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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말씀 의미와 교훈

구원의 근거는 외부에 있다.(롬10:5-8)

by 명주(明珠) 2024. 8. 24.

로마서 10장 5-8절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10:5절은 레18:5절 인용이다. 레위기는 모세가 기록한 말씀으로 모세는 율법을 직접 받은 장본인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내용은 느 9:29;겔 20:11, 13, 21에 나온다. 신약 마 19:17;눅 10:28;갈3:12에도 나온다.  문제는 이 율법을 아무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롬 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8:3, 4) 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히 5:8, 9).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롬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율법을 100 지킬 때 의롭다는 판결을 받는다.(레18:5;겔 20:11, 13, 21;눅 10:28). 그러나 사람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이스라엘은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했다(9:31). 유대인은 시각은 율법을 지킨 행위로 구원이 보장되고, 죄 용서를 받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 시각이었다. 그 증거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 때 성령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믿음이었다.

롬10:6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임과 동시에 이를 믿는 자에게는 의롭다고 판결해 주는 기준이다.  믿음으로 옛 시대(old aeon)와 옛사람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는다.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다.  본문에서 "이같이 말하되"라는 표현은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했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본문에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는 신 30:12을 인용이며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 심을 얻으려고 하는 행동을 대변한다.  하늘에 오르는 것은 사람으로서 불가능하며,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오판을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불가능하고 무모한 노력을 한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부인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우리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롬10:7절에서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에서 '음부'는 6절의 '하늘' 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했다. 본문에서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은  히브리어로  '스올'(Sheol)이다.(시 139:8;암 9:2).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본문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에서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 아들이지 않았다.


롬10:8절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는신 30:14의 인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한다. 

본문에서  '전파하는'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상에서 의인화를 통해  율법설교자와 믿음 설교자를 세워놓고 말하듯이 내용을 전달했다. 전자는 죄와 사망의 법 후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설교했다. 바울은 신30장13절을 똑같이 인용하지 않는다. 누가 바다를 건너겠느냐를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로 바꾸었다. 바다는 음부처럼 깊어 잴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지옥의 개념과 동일하다. 바울은 구약 말씀의 수정과 재해석을 통해 주장을 강화시켰다. 하늘에 올라가겠느냐의 뜻은 그리스도를 높은 데서 끌어내리려는 시도이다. 반대로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시도이다. 이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바울은 그림을 그리듯 본문을 묘사해 주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영웅적인 행동할 필요가 없다. 구원을 받으려고 길을 찾고 탐사하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 가까이 오셨다.  구원의 길은 결코 불가능 한 길이 아니다. 참 쉬운 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주변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숨을 쉬듯이 구원은 어렵지 않다. 또 구원은 점진적이지 않다.  즉각적이다.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일으켜 세울 때 비틀거리거나, 기기도 하고, 서서히 걷거나 하지 않았다. 재활훈련하지 않았다. 즉시 걷고 뛰었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는 구원의 근거가 없다. 우리 안에는 논리적 설득력, 분별, 판단력이 없다. 구원은 외부에서 왔다. 내부 발생이 아니다. 전도는 설득과 항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문을 배달하듯 던져 주면 된다. 던져 줄 때 사람들은 듣고 혼자 반응한다. 복음이라는 자체 능력 때문에 사람들은 복종한다. 요나는 니느웨를 저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변두리에서 3일만 간단히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왕에서부터 짐승까지 금식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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