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배경
본문의 시대는 AD67년경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이는 68세입니다. 이때 로마는 네로 황제가 다스렸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가장 심한 시절입니다. 네로는 한 마디로 싸이코패스적인 행동을 한 황제입니다. 로마시 대화재 사건을(AD64) 기독교인들이 일으켰다고 뒤집어 씌웠습니다. 죄없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해 가두고, 잔인하게 죽입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의 시신을 횃불 처럼 태워서 정원을 밝히고 파티를 했습니다. 네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반란군을 피해 노예의 집에 은둔하다 발각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네로황제에게 체포된 바울
사도바울은 네로 황제에게 긴급 체포되어 로마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참수형 당 합니다. 참수형 시켰던 돌기둥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기둥 위쪽이 패여 있습니다. 우리가 도마를 오래 쓰면 칼자국으로 패이듯이 돌 기둥의 깍여 나간 흔적은 참수형을 많이 하여 난 장검이나 도끼 자국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쓴 서신서가 디모데후서입니다. 본문은 디모데에게 전할 말을 다 쓰고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부분입니다.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하는 바울
9절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라고 부탁합니다. 너는 디모데입니다. 어서(best) 속히(quickly)오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를 얼마나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지 압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합니다. 디모데 바로 옆집에 살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드로아 들러서 바울의 겉옷과 책을 가져와야합니다. 로마와 에베소 사이 거리는 240Km입니다. 당시 열악한 도로를 감안하면 성인 남성이 걸어서 10일은 걸립니다. 디모데는 바울 만나러 갔다가 네로에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 분위기가 그만큼 살벌합니다. 이것이 무서워 주위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딤후4:16절) 그러나 디모데는 목숨 걸고라도 반드시 올 사람입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습니다. (딤전1:2, 18, 롬16:21 고전4:17 딤전 1:2-18 딤후1:2, 살전3:2) 핏줄보다 더 깊은 관계입니다. 딤후1:3절은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밤낮 기도하고 또 생각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왜 그토록 보고 싶어 합니까? 친목계 하려고 합니까? 서로 믿음 안에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딤후1:4) 또 디모데의 은사를 불일 듯 하게하려고 합니다.(딤후1:6) 그 목적이 복음역사를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을 보면서“나의 주위에는 이런 디모데가 있는가?” 자문해봅니다. “영적인 디모데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속마음을 100%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디모데가 있는가?” “허물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만나면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닌 목숨 걸고 달려올 수 있는 영적 디모데가 있는가?” 모두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또 우리는 서로서로 영적인 디모데들이 되어 주어야합니다.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영원까지 같이 가야할 운명 공동체입니다. “미우나”는 빼겠습니다. 다 고운 분들입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우리도 디모데를 키워야한다 입니다. 키워서 바통을 넘겨주어야죠? 복음역사는 디모데를 영적으로 낳고 키우고 세워서 계승하는 역사입니다.(딤후2:2)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안 게임이 한창인데요. 복음역사를 육상경기에 비유한다면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고 계주입니다. 혼자 열심히 뛰어가서 일등 하는 100터가 아닙니다. 바통을 넘겨주는 계주와 같습니다. 바통을 떨어트리거나 넘어지면 꼴찌합니다. 복음역사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디모데를 키우지 못하면 복음역사는 단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이 시지만 독자적인 행보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면서 바통을 넘겨받으셨습니다. (막1:9, 눅3:21, 마3:26) 침례요한의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우리도 디모데를 키워야하고 또 세워야할 줄 믿습니다.
데마, 디도, 그레스게
10절을 보십시오.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아주 특이하게 갔습니다. 데마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내버리고 갔습니다. 우리 아리랑 가사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했는데요. 데마는 발병도 안 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마를 성경에 기록해서 세세토록 불명예를 안겨줍니다. 데마는 세상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벼랑 끝에 있는 바울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데마가 떠난 일이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데마만은 남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참고구절 빌1:24, 골4:14) 심지어 어떤 분은 ”데마가 떠나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데마는 장을 지지며 떠났습니다. 데마 이름의 뜻은 “인기가 있다.”입니다. 인기 있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은 대적해야지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못 생긴(인기 없는)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산을 지키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
12절을 보면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그레스게, 디도, 두기고는 바울의 파송으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레스게는 성장한다, 디도는 공경한다, 두기고는 행운이라는 뜻입니다. 세 사람 모두 이름 뜻이 좋으며 데마처럼 세상을 향해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 마가
11절 하반부에 한 사람 더 이름을 언급합니다. 마가입니다. 마가는 망치라는 뜻입니다. 망치인데 “큰 망치”란 뜻입니다. 저희 시골에서 큰 망치를 오함마라고 했습니다. 오함마가 뭔가 찾아보니까 일본식 발음입니다. 일본어로 크다는 “오”라고 하고 망치는 영어로 해머입니다. 해머를 일본어 함마로 발음했습니다. 오함마 잘 쓰면 유익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잘 못쓰면 무기처럼 쓰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는 마가를 복음역사에 유익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지금 유익하면 과거 무익할 때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언제죠?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고자할 때 바나바와 바울이 대판 싸우고 각자의 길로 가는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이 마가입니다. 마가는 선교여행에 동행했다가 힘들어서 예루살렘 집으로 간 전적이 있습니다.(행 12:25; 13:5, 13).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와서 지금은 복음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가의 과거 잘못한 행동에 대한 배신감을 계속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오픈 마인드가 있어야겠습니다. 비록 망치로 친 것과 같은 충격을 주고 떠났어도 언젠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유익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보에게 부탁한 것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드로아는 청년 유두고 사건이 있었던 도시입니다. 유두고는 말씀을 듣는 중간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었는데 사도 바울이 다시 살린 청년입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곳이 드로아입니다.(행20:9)
가보는 이때 집도 개방하고 짐도 맡아준 사람입니다. 바울이 어떤 책을 가져오라 했을 까요? 무협지는 아니었겠죠? 바울이 찾는 책은 손 떼 뭍은 신앙 서적이고 가죽 종이에 쓴 것은 구약 성경입니다. 겉옷은 염소 가죽으로 만들었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썼습니다. 로마 감옥이 추워 겉옷이 필요했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경계
14절~16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위기 상황입니다. 옆에 동역자라도 있으면 위로를 받을 수 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바울을 버렸습니다. 심지어 물어 뜯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인데 그를 주의하라 합니다. 주의하라는 “조심(ware)하다. 수비하다, 막다.(guard)”란 뜻입니다. 권투선수가 가드를 올리고 방어한다는 뉘앙스입니다.
물어뜯는다고 우리도 같이 물어뜯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 하반 절을 보면 주님께 맡기라고 합니다.(참고:시편 62:12)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잠 24:12;마 25:21-46;롬 2:6;고후 11:15;계 2:23;20:13). 바울은 떠나간 동역자의 허물까지도 그들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1세기 복음역사를 섬기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수도 없이 넘겼습니다. 개인적인 고질병도 있었습니다. 주석은 간질이나 안질로 봅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호텔이 아닌 추운 지하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 후서를 처음부터 읽어보면 과연 바울이 참수형을 당할 사람인가? 춥고 배고픈 지하 감옥에서 편지를 썼나? 의심할 정도로 내용이 밝습니다. 영광, 생명, 기쁨, 능력, 은혜, 평강, 사랑 이런 표현으로 가득합니다.(딤후1;1,2,4 딤후1:7) 부끄러워 하지 않음(딤후1:12) 아름다운 것(딤후1:14) 승리자의 관(딤후2:5) 화평(딤후2:22)이 나옵니다. 바울은 마치 제대를 내일 앞둔 말년병장 같습니다. 고난이 많았던 세상을 졸업하고 천국에 막 입성하려는 개선장군 느낌입니다.
고난 속에도 넘어지지 바울의 넘어지지 않는 신앙 비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본문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바울 곁에 서 힘을 주었습니다.(참고:행23:11) 힘을 줌은 원어로 “엔뒤나모오”로 “권능을 부여하다. 힘세게 하다.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롬4:20)”란 뜻입니다. 주님은 마치 쇠를 풀무에 담그면 담글수록 강하게 되듯이 바울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 주는 목적이 말씀 전파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마치기까지는 사자의 입도 막아 줍니다.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본문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추가 내용이 있습니다. “The Lord will rescue me from every evil attack and will bring me safely to his heavenly kingdom. To him b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 예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The Lord will)가 담겨있고, 악들우 공격(attack)으로부터 구해 주며, 하늘 왕국(his heavenly kingdom) 으로 안전하게(safely) 인도한다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을 주님께서는 고난을 이기도록 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난 자체를 없애 주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엔뒤나모오”! 견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악들(every evil)의 공격에서 구해주십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보면 적들에 둘러싸인 형국입니다. 사단은 순간순간 공격해 들어옵니다. 두려움, 염려, 부정적인 생각 등 무차별 공격을 가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단의 공격에서 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왕국, 천국으로 안전하게 안착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이 주님께 모든 영광을 세세토록 돌립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 자긍심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 세상과 우주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아서 없애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듭니까?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또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방향을 틀어주는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딤후1:10)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 복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자부심 있어야 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 정체성을 가져야 겠습니다.
두 번째는 복음 역사는 궁극적으로 천국입성이요. 상을 받기위해 섬기는 역사입니다. 천국은 영어로 그가 다스리는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이미 우리 마음에 이루어졌습니다.(눅17:21) 또 후에 들어갈 소망이 있습니다. 상은 딤후2:10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구원자체가 상입니다. 딤후4:8절은 예비된 의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이 줄 상은 남과 비교하여 우위를 따지지않습니다. 개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절대적이고 가장 좋은 상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상 받는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천국에서 쪽박 차고 살면 어떡하나! 천국에서 나사로처럼 남의 집 대문 옆에 자리 펴고 앉으면 어떡하나?” 염려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성공이고 상입니다. 또 마10:42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했습니다. 마25:40절은 작은 자와 예수님을 동일 시 합니다. 냉수 한 그릇 섬김이 예수님을 섬긴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배에 온 것 자체가 냉수 한 그릇입니다.
끝나고 서로 손 맞잡고 따듯한 위로 인사 한 번 하는 것도 한 그릇입니다. 교회 오면 주보를 읽습니다. 그냥 읽지 않죠? 중보기도 하면서 읽습니다. 다른 성도를 위한 기도도 한 그릇 입니다.(딤전2:1) 그러면 오늘 도합 냉수 몇 그릇? 세 그릇 확보하였습니다. 주님은 상을 결단코(certainly) 잃지 않는다합니다. 예수님이 맹세했습니다.(마10:42) 교회 화장실 청소 냉수 5그릇입니다. 근거는 제 기준입니다. 저는 남자 화장실 청소 담당인데 잊기를 잘합니다. 잊지않고 열심히하여 꾸준히 냉수 확보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와 복음을 위한 냉수 한 그릇 수고 잊지 않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섬김도 귀하게 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설교원고(58)
성경참고구절
디모데후서4:9-18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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