것입니다. 투박한 사투리도 썼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암1장1암 1장 1절에 보면 그의 고향은 드고아입니다.. 남유다에 있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더 남쪽으로 1616킬로 떨어졌습니다. 유대광야 접경지역입니다. 해발 거의 약 1000미터1000 고지대입니다. 땅이 메마르고 거칠어서 농사도 못 지었습니다. 드고아에서 벧엘까지는 약 35킬로35 떨어져 있습니다. 당시 벧엘은 드고아와는 달리 호화로운 도시였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비단방석, 멋진 소파, 상아 침대가 있었습니다. 여름별장, 겨울별장, 상아장식의 별장도 있었습니다. 최고급 AA++등급 소고기, 고급 포도주 마셨습니다. 이곳에 시골출신 아모스가 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말씀 선포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0. 돌무화가 나무
참고로 본문의 뽕나무는 우리나라 뽕하고는 다른 뽕입니다. 이스라엘의 뽕나무는 돌 무화과나무입니다. 잎이 우리나라 뽕나무하고 비슷하다 합니다.. 우리나라도 야생에서 자라서 작거나, 시거나 해서 못 먹는 열매에 돌잖아 개자를 붙입니다. 개복숭아, 돌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로 떫어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를 돌 무화과나무라 합니다. 그런데 돌 무화과에 바늘로 구멍을 내고 올리브유를 바르면 단 열매가 된다 합니다. 이일을 목자들이 주로 했다 합니다.. 이유는 건기 때 양에게 먹일 목초지가 없으면 밀밭에 풀었다 합니다. 왜냐하면 밀 수확하고 남은 뿌리를 먹을 수 있었다 합니다.. 양이 밑동을 먹으면서 배설물도 떨어뜨리니까 거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그냥 밀밭에 못 들어가게 하고 목자들 보고 뽕나무에 올라가 돌무화과에 구멍을 내주면 해줬다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뽕나무에 자주 올라갔다 합니다.
11. 아모스의 마지막 심판 메시지
16,17절을 보십시오. 아모스는 아마샤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도 참 쉽지 않습니다.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또 전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기름통을 들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가감 없이 전합니다. 본문에서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이라고 했습니다. 땅을 측량하여 나누어진다는 뜻은 이방인들이 쳐들어와서 땅을 분할해 자기들끼리 나누어 산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망합니다. 앗수르 살만에 셀에 의해서입니다. 열왕기하 17장에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옵니다.
12. 벧엘로 간 아모스
저는 아모스가 어떤 마음으로 벧엘로 갔을까 깊이 묵상해 봤습니다.. 당시는 170년 동안 남북이 나뉘어 원수처럼 지내던 시절입니다. 양치기, 농부가 남의 나라 땅에 어떻게 갈 수 있었을까? 또 막상 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막막했을까? 누가 드로아 촌놈의 말을 들어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가라 했을 때 모세는 무어라 핑계 댑니까? 자기는 말더듬이어서 못 간다고 합니다. 요나는 아예 도망을 갔습니다. 고래 뱃속까지 갔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말씀 제대로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듣던 지 말던지 성벽 외곽만 돌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제대로 했습니다. 아마도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설교를 많이 했을 듯합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길거리 선지자란 닉네임을 붙입니다. 아모스가 단순히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갈 수 있었던 동기는 제가 오늘 제목으로 잡은 긍휼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모스서 3장 3에.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개역한글은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 어찌 동행하겠으며”입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같은 방향, 같은 목적지, 같은 길, 같은 방법, 같은 속도로 가야 합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동행할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이는 외적인 동행 조건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였습니다. 멸망해 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원수지간 다 떠나서 따뜻한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무정한 시대에 보석 같은 사람입니다. 아모스의 이름 뜻은 짐을 진자입니다. 그는 이 긍휼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어준 짐을 완벽하게 졌습니다. 완벽하게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아마샤의 마음이 아니라 아모스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지옥에 대하여 설교하는 자는 지옥에 대하여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13. 긍휼의 마음
긍휼의 원어 어원은 어머니의 태에서 왔답니다. 어머니의 태는 뱃속의 아이를 완벽하게 보호합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긍휼의 마음은 이와 같이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사업적이 됩니다. 복음사업이 됩니다. 그런데 구도자님들은 이런 마음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이 사람이 나를 긍휼의 마음으로 찾아오는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나? 압니다. 마태복음 5장75장 7절에서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긍휼은 준만큼 되돌아오는 마음입니다. 메아리 마음, 부메랑 마음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으로 구도자를 대하면 구도자들도 그만큼 돌려줍니다.
긍휼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마12:20마 12: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는 빨리 꺾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썩어 냄새납니다. 꺼져가는 심지도 빨리 꺼야 합니다.. 안 그러면 끌을 음이 많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감당해 주십니다.
우리 사회에 긍휼의 마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서로 헐뜯고 상처 내고 상처받는 살벌한 사회가 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냉랭하고 무정해집니다. 11월 말에 웅장한 강릉교회가 완공됩니다. 방이 많아서 주아가 숨으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방송을 해야 합니다. “주아야 엄마 아빠가 애타게 찾고 있다. 1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와라.” 방은 많은데 비어있으면 안 될 듯합니다. 많은 방에 구도자들로 채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긍휼의 마음 필요합니다. 성도 간에도 서로서로 긍휼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60%의 불공정보다 40%의 공정이 보일 것입니다. 또 이런 마음으로 구도자를 대할 때 반드시 돌려받을 것입니다. 끝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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