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하면 일언 지하에 거절한다. 이유가 있다. 컴퓨터가 새천년을 인식하지 못한다 한Y2K 문제로 지구 종말이 온다고 떠들썩했던 해에 나는 결혼을 했다. 그 대란이 해프닝으로 끝난 다음해에 강아지 한 마리를 샀다. 이름은 폴이라고 짓고 발음은 된 발음 빨(paall)로 불렀다. 아내가 여성회관 수채화 같은 반이었던 동물병원 언니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TV 선전에도 나오는 2개월 된 슈나우저였다. 귀엽고 씩씩하여 아이를 얻은 듯했다.
하여 방에서 키웠다. 이틀이 가지 못했다. 똥, 오줌을 여기저기 자랑스럽게 쌌다. 냄새에 민감한 나는 방안에서는 키울 용기가 없었다. 밖으로 이사하게 하고 대신 튼튼하게 집을 지어주고 미안함을 대신했다. 데려온 첫날 재롱을 많이 피우라고 이름을 재롱이로 지었다. 이름이 맘에 안 드나 별 반응이 없다. 주인에게 알아보니 폴로 불렀다 한다. 폴폴 하고 부르니 드디어 반응한다. 양가 어른들은 강아지 키우면 아이 안 생긴다고 처분하라 성화다. 그럼에도 폴은 우리의 재롱둥이로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랐다. 폴을 집에 두고 마음 놓고 여행도 가지 못했다. 한번은 1박 2일 등산 갔다 왔는데 우리를 기다려도 오지 않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밥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철 깡통 한 개를 다 물어 뜯어놓았다. 폴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유다. 목걸이를 풀어주면 먹는 것도 마다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좋아서 뛰어다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갔다 돌아오지 않는다.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은 태산같이 쌓여갔다. 급기야 폴을 찾아 일대를 이 잡듯이 찾아도 없다. 기다리는 방법 외엔 없다. 늘 막걸리로 인해 기분 좋으신 옆집 아저씨 왈"개는 배가 고프면 자기의 밥그릇이 생각나서 반드시 돌아와!“ 과연 아저씨의 조언대로 거짓말같이 폴은 돌아왔다.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릴 무렵 패잔병같이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었는지 자세히 묻는 게 무슨 소용이냐.
폴은 이후로도 사고를 많이 쳤다. 동네 이름 없는 개들과 어울리다가 옴에 걸렸다. 동물병원 통원 치료, 약물 목욕, 주사 맞는데 드는 비용이 자기를 사 온 갑에 몇 곱절은 들었다. 털은 빛의 속도로 자랐다. 깎는 미용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비용 때문에 주사 놓고 바리깡으로 직접 털 깎는 법도 배웠다. 폴은 속은 섞였지만 나그네 인생에 좋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조깅 할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주었고 발정기 때 새벽 4시에 짖어대다 혼나기도 했지만 낯선 사람을 우렁차게 짖어 우리를 잘 지켜 주었다. 폴은 머리가 좋다. 서열을 잘 안다. 자기를 데려온 아내에게는 뛸 듯이 좋아하다내 앞에 선 최대한 몸을 낮춘다. 아이들을 보면 밀어 넘어뜨리기도 한다. 자기 아래로 보는가 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린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다. 근무지 이동 때문이다. 시골 부모님에게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 부모님 댁에 놓고 올 때 서운함 컸다.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짖어댔던 폴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폴이 집 나가서 안 들어 온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가 잠시 풀어줬는데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 우리는 시골로 달려가서 온 동네를 돌며 "폴! 폴!" 목이 쉬어라 불렀지만, 대답 없다. 우리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것일까? 좋은 주인 만나서 잘 살 것이라 합리화하며 우리는 폴을 영영 떠나보냈다. 길 가다 독일산 슈나우저를 보면 폴 대한 추억과 헤어진 슬픔 그리고 끝까지 키우지 못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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