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은 “마음이 두근거리는 상태”입니다. 가라앉지 않고 들떠있는 마음입니다. 요즈음 말로 “심쿵”입니다. 심장이 쿵하고 놀라서 빨리 뛴다는 뜻입니다. 워즈워드라는 영국 시인이 있습니다. 18세기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무지개란 시 모두 아실 것입니다. 읽어드립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내 가슴은 설렙니다./‘어렸을 때도 그러하더니/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합니다./늙어서도 그러할 것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기는 나의 삶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으로 이루어져 가기를... ...”.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설레노라! 어린 시절의 순진함을 평생 유지하기를 바라는 시라고합니다. 어떻습니까? 여기계신 성도님들도 무지개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뛰십니까? 그저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듯이 무덤덤합니까? 아니면 무지개하면 흰색과 검정색이 무지개 색에 속하나 안속하나가 의문만 듭니까?
성도님들의 신앙 가슴은 설렘이 있으십니까? 예수님과의 첫사랑 때문에 아직도 설레 입니까? 성경을 펼칠 때 마다 설레 입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설렘이 있으십니까? 교회 오실 때 어떤 설렘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오늘은 어떤 무지개를 보여주실까? 심쿵 하십니까?
본문은 성전 세 납부 사건입니다. 등장인물 예수님, 베드로, 세금징수원, 동전 문 물고기입니다. 등장하는 고기 물고기계의 일등 공신입니다. 아니 일등공어(一等公魚)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AD29년 경 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고 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은 3년 반입니다.
베드로도 제자 경력 3년을 넘긴 셈입니다. 베드로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마4:19절“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Follow me,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란 말씀으로 부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듯이 사람을 낚으리라 약속 합니다. 베드로 낚시 고수였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이 약속의 말씀 한 마디에 베드로는 앞으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단번에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니고데모에게처럼 거듭남의 비밀, 하늘나라의 확장하며 복잡하게 설명했으면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릴 때부터 해 왔던 낚시에 비유하여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영적 낚시꾼입니다. 각자에게 맞는 미끼를 던집니다.
예수님에게 바라는 베드로의 마음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상 왕이 되면 총리자리를 차지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참고합나다.“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죽는 다고 합니다. 처음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16장에 베드로에게 신앙 고백 받은 후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한적한데로 모시고 갔습니다. 예수님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그러다 사탄아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이번에는 근심만합니다. 본문 근심하다의 다른 번역은 “몹시 슬퍼했다. 큰 슬픔에 잠겼다.”입니다. 제자들은 근심으로 얼굴이 마치 장마철에 먹구름 낀 듯 어두웠습니다. 다시 산다는 말씀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성전세 반세겔
2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반 세겔은 성전 세입니다. 성전세의 유래는 출애굽 직후로 거슬러갑니다.(출30:11-16) 당시 각자의 생명 값으로 성막에 들어갈 때 돈을 내도록 합니다. 돈은 성전 운영비용으로 썼습니다.
반세겔을 드리게 한 것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킴과 동시에 장자들이 모두 죽는 심판에서 생명을 건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성전세를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 속전의 한자 뜻은 죄를 면할 속자 돈 전자를 씁니다. 히브리어로 “코페르”라고해서 죄수를 몸값을 치르고 풀어 주기 위한 돈 입니다. 속전은 누구나 공평하게 냈습니다. 가난하다고 덜 내고 부자라고 더 내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인이란 의미입니다.
속전의 의미
속전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에 속박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해줄 속전은 우리 자신이 죽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속전으로 대신 죽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 2일 품삯입니다. 요즈음 시세로 20만 원 정도 됩니다. 본문에 세금징수원은 회당 관계자 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파견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좋아 할리 없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부정축재를 많이싸여 다 손가락질 합니다. 깨끗한 사람이 지적하면 수긍을 합니다. 그런데 똥 묻은 개 재 묻은 개 나무라듯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세금문제를 지적 하니 자존심 상했습니다.
징수원의 말에 베드로도 신경질적으로 대답합니다. 2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신다.” 하고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예수님은 시몬아 하고 친근감 있게 이름을 부릅니다. 명령하지 않고 네 생각은 어떠하냐하며 의견을 묻습니다. 본문 관세와 국세는 “상품이나 물건 등에 붙이는 세금과 그 나라의 시민에게 붙이는 인두세”를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연히 타인에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26절 하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입니다.(요3:16,요1:14, 요1서4:9)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입니다.
주인인 예수님은 성전세를 안내도 되는데 내려고 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2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이 없는 예비 신자들입니다. 믿음이 어린 자들입니다. 실족(失足)하다는 발을 헛디뎌 넘어짐입니다. 덫이나 올가미를 놓아서 남을 넘어지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실족하다란 말의 헬라어는 스칸달론입니다. 오늘날 말로는 스캔들(Scandal)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심으로 불필요한 스캔들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내는 방법이 기상천외합니다. 27하반 절을 보십시오.“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합니다.
본문의 바다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한 세겔 동전을 문 일등 공어 이름은 탈라피아입니다. 성어가 39~ 40cm 정도 됩니다. 도미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탈라피아는 민물 어종이고 도미는 바다 어종입니다. 그런데도 식감이 비슷하여 사람들이 잘 속는다고 합니다. 자연산 도미 10만원인데 탈라피아 1만2천원입니다. 탈라피아 부부 금슬 좋습니다. 잉꼬 고기입니다. 새끼를 낳으면 2-3주간 암수가 협력하여 지극정성으로 돌봅니다.
알이나 새끼를 입속에 넣고 키우는 특성이 있다 합니다. 치어들도 위험한 순간이 오면 어미 입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아마도 이런 습성 때문에 동전도 쉽게 입에 넣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탈라피아 정보 좀 더 드립니다. 탈라피아 껍질이 화상치료에 쓰인답니다. 번식력이 강해서 생태계교란종입니다. 그런데 10도이하면 얼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번식해도 겨울에 다 얼어 죽기 때문에 큰 염려는 하지 않는다 합니다. 번식력이 강해서 지구에 대 재앙이 올 때 비축용 식량으로 쓰려고 개인 수영장에서 수천마리씩 키우는 사람도 있다합니다.
한 세겔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찾아 보았습니다. 동전 이름은 스타테르라 합니다. 미국 달러 50 센트의 크기와 같다 합니다. 50센트 달러 지름이 30.61mm입니다. 감이 안 오시죠? 우리나라 500원 동전이 26.5mm입니다. 한 세겔은 500원 동전보다 약간 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 세겔은 노동자 4일치 품 삯입니다. 오늘 날 값어치는 40만 원 상당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베드로가 자기가 임의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낚시를 던져 한 세겔을 문 물고기를 우연히 낚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따져 봅니다. 한 세겔이 바다 바닥에 가라앉으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불도저처럼 바닥을 훑다가 동전을 입에 넣지는 못합니다. 동전이 나풀나풀 떨어지는 도중에 먹이인 줄 착각하고 물어야합니다. 40만 원짜리 동전을 누가 바다에 던질까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베드로가 낚시를 던지는 시간, 동전이 떨어지는 시간, 고기가 동전을 입에 넣는 시간, 그리고 나서 고기가 베드로 낚시를 무는 시간 이 모두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한 일 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날고 기는 30년 베테랑 낚시꾼이어도 이 고기 잡기는 불가능입니다. 전지 전능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설레이는 마음-물고기 입 속에서 한 세겔을 꺼내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불가능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접고 순종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못 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랜만에 휴가 가는 기분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사도 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묵혀 두었던 낚싯대를 들고 갯바위로 가서 미끼를 끼고 바다에 던질 때의 그 설렘 상상해 보십시오. 또 일등공어 물고기를 끌어 올려 주둥이 속에 한 세겔을 꺼낼 때의 그 희열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일등공어 물고기 살았겠습니까? 죽었겠습니까? 당연히 살려 줬겠죠? 한 세겔을 물어다 줬는데 회 떠서 먹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일을 통해 먹구름 같았던 마음에 근심이 걷혔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자기 실력 믿고 자기 마음대로 낚시를 던지면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던지라 할 때 던져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 내 경험을 내려놓고 주님이 던지라 할 때, 주님이 던지라는 포인트에 던질 때 한 세겔을 낚아 올릴 수 있습니다. 낚아 올렸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역사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언제 설렜습니까?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 밤 설렜습니다. 김밥에 사이다에 별 사탕 들어간 뽀빠이 먹을 생각에 잠을 설쳤습니다. 대학 입학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설렜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의 설렘과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무덤덤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인 설렘이 없어졌습니다. 별로 심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설렐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답변입니다. 정리하며 말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첫째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속전이 되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면세 혜택 받았습니다. 두 번째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표정만 봐도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물고기도 주관하시고 불가능한 경우의 수도 일치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세고계십니다 세 번째 한계적인 나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낚시 실력,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면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영적으로 빈 낚시만 끌어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갈급한 마음 입니다. 이 마음은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시42:1) 이런 마음으로 기도의 낚시, 성경 읽기의 낚시, 성도와의 교제의 낚시, 전도의 낚시를 드리울 때 우리는 한 세겔을 끌어올리는 기쁨을 맛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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