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 예화
암벽등반 이야기입니다. 암벽등반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암벽등반 기술 중 하나인 펜듈럼 트래버스(pendulum traverse)입니다. 우리말로 시계추 기술입니다. 등반 하다 한군데도 잡을 곳이 없는 장소를 만납니다. 포기하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쓰는 기술입니다. 핀을 박고 줄을 걸고 몸에 묶어서 시계추처럼 암벽에 매달려 좌우로 왔다 갔다 하다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기술입니다. 이동 하고나면 무조건 올라가야만 합니다. 아래로는 박아 논 핀이 없으니 내려가지 못합니다.
펜듈럼 트래버스 기술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용합니다. 결정하고 나면 무조건 올라 가야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럴 때 있습니다. 1세기 히브리서 수신자들도 유사한 상황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선택할지 유대교로 가야할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히브리서의 수신 대상
히브리서는 유대인 성도가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기대했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많이 쌓아야 구원해 주는 메시야를 원했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였습니다.(행15:11) 유대인들은 이 땅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줄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지상왕국이 아니라 마음 속 하늘 나라를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신자 수는 몇 만 명입니다(마23:15, 행2:11, 행6:5, 행13:43) 어렵게 신앙을 가진 이들을 세상은 가만 두지 않고 핍박합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면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재산도 압류하고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개종자 신고 포상제까지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히브리 교회 성도들 수는 15-20명 소규모 단위였다고 합니다. 히브리서10장25절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를 볼 때 핍박으로 교회를 떠나는 성도가 속출했음을 엿봅니다. 저는 기독교 체질이 아라며 유대교로 갔습니다.
히브리 성도의 영적인 수준
히브리서5장12절을 보면 히브리교인의 영적 수준은 우유 먹는 간난아이라 합니다. 또 13장9절을 보면 이상한 교훈에 미혹 받는 성도도 있습니다. 이단 사상에도 빠진듯합니다. 당시 주요 이단사상은 영지주의와 가현설입니다. 영지주의는 육체에 갇힌 영이 영적 지식을 통해 최상의 세계로 간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도 영의지식을 가르치러 오셨다합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지나친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반대로 지나친 쾌락에 빠졌습니다.
가현설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라는 인간에게 깜짝 쇼같이 잠깐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빠져나갔다는 설입니다.
율법주의
히브리교인을 가장 미혹한 교리는 율법주의입니다. 행15:5절에 나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바리새파는 하루에 두 번씩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절기 때마다 제사 드렸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철, 칠칠절, 오순절, 나팔절, 맥추절, 신년절, 속죄일, 초막절, 수장절, 장막절, 부림절 등등 절기도 많았습니다. 여인들은 매달 비둘기 잡아 정결의식을 해야 합니다. 성전에는 늘 피비린내 났으리라 예상합니다. 유대인 성도는 율법에서 자유로워 지자 너무 느슨하고 밋밋한 신앙생활이 아닌가하는 혼란도 겪었습니다.
구원 직후 찾아오는 갈등들
우리도 구원 직 후 한동안 혼란을 겪습니다. 우리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이 뒤 섞인 문화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나서도 갈등합니다. 결혼 전에“궁합은 맞춰봐야 하나 말아야하나?” 궁합을 봤다가 파혼하는 분 있습니다. 상대가 물이고 자기는 불로 상극으로 나왔습니다. 이사 가는데 “손 없는 날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절이면 “조상 제사 모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빨간색으로 사람이름 쓰면 웬지 께름칙 합니다.” “수맥, 명당, 좌청룡 우백호를 따져야 하나?” “꿈자리가 어지럽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구천을 떠돈다” 합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이사는 슈퍼태풍 예보 없으면 가십시오. 궁합 볼 필요 없이 사랑하면 그만입니다. 조상님들 제사상 못 받습니다. 손 있고 없고 따질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좌청룡우백호만 잠 잘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폭풍 한가운데서도 잘 주무셨습니다. 처녀 귀신, 총각 귀신, 몽달 귀신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제목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목숨 걸고 복음 전합니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낮에 덥습니다. 시에스타(Siesta)라고 하여 낮잠을 잡니다. 바울은 이 시간에 복음 전합니다. 바울은 아침 저녁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고 쉬는 낮 시간이나 밤에 복음 전합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성도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을 때 마음 아팠습니다. 바울은 동족이 구원받으면 자기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까지 말합니다.
유대교에서는 거짓교사까지 히브리 교회에 파견합니다. 그리고 행위 복음을 퍼뜨립니다. 천사들이 예수님보다 우월하다며 거짓교리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도록 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히브리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을 증거 합니다.
히브리서 1장 내용 정리
히브리서1장 내용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히1:1) 예수님은 모든 세계를 지었습니다.(히1:2) 예수님은 하나님 영광의 광채고 본체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은 현재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있습니다.(히1:3)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납니다. (히1:4) 천사도 예수님을 경배합니다.(히1:6) 예수님은 태초부터 땅에 기초를 놓았고 하늘도 손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세상은 모두 옷과 같이 낡아집니다.
우리가 보기에 영원할 것 같은 태양도 1초당 400만 톤 씩 타 없어지고 있습니다. 태양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합니다.(히1:12) 예수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히브리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떠내려가지 않도록 힘쓰라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 가지 말아야합니다.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넘어가면 안됩니다.유념(留念)하다의 유념은 머무를 유 생각할 염자를 써서 “잊거나 소홀하지 않도록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 생각한다.”입니다. 계시록 12장15절을 보면“뱀이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탄은 물을 흘려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내려 가게 합니다. 익사시키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장마철에 강가에서 물고기 잡다 미끄러져 흙탕물에 쓸려가다 구사일생 살아났습니다. 장마철에 강물이불면 흙탕물이 내려갑니다. 흘탕 물은 물속 돌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면 물고기가 물가로 모입니다. 물가는 잔잔한 곳은 물 반 고기 반입니다. 낚시를 넣자 마자 고기가 뭅니다. 눈이 퇴화한 탱수(탱가리)라는 고기는 무식하게 낚싯줄을 위에서부터 물고 더듬어 내려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이거 보는 재미 즐기다 바위에서 미끄러져 흙탕물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물속 흐릿한 흙탕물 속 모습이 기억납니다.
사탄이 흘려보내는 흙탕물 예를 들면 히6:2절에는 게으름의 흙탕물이 있습니다. 히13:5절에 보면 물질의 흙탕물도 있습니다. 히13:4절에는 가정을 파괴하는 흙탕물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상대주의와 인본주의, 쾌락주의가 극도로 팽배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가 주는 흙탕물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흙탕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기지 말라
2~3절을 보십시오. “천사들을 통하여 한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한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천사들을 통하여 한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말합니다(갈 3:19). 구약과 신약은 실상과 모형으로 설명합니다.(히10:1, 히8:5)
흰수염 고래(학명 Balaenoptera musculus) 사진 예를 듭니다. 현존하는 가장 큰 동물이 흰 수염고래입니다. 대왕 고래라 합니다. 몸길이가 33미터 몸무게 190톤입니다. 10톤 화물트럭 19대 무게입니다. 심장만 모닝 자동차만 합니다. 고래 핏줄 안에서 수영이 가능합니다. 흰수염 고래 성격은 온순하여 고등어 한 마리 못 잡아먹습니다. 크릴새우를 먹습니다. 사진사 들은 이 고래가 꼬리 힘을 이용해 설 때 찍은 사진을 최고로 여깁니다. 우리는 이 고래를 바다에 나가지 않는 한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사진을 찍어도 실체가 아닙니다. 2차원 평면 모형으로만 볼 뿐입니다. 성경 구약도 이와 같이 모형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약 모형의 실체인 예수님이 왔으므로 이제는 모형이 필요 없습니다. 모형을 붙들고 살면 안 됩니다. 실체인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모형으로 준 구약의 율법은 지키지 않고 어길 때 하나님이 징계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실체인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고 배척하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큰 구원”은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구원입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현세적입니다. 질병, 가난, 식민지배에서의 구원입니다. 본문의 큰 구원은 예수님을 통한 죄와 죽음에서 구원입니다. 사단의 손아귀로부터 또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약속하였고 사도들과 믿음의 증인을 통해 확증했습니다.(3b). 그래서 믿고 신뢰할 만합니다. 시계추 전법처럼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동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란과 핍박과 유혹이 오더라도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등한히 하다.”란 “팽개치다. 무시하다. 방임하다, 지각을 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큰 구원을 등한히 한다.”를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 해야 할까요? 경험 한 가지 공유합니다. 저는 논산훈련소에 육군 훈련병으로 입소했습니다. 출발 3일 전에 청량리에서 논산 연무대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했습니다. 밤11시23분 기차였습니다. 춘천에서 청량리로 가서 개찰구를 나와 열차에 타서 지정 좌석에 갔습니다. 그런데 누가 남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 자리라고 했더니 한사코 본인 자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표를 부랴부랴 다시 확인했더니 낮11시23분 표였습니다. 23시23분으로 찍혀 있어야 하는데 잘못 구입 했습니다. 입영 전야라 안 그래도 심란한데 밤새도록 서서 가느라 더욱 심란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상황을 본문과 연결해 봅니다. 열차 표만 구입 해 놓고 구원받았다 하며 살면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열차에 올라타야 합니다. 올라탔는데 엉뚱한 열차 타면 안 됩니다. 반드시 열차 차장이 누군지 확인해야 합니다. 차장은 예수님입니다. 차장이 엉뚱한 사람이면 천국행이 아닙니다. 지옥행 입니다. 열차에 탔고 차장이 예수님까지 확인했으면 여행을 즐겨야 합니다. 한쪽에 쭈그려 앉아 잠 만자면 안 됩니다.
“큰 구원을 등한히 한다.”는 말씀을 적용하면 우리는 어느 부류입니까? 표만 구입하고 정작 열차는 타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니겠죠? 열차는 탔는데 차장이 이상한 차장이면 곤란합니다. 열차 타고 잠만 자도 문제입니다. 기차 여행의 묘미는 같이 탄 사람과 찐계란과 사이다도 나누어 먹고 369게임도 하며 즐겁게 가야 합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1장3절을 읽고 정리합니다. 구원열차 여행을 즐기는 필수 3요소는 성경 읽기, 기도하기, 성도와의 교제입니다. 요한1서1장3절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교제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교제입니다”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교제가 구원열차 여행의 가장 큰 재미요 묘미입니다. 구원열차는 탔지만 주님과 긴밀한 교제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흙탕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예수님이 주신 큰 구원을 소중히 여기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고성경구절
히브리서 2:1 ~3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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