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10km/h로 느리게 가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었다. 오후 3시면 산 그림자로 해가 지던 산동네에 유일하게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가게에는 동네 모든 까까머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여학생이 살았다. 연애 했다는 소문만 나도 퇴학당했던 엄한 시절이었다. 숫기가 없던 나는 그저 그 학생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게에는 막걸리를 큰 단지에 넣어 놋 주전자를 들고 오면 바가지로 퍼주는 방식으로 팔았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이 생각이 나셨는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신고 갈 적당한 신발이 없어서 아버지의 고무신을 신고 갔다.
고무신 뒤로 반 뼘이나 남는 항공모함 같은 신발을 질질 끌며 가게로 향했다. 그날따라 가게 아줌마는 어디 갔는지 그 여학생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오고 붉은 기운이 귓가를 타고 얼굴로 올라왔다. 막걸리 주전자를 받아들고 거스름돈을 건네받고 가게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순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항공모함 고무신 속 발이 너무 자유롭게 움직인 탓인지 문턱을 넘어서다 앞으로 사정없이 넘어졌다. 놋 주전자는 쥐가 귀퉁이를 파먹은 감자처럼 구겨졌고 하얀 막걸리는 바닥에 소금을 뿌린 듯 쏟아졌다. 더 야속한 것은 한쪽 고무신이 장대 높이 뛰기 선수처럼 높이 뛰더니 여학생 발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반쯤 막걸리가 담긴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한쪽 깨금발로 굴러간 고무신을 주우러 가는 그 20초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느리게 간 시간이다.
참고로 막걸리 만드는 순서다. 우선 밀가루와 지하수 보송보송할 정도 반죽을 만든다. 막걸리 맛의 차이는 지하수 물맛이 좌우한다. 막걸리는 발효주여서 염소가 섰인 수돗물은 쓰지 못한다. 밀가루 반죽을 찜솥에 1시간30분 찐다. 찐 걸 체에 거른 뒤 종곡이라는 발효제(이스트)를 섞어 섭씨 38도로 42시간동안 발효시킨다. 여기에 물 1.2-1.3배를 섞어 항아리에 넣고 48시간동안 다시 발효한다. 그후에 밀가루, 찐 덧밥, 물을 더 넣는다. 덧밥은 누룩을 전체 양의 6%정도를 섞는다. 이것을 다시 72시간을 재발효시키면 막걸리 원액이 나온다. 원액에 물을 3배정도 희석시켜 체에 걸러 내리면 먹는 말걸리가 탄생한다. 2016년 이전에는 하우스에서 막걸리를 제조 판매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농림 축산식품부의 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주류 제조면허 대상에서 탁주, 약주, 청주가 추가돼 하우스 막걸리등 전통주를 제조 판매가능해졌다. 1kl 이상 5kl 미민 저장용기를 보유하면 소규모 주류제조면허를 받을 수도 있다. 막걸리의 맛과 향의 60% 이상을 좌우하는 것은 발효제인 누룩이다. 전통 막걸리는 국내산 햅쌀에 국내산 생밀을 굵게 간 전통 누룩을 발효제로 사용한다. 전통 누룩에는 다양한 균이 서식해 재료의 가공법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 전통 막걸리가 맛있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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