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늘과 새땅
사도 요한은 계시록 21장부터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외부부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본문은 새 예루살렘 중 하나님 보좌에 대한 묘사입니다. 1절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수가 공급되어 영생 복락을 누립니다. 생명수의 강은 창세기 2장과 에스겔서47장이서도 나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물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와 사해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죽은 물들이 치유됩니다. 죽었던 모든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겔47:8)
사해
참고로 사해는 우리가 잘 알듯이 염분 농도가 30%입니다. 보통 바다는 5%인데 사해가 6배 높습니다. 사해는 죽은 바다(死海, Dead Sea)란 뜻입니다. 사해는 무좀, 습진 등 피부병에 탁월한 효과가있습니다. 사해는 해수면보다 300미터 아래에 있어 공기 함유량도 일반 지역보다 15%이상 높습니다. 기관지, 천식 환자들이 좋은 치료 효과를 얻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의 과거는 영적으로 사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살아났습니다.(마11:29 롬8:12 갈2:9)
생명수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해에 생명수가 부어진다는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성취되는 지를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명수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자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물 길러 올 정도로 영혼이 메말랐던 여인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성경은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표현합니다.(요4:28) 물동이는 요즈음 환경오염 주범인 플라스틱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서 비쌌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은 생명입니다. 물동이는 가정살림에 중요합니다. 물동이를 버리는 것은 가정생활을 마비시킬 만한 행동입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영적의미는 생명수 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여인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세상의 물로는 인간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강의 특징은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요한복음 7장37-38절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활동을 말합니다.
천국의 환상
2절을 보십시오. 생명나무가 강 좌우에 늘어서 있고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치료제로 쓰입니다. 창세기 3장22절의 생명나무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접근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길이 뚫려서 얼마든지 생명나무의 열매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겔47:12)
2절에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 풍성하고 다양함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현재만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에 전에 일어났던 십자가 구원 능력이 오늘 날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역사합니다.
3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저주가 더이상 없습니다. 본문은 스가랴 14:11절의 성취로써 저주는 죄의 결과입니다. 이는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의 보좌에 나아갑니다.
4절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곧 죽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등만 볼 수 있었습니다.(출33:20,23)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봅니다.
몇 일전부터 더위가 위력을 떨칩니다. 가마솥 더위, 살인적인 더위 등 용어도 살벌합니다. 저희는 에어컨 가동을 했는데 좋은 점이 있습니다. 에너지 절약 때문에 모든 방문을 닫고 거실에 모여있으니 아이들 얼굴을 보며 잘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각자 방으로 들어가 하루에 얼굴 한번 제대로 못볼 때도 있습니다. 더위가 나쁘지 않은 면도있습니다. 가족들 얼굴을 가까이 보게도 합니다. 요14:7 과 9절을 보면 예수님을 본 자들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 말씀합니다. 우리도 말씀 안에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매일 자주 항상 보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 하반부에 그분의 이름이 이마 안에 있다는 표현은 완벽하게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합니다. 5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만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합니다.(5)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앞으로 있게 될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 대하여 묘사한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은 앞으로 헌 하늘과 헌 땅이 된다는 뜻입니다.(계21:1) 벧전1:24절에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14절은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 함으로 우리가 헌 하늘과 현재 땅에 너무 연연하지 않도록 권면하십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그림자에 비유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땅속 동굴에 죄수 둘이 손발이 묶인 채 어릴 적부터 삽니다. 이들은 서로 얼굴은 못 보고 등만 맞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동굴의 벽만 봅니다. 이들 등 뒤로 한 줄기 빛만 들어오게 만들고 머리 위로 사람이나 동물의 인형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게 만듭니다. 이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들만을 실체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형들이 내는 소리도 실제 사람이나 동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동굴을 탈출한다면 자신이 일생 보았던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실체가 아님을 압니다. 자신이 실체로 여겼던 그림자의 원인은 태양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이 비유를 통하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 속에 갖힌 자처럼 사물의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며,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고, 사람들은 그것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살아간다합니다. 동굴을 나와 진실을 마주하기 전에는 참 실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참 실제를 이데아라하고 이것은 철인만이 알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플라톤 그림자 비유
저는 이 비유에서 우리 신자들은 영적으로 동굴 밖으로 나온 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인생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행동 경제학에서 하는 흥미로운 실험을 한 가지 소개합니다. 「최종제안게임」이라는 실험이 있습니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을 불러 놓고 한 사람에게 10만 원을 줍니다. 10만 원을 가지고 두 사람이 나누는데 다른 한 사람은 얼마를 주는가를 보고 거부할 권리를 줍니다. 다른 한 사람이 거부하면 10만원은 둘 다 갖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실험 참가자라고 생각해보십시오. 10만 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얼마를 주겠습니까? 경제학자들이 예상했던 정답은 경제성과 합리성에 따라 두 사람이 행동했다면 10만 원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1,000원을 주는 게 맞습니다. 99%는 자신이 갖고 상대에게는 1%만 제안하는 것입니다. 1,000원의 제안 받은 사람도 한 푼도 못 받는 것 보다는 1,000원이라도 받는 것이 경제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측입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대부분 5만 원 즉 50%를 주었다고 합니다. 3~4만원 즉 30~40%를 준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실험 결과는 사람들이 합리성과 경제성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공평성도 경제적인 행동 결정에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다른 조건을 주고 실험을 다시 합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게 했고 두 사람이 친분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합니다. 앞으로도 평생 얼굴 한번 안 봐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하고 관중도 없이 암실에서 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한 푼도 안 준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간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기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의 유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익을 다른 표현을 쓰면 힘의 원리를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할 당시의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남루하기 짝이 없는 시대입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고 경제적으로 파산하는 자가 속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을 가진 정치적인 메시야, 빵 문제를 해결해 줄 경제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정치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힘을 발휘하여 로마를 물리치고 무너진 국가를 재건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도 이런 소망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힘을 사용하지 않고 또 힘에 대항하지도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세세토록 왕노릇 함
5절에 우리는 세세토록 왕 노릇한다고 나옵니다. 세세토록은 계시록에서는 14번 반복하는 단어로 forever and forever 영원 영원히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왕 노릇이라는 대목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힘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타인을 움직이는 것을 상상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허리를 90도 굽히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움직이게 하는 갑과 을의 관계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왕 노릇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지만 말구유에 온 것과 같은 왕 노릇입니다. 인생들을 섬기시느라 머리 한 곳에 편히 두고 잘 잠자리 없었던 같은 왕 노릇입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시는 왕 노릇입니다. 세상 힘에 대항하여 힘없이 죽는 십자가를 통한 왕 노릇입니다. 성경에서의 왕 노릇이 이 땅에서 나타나는 표현 양식은 그 반대입니다. 자기를 비어 종처럼 낮아지는 것 입니다.(빌2:7)
결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깁니다. 다른 세상은 없다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많은 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합니다. 세상은 동굴 속 벽에 비추이는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이미 마음 속에 천국을 소유한 성도들의 삶의 양태는 어떠해야합니까? 왕 노릇인데 어떤 왕 노릇입니까? 섬기는 종의 모습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역설적인 왕 노릇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최종제안 실험처럼 99%자기가 갖고 1% 제안하는 삶이 아니라 아무 유익이 없어도 100% 다주는 것이 왕 노릇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천국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곳이 되길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요한계시록22:1-5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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