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공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교사 한분이 비행기를 탑승하다가 갑자기 스튜디어스에게 전도할 마음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다가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혹시 들어보셨습니까?”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튜디어스가 탑승구로 뛰어갑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내가 뭐 잘못 한 것이 있나? 내가 혹시 테러범하고 닮았나? 신고하러 갔나? 경찰이 오면 어떡하지? 별별생각이 다들었습니다. 걱정하면서 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그 때 뛰어 갔던 스튜디어스가 다시 자기에게 오더니 “죄송합니다. 그런 분은 탑승객 명단에 없었습니다.”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항공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탑승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2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시대는 AD27년이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1년 지난 때입니다.
1. 믿음을 보시다.(7장1-10)
백부장의 지위
본문 백부장은 로마 장교입니다. 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수장입니다. 그가 명령하면 100명이 일사 분란하게 움직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파견 나온 지역이 가버나움입니다. 로마는 2가지 식민지 정책을 썼습니다. 하나는 황제의 말을 잘 듣는 민족에게는 자치권을 줬습니다. 그리고 조공만 받았습니다. 빌립보 같은 곳이 그렇습니다. 황제의 말을 잘 안 듣는 곳은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면 가버나움은 말을 잘 듣는 곳이겠습니까? 마태복음11장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합니다. 또 소돔성보다 더 악하다고 합니다. 이런 지역에 백부장이 파견 나왔습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종이 병들어 죽게되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의 농기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소리 나는 농기구, 소나 말 가축입니다. 둘째는 소리 안나는 농기구, 삽, 곡괭이입니다. 세번째 말 하는 농기구로 종, 노예입니다. 당시 종은 그야말로 농기구 취급하는 시대입니다.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본문의 이런 종을 사랑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께 청합니다.(3절) 놀라운 사랑입니다.
백부장의 공적
5절을 보면 그는 유대 민족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당시는 회당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회당은 꼭 필요한 건물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회합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에서 말씀도 듣고 성경도 연구하는 모임 장소입니다.백부장은 사비를 털어서 회당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백부장 가버나움에 파견나왔으면 무탈하게 있다가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점령지역의 군인이지 않습니까? 이런 위치에 있으면 보통 무섭고 잔인합니다. 우리 일제 38년 때도 일본 순사 아주 무서웠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이들이 울면 “일본 순사 온다.” 하면 뚝 그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피지배민족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의 사랑에 감동 받은 유대 장로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 줍니다. 장로들 이럴 위인들이 아닙니다. 이방인을 개, 돼지 취급합니다. 더럽다고 이방인 집 마당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이런 이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
또 백부장은 믿음도 가졌습니다. 3절을 보면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처음엔 오시라고 청합니다. 백부장 명령권할 권한 있었습니다. 백부장 나이도 예수님 보다 많습니다. 당시 사병으로 15년을 근무해야 백부장 자리까지 갑니다. 백부장은 40은 넘었습니다. 본문의 청하다(beseeching)는 애원하다, 간청하다는 뜻입니다. 백부장은 오시라 해 놓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감히 예수님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급히 거절 사절단을 꾸립니다. 사절단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벗들입니다. 자기와 같은 레벨인 친구들을 보냅니다. 하인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고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합니까? 7절을 보면 오지 마시고 말씀만 하셔서 종을 고쳐주시도록 부탁합니다. 말씀 한 마디면 죽어가는 종을 살리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병자들을 일일이 안수하여 고쳐 줍니다.(막6:5, 마9:18) 원격으로 고친 사례는 없습니다. 백부장은 창의적인 믿음입니다.
그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습니까? 6,7절을 참고하면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예수님을 주라 합니다. 예수님은 영어로 "the Lord“ 원어로는 ”호 퀴리오스“입니다. 생명의 주인 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자란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에 대한 권능을 믿은 이유가 8절에 나옵니다. 자기도 명령 체계 속에 생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말 한마디면 100명의 병사가 움직이고, 황제의 말 한 마디면 자기는 죽는 시늉이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몸으로 체득합니다. 백부장은 그런 명령 체계 속에서 말씀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나옵습니다.
예수님에게 칭찬 받은 백부장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백부장에게 깜짝 놀라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극찬 합니다. 이만한 믿음은 영어로 “great faith""위대한 믿음”“그야말로 ”명품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칭찬 받아도 손색이 없는 쟁쟁한 사람들을 앞에 두시고 이런 말합니다. 일단 최측근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믿음하면 한 믿음 하는 사람들이 장로들입니다. 모세오경을 어려서부터 외웠습니다. 율법 박사, 신학박사들입니다 이렇게 기라성 같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저는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이 묵상 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 전능하다고 할 때 전능을 믿는 믿음입니다. 전능 함의 크기는 명령권자의 명령을 수행할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렸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고 국군통수권가집니다. 우리나라 공무원 연금 대상 1,221,322명입니다. 군인은 65만 명 정도입니다. 이들은 대통령의 말을 수행 하는 숫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7천만 전 국민일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가장 전능합니다. 당시 로마황제의 명령을 수행할 군인은 50만명 이었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숫자는 무한대입니다. 지구 뿐아니라 온 우주가다 그 명령체계에 순종할 준비합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 예수님이 말씀하면 종을 사로잡고 있던 병균도 움직이고 종 안에 있던 죽어가는 세포도 움직여서 살아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어디까지 믿고 계십니까? 말씀의 권능을 얼마나 믿고 계십니까? 지식보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믿음이 큰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믿은 만큼 사람이 변하고 믿은 만큼 행동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결과
백부장의 믿음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이 문장에서 주목할 단어는 “이미”입니다. 이미 나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명령하는 순간에 이미 완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심은 바로 이 즉각성입니다. 사람의 명령은 뜸이 들어야합니다. 절차와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은 즉각적이고 동시적입니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명령하시면 뜸 들이지 않고 즉각 빛이 생깁니다.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이 즉각성, 동시성을 믿지 못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그 자리에서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갖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무엇입니끼? 3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7:3)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소문 한 두번이 아니고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듣는 것의 중요성 강조하고 싶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란 말씀도 요5:25절에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독일 심리학자 에빙하우스는 인간의 망각곡선을 만들었습니다. 곡선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듭니다. 단어를 듣고 10분이 지나면 망각이 시작된답니다. 1시간이 지나면 50% 잊는답니다. 9시간이 지나면 60%롤 잊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67%가 없어진답니다. 그래서 복습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말씀도 꾸준히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도 애굽 왕궁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가 품에 안고 하나님 말씀을 꾸준히 들려주었습니다.
백부장을 통해 또 하나 배울 점은 인간애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애가 있어야합니다. “저분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날 것 같아! 철면피!”이런 평가 받으면 곤란합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겸손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먼지 같은 존재인가를 알 때 우리는 겸손해 집니다.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의 슬픔을 보다.(눅7:11-15)
미국에서 유학하던 어떤 분이 지도교수가 상을 당하여 문상을 갔습니다. 그는 “저는 당신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지도교수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게 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는 타인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I am sorry.”라고 합니다. 그 뜻은 “제가 당신의 슬픈 소식을 듣게 되어서 죄송합니다.”란 뜻입니다.
본문에 에수님의 행동을 보면 나인성 과부를 만나기위하여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가십니다.(1절) 예수님 과부의 슬픔을 보셨습니다.(13) 보통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지만 누가는 14절에서 내가 네게 말하노니 란 표현을 추가합니다. 15절에 독자를 어미에게 주셨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나인성에서 나인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이 기쁜 성에 슬픈 일이 발생합니다. 유대사회에서 돌봐야할 3대 계층은 과부와 고아, 나그네(출22:22, 민30:9, 신10:18, 신14:29)입니다. 본문은 그중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이자 하나만 있던 아들마저 잃은 여인이 주인공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독자 장례행렬입니다. 유대인의 장례 문화는 하루 만에 장례를 치룹니다. 시신이 금방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같은 냉장 시설이 없었습니다. 3일장하면 슬픔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시간이 있습니다. 당일 장례를 치러야하니 여인의 울음소리는 유독 더 컸습니다.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도 안따까워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대신 울어주는 사람까지 고용을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 11절을 참고합니다. 예수님은 나인성에 의도적으로 갔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인까지 40킬로입니다. 성인 남성이 빨리 걸어 하룻길입니다. 먼 거리임에도 예수님은 여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깁니다. 불쌍히 여기다 원어의 뜻은 창자가 뒤틀린다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입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란 가요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북으로 가는 유일한 외곽도로가 미아리 고개입니다. 노래 가사에는 6.25 때 딸을 잃은 슬픔, 북한에 끌려가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으며 가족과 이별하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합니다. 깊은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슬픈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이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 받았을 때 무엇이라 하십니까?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합니다.(출2:23) 그러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나는 예수님 앞에서 얼마나 슬픈 자인가 생각해 볼 필요 있습니다. “나는 그다지 슬프지 않고 그럭 저럭 살아가.” 이러면 곤란합니다. 마태복음5장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있습니다. 애통해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시편에도 마음이 상한 자, 통회하는 자, 상한 심령을 하나님은 멸시하지 않습니다.(시편 34:18,시편 51:17)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뻔뻔하면 안됩니다. 목을 곧게 세우면 안됩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야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도와 주고 싶은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긍휼을 입을 만한 자가 되어야합니다.
울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분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울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 유머가 있습니다. 아니 장례식장에서 같이 울어줘야 예의입니다. 그래서 장례 울음지도사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울지 말라의 문법은 현재 명령법입니다. 부탁조가 아니고 명령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묵상해 보면 이런 말씀을 할 분은 예수님 딱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봅니다.(요11:11) 깨워주면 됩니다.
그럼 어떻게 깨우는가? 14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댑니다. 당시 관은 시신을 싸서 들것에 올려놓는 수준입니다 민19:11을 보면 율법에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든 말든 개의치 않고 터치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해서 시신을 만집니다. 시신을 만질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히4:15)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을 터치한다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과 같은 원리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TV에 보면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손을 대면 나쁜 기운이 옮겨와서 병든 사람이 살아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요1:29)
예수님은 시신을 터치하면서 무엇이라 명령합니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합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명령체계 안에 있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 떠나가고 청년은 살아납니다. 일어나라 하실 때 예수님 장풍을 써가면서 했습니까? 몸을 흔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합니까? 성화를 보면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나직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15절을 보면 죽었던 자가 일어났고 말도 합니다. 성경은 죽었던 자로 기록합니다. 기절했던 자가 아닙니다. 죽었던 자가 이번에도 즉시 일납니다. 몇 번 몸을 뒤틀다가 머리를 흔들다가 옆으로 한번 뒤집었다가 일련의 과정이 없었습니다. 즉시 오뚝이처럼 일어납니다. 본문에서도 동시성, 즉각성 봅니다.
일어난 청년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를 따르라~”“복음 역사에는 청년이 필요하다. 2030세대가 요즈음 없다.”하셨습니까? 아닙니다. 15절 하반 절을 보면 그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슬픈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주었습니다. 가서 효도하라고 보냅니다. 이제 엄마를 더 이상 속상하게 하지 말고 잘 부양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는 분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다 헤아립니다. (히4:15) 우리가 이 주님 안에서 겸손한 자요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누가복음7:1-15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1)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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