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자들이 알아 듣지 못해도 말씀을 가르치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열두 제자들이 부름 받고 1년 반 정도 된 시기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제일 먼저 신앙 고백하자마자 교회의 진리와 권위에 대해 선포합니다. 베드로와다른 제자들의 신앙 성숙의 길은 아직 멉니다. 이들에게 교회 진리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마치 금방 태어난 아기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는 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진리의 말씀은 알아듣지 못해도 선포하십니다. 나중에라도 생각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 진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도 됩니다.
말씀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씨를 뿌려놓으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교회학교에 한번 간 적이 있습니다. 인도하시는 분이 요한복음14:6절 말씀 외우기 시합을 시켰습니다. 지기 싫어서 외웠던 말씀이 6년 후에 생각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님을 영접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5일 전에 뉴스에 모 교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찰 수십 명이 교회에 출동하여 싸움을 말렸습니다. 새로운 목사님 옹립을 두고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교회 진리에 대해 바른 교리와 형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전해준 교회론에 대해서 교제하겠습니다.
2. 교회는 모여야 한다.
교회에 대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 건축, 성지순례”라는 표현은 바른 표현은 아닙니다. “예배당 건축, 기독교 유적지 순례” 정도로 대체 가능합니다. 신약시대는 우리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고전3:16). 교회 원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무리란 뜻입니다. 영어로 “church”인데 “주님에게 속하는”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단어 자체에 집단의 성격이 있습니다. 집단은 서로 만나야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즈음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스마트폰 시대입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간을 “포노사피엔스”라고 합니다. 또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온라인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AI가 대세입니다. 역대 가장 빨리 AI GPT가 보급되었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지식 전달을 하기보다는 AI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온라인 시대여도 교회는 오프라인에서 자주 모여야 합니다. 모여야 일이 일어납니다.
3. 베드로의 신앙 고백
그럼 오늘 본문 말씀으로 가보겠습니다. 마16:13-19절 말씀입니다. 먼저 13~17절까지입니다. 당시 일반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저 능력이 많은 분으로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슈퍼스타 J로 봅니다. 예수님을 사대 성인 중 한 분으로 여깁니다. 4대 성인은 예수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예수님을 소크라테스급으로 보는 분들은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왕이요, 제사장이요, 구원자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란 고백입니다.
4. 구원은 하나님이 영적인 눈을 계시를 통하여 열어 주어야한다.
예수님은 이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를 인식시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 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 본문에서 바요나에서 “바”는 아람어로 “아들”입니다. “요나”는 “요한”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옛날 이름입니다. 갈릴리 어부 시절 이름입니다. “바요나 시몬아!”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난한 어부의 아들, 갈릴리 촌놈”이었던 자신을 인식시키고 그를 대단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혈육은 인간적인 지혜, 지식, 인간의 노력을 말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자기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니고 위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임을 인식시킵니다. 베드로가 고백했다고 자랑할 게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 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시험 봐서 된 게 아닙니다. 책 읽고 공부하여 된 게 아닙니다. 부모님이 강요해서, 가족이 협박해서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된 일입니다. 복음역사는 인간의 땀과 노력만으로 안됩니다. 하늘에서 그 사람의 눈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혈육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5. 구원은 최고의 축복
베드로는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이 바로 참 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는 무병장수, 부자, 승진 이런 것들을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참고하면 복의 개념이 다릅니다. 창세기의 복의 내용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존재가 된 것이 복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복받았다.”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뜻과 동의어입니다. 새가 잘 먹고 잘 자고 하늘을 잘 날아다니면 복 받았습니다. 복의 개념이 다르므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그복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마5:3-10) 성경의 복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6. 성경에서 죽었다 살았다의 의미
복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라는 기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생기를 불어넣기 전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사람을 우리는 식물인간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아니면 아무런 생명의 기운이 없는 마네킹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기를 넣기 전 상태를 원어로 “네페쉬(enphesh)” 라하고 번역하면“혼”이고, 영어로는 “soul”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사람 자체를 혼이라 합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사람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혼이란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야곱 가족 70명이 애굽 고센 땅에 들어 갔다고 할 때 70 혼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혼에 하나님의 생기, 원어로 “루아흐”가 들어가 생령이됩니다. 생령이 영어로 “living soul, 살아있는 혼”, 또는 “living being, 살아있는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살았다. 죽었다.”는 기준은 “숨이 붙어있다. 숨이 없다.”가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기준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간 사람이냐 아니냐로 판가름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거리에 걸어 다니는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보면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1)”라고 합니다. 신자가 실제 죽고 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살렸다는 의미는 창세기2장7절에 기초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베드로는 죽어 있다가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난 순간입니다. 그러니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7. 신앙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
계속 18절을 읽겠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본문은 베드로를 거의 신격화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본문의 문법을 보면, “너는 베드로라”에서 베드로는 남성형 고유명사입니다. 뒤에 “이 반석 위에”에서 반석은 여성형 일반명사입니다. 앞뒤 격이 맞지 않습니다. 뒤에 반석은 그 앞 절인 16절“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받습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베드로 이후로 같은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의 고백 위에도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8. 사단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본문 18절 하반 절을 보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사단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뜻합니다. 교회는 악의 힘, 사망이 좌지우지 못 합니다. 그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 라고 합니다. 교회의 소유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입니다. (엡5:23) 죽음에서 부활하여 최후 승리한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교회 주인이 예수님인데 목사가 마음대로 교회를 세습하면 소유권 찬탈이 됩니다.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못 건드린다는 말씀을 볼 때 우리 교회도 저는 저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온갖 비바람을 다 맞으며 산전수전 겪으며 50여 년을 버텨온 교회입니다. 성도님들 대부분 이곳에서 영적으로 나고 자라고 성장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교회이니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이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9. 교회가 가지는 특권과 권위
그다음에 교회에게 주어진 특권을 1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줍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열쇠가 매우 컸습니다. 열쇠를 넓은 가죽끈 끝에 걸고 어깨에 걸치고 다녔답니다. 열쇠를 어깨에 많이 걸치고 다닐수록 부와 권세가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도 한때 열쇠가 많음으로 부를 자랑했습니다. 차 열쇠, 아파트 열쇠, 별장 열쇠, 외국 별장 열쇠 많이 자랑했습니다. 요즈음은 열쇠가 없어졌습니다. 디지털 도어여서 비번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퇴근했는데 아파트 비번이 아무리 해도 생각이 안 났습니다. 4번정도 삐빅 거리며 실패하여 아들한테 전화해 문을 열어 달라하여 들어간 적 있습니다. 세상 열쇠가 부럽습니까?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는 열 고을의 열쇠를 가질 자들입니다. (눅 19:17)
8. 교회의 임무
천국의 열쇠로 무엇을 합니까? 19절 하반 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본문에서 매다는 금지를 말하고 풀다는 허락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무엇을 금지하면 하늘에서도 금지를 인정하고 땅에서 허락하면 하늘에서도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결정 권위를 하늘에서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요20:23절을 참고하면 본문의 이해가 쉽습니다.“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땅에서 매고 풀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죄를 사함으로 나옵니다. 본문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 할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본문에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된다 동사의 시제가 현재완료 시제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해짐을 선포함과 동시에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가 아닌 셈입니다. 이미 죄를 사함이 먼저 이루어진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 계획이 이미 창세 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하나님이 죄를 사함을 통하여 사람을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킨다는 의미입니다.
9. 교회의 치리
본문에 풀고 맨다는 의미는 교회의 치리에 대한 권위를 하늘도 인정해 준다는 의미도됩니다. 교회가 기분 나쁘게 개인의 사생활을 간섭한다고 불만을 품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시각이 아닙니다. 교회가 매고 푸는 일 중 하나가 침례 받기 전에 이분이 정말 “구원 받았나? 아닌가?”를 사전에 판별하고 침례를 주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도사가 찾아와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 달라하면 그냥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어느 날 제가 갑자기 강단에서 “어제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왔다. 하나님이 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중 한 사람으로 임명했다. 이제부터는 모두 나를 따르십시오.” 이러면 어떡하실 겁니까? 교회는 이런 분들에 대해 치리가 필요합니다. 또 교회에 이단 사상을 퍼뜨려도 치리의 대상이 됩니다.
제가 계속 두 증인이라 주장하면 교회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합니까? 처음에는 1:1로 상대해 권해야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음은 두세 사람의 증인과 함께 가서 훈계해야 합니다. 만약 회개하고 인정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계속 두 증인이라 주장하면서 성도를 미혹하면 마지막에는 교회에 말하고 교회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겨야 합니다. 이 절차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준 절차입니다. 저의 주장이 성경과 하나님 뜻에 부합하지 않음을 교회는 판단하여 교제를 끊으라고 합니다. (마18:15-17) 이렇게 교회에서 치리한 결과는 하늘에서도 인정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10.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를 권면하는 바울
그럼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복음의 씨를 열심히 뿌린 사도바울의 자세에 대해 공부하고 말씀을 정리할까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 분파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베드로 파, 아볼로 파, 바울 파, 정통그리스도 파로 4개의 파로 나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분파 문제를 어떻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13절을 읽어볼까요?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본문에서 바울 자신은 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하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3장 6, 7절에서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11. 식물이 자라는 과정
그래서 저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과정이 얼마나 대단 하다고 심고 물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묵상해 봤습니다. 일단 식물이 자라려면 잎에서 광합성이 필수입니다. 광합성은 식물이 태양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변환하여 유기 화합물을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 유기 화합물이 포도당입니다. 포도당은 식물이 자라는데 필수 입니다. 포도당은 세포벽을 형성하고, 전분으로 저장도 되고, 호르몬에도 작용한답니다. 만들어지는 포도당의 화학식을 보니 탄소6 개, 수소12 개, 산소6 개( C6H12O6 )입니다. 이게 만들어 지려면 이산화탄소 CO2가 6개, 물 H2O가 6개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산소 6개가 공기 중으로 배출됩니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배출합니다. 배출할 때 물을 분해하는 것이 태양 빛입니다. 빛이 다 쓰이는 게 아니라 가시광선 중 청색과 적색만 씁니다. 빛은 잎의 엽록소에서 흡수합니다. 엽록소가 청색, 적색을 흡수하고 초록색 빛은 반사하기 때문에 나뭇잎이 초록색으로 보입니다.
식물이 자라는데 뿌리도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뿌리는 물과 미네랄을 흡수합니다. 당분과 전분을 저장합니다. 또 땅에서 싹을 틔우려면 적당한 온도와 습도와 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르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자라는 과정을 책으로 쓰면 수십 권은 넘습니다. 그야말로 식물이 자라는 과정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습니다.
12.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자로 여기는 겸손한 자세
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해 봅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과 아볼로 입장에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역할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한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노력에 대하여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다는 영어로 “I am nothing”입니다. “something”이 아닙니다. 그저 나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역사에 걸림돌만 안되어도 다행입니다. 바울은 그러니 사람을 추종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수고를 평가절하 하라는 권면도 아닙니다. 성도들 모두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때 분쟁이 있을 수 없다는 권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니지만,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개척할 때 두란노 서원에서 2년을 눈물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주석에는 하루 5시간은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2년이면 총 3,650시간입니다. 매주 주일 말씀을 가르쳤다면 68년간 단 한주도 빼지 않고 가르친 셈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수고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사랑을 실천 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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