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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야곱과 레아와 라헬 사이에서 탄생한 12지파(창세기30:1-24)

by 명주(明珠) 2024. 7. 16.

본문은 이스라엘 12지파 탄생 배경입니다. 당연히 좋은 배경 하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죠? 그러나 오늘 본문은 기대와 다릅니다. 4 명의 여인들 시기, 질투로 12지파가 탄생합니다.



12지파의 시작은 야곱의 탄생부터입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택함을 받습니다.(창25:23)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염소 털 변장술을 이용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쟁취합니다.(창27:19-22)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동생을 죽여 복수하고자 합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20년 동안 무려 10번을 속입니다.(창31:41)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야곱



그중에 백미는 결혼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써먹었던 변장술에 똑같이 당합니다. 결혼 첫날밤에 변장한 레아를 라헬로 착각합니다. 어떻게 사랑했던 라헬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7년을 몇칠같이 여길 정도로 사랑한 사랑입니다.

야곱이 속았다는 것은 라반이 그만큼 치밀하였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면 라반이 야곱을 이렇게라도 하여 붙잡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야곱은 라반의 재산을 늘려 주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결혼 첫날밤 속은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더이상 속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반성하였으리라 추측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불철주야 성실하게 일합니다.(창31:38-40) 라반은 재산을 불릴 목적을 위해서 딸 레아를 수단으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심산입니다. 아니 그의 욕심 때문에 딸의 불행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속이기 위해 레아를 어떻게 준비 시켰겠습니까? 라반은 레아의 얼굴 뿐 아니라 몸 전체를 철저히 가렸습니다. 신혼 방을 최대한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물 샐 틈이 아니고 빛 샐 틈 없이 차단합니다. 라반이 동네 큰잔치를 연 것을 보면(창29:21절) 야곱에게 독한 술을 먹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독한 술은 폴란드 산 보드카라고 합니다. 알코올 도수 96도라고 합니다. 화기 엄금입니다. 술 먹다 화상 입습니다. 라반은 또 레아에게 철저히 “라헬처럼 말하고 라헬처럼 행동하라!”고 시켰을 듯합니다. 심지어 연기학원 원장을 초빙해 고액 속성 연기 과외도 시켰을지 모릅니다.

레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야곱의 사랑은 오로지 동생 라헬을 향해 있는 줄 뻔히 알았습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나오는데요. 시력이 안 좋다기보다는 눈매가 부드러운 여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창29:17) 당시 미의 기준으로 레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외모입니다. 요즘이었다면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야곱의 눈에는 차지 못합니다. 아버지인 라반도 레아를 저평가 합니다. 레아를 타인에게 보내느니 야곱에게 보내는 편이 낫다 합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을 과대평가합니다. 첫 걸음마를 다른 아이보다 일주일만 빨리 떼도 “천재가 아닌가!”생각합니다. 돌 잔치 때 연필만 잡아도 의사, 판사, 교수 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라반은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레아는 아비에게도 치이고, 야곱의 마음도 못 끌고, 동생 라헬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밖에 없는 비련의 여인입니다.

야곱과 라헬의 갈등



본문30장1절은 야곱과 라헬의 부부싸움으로 시작합니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습니다.(창29:17) 여성들은 10대부터 60대까지 좋아하는 남성상이 다 다릅니다. 남성은 다 똑같이 예쁜 여인을 좋아한답니다.

야곱과 라헬은 결혼 후 3년이 지났습니다.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은 유효기간이 18개월입니다. 최장 30개월이 마지노선입니다. 야곱 부부는 마지노선을 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식 4명씩이나 있는 언니를 시기합니다. 언니 레아는 이미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이미 낳은 상황입니다.(창29:31-35) 하나님이 경쟁에서 밀리는 레아의 심정을 헤아려주었습니다.

본문에 시기란 단어는 “얼굴에 붉은 핏발이 서릴 정도로 매우 흥분한 모습.”입니다. 라헬은 흥분의 화살을 야곱에게 돌립니다. 라헬은 “아들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2절에 야곱도 분노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되는가? 임신 못하게 한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말인가?"합니다. 성경 기록이니까 점잖게 표현한 듯합니다. 험악한 톤으로 말했겠죠.
우리 교회 형제자매님들은 부부싸움도 일 년에 한번 미만으로 하는 잉꼬부부들 인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 년에 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문화재급 부부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



3,4절에 라헬은 여종 빌하의 태를 빌어서 자식을 얻고자합니다. 당시는 자식이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습니다. 자식이 없으면 사람들로 부터도 무시 받고 하나님이 저주했다고 여겼습니다. 자식의 많고 적음이 곧 세상이 자기를 평가해 주는 잣대입니다.

본문에서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란 표현은 양자를 삼는 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나는 라헬 당신밖에 없다.” “Only you!" 하며 좀 멋있어지면 안 되겠습니까? 그도 못이기는 척 빌하에게 갔습니다. 5-8절을 보면 이렇게 얻은 두 명의 아들이 단과 납달리 입니다. 두 사람 이름의 뜻을 주목해 주십시오. 단은 “내 억울함을 풀어주셨다.”는 뜻이고 납달리는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뜻입니다.

한 핏줄인 자매끼리 억울하면 얼마나 억울하고 크게 경쟁해 이기면 또 뭐하겠습니다. 4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요. 이 문제를 초등학생들에게 냈습니다. 한 학생은 사촌이 땅을 사면 “가본다!”로 답을 썼다고 합니다. 4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지 말고 가보아야겠죠. 가보고 축하해줘야죠? 2촌인 라헬은 안 가봤습니다. 배 아파합니다. 억울해하고 경쟁심으로 잠 못 이뤘습니다. 라헬은 사랑도 외모도 다 가진 여인입니다. 그러나 경쟁심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4명의 아들들



본문9절에 레아는 아들 4명을 이미 얻었습니다. 첫째 르우벤을 낳고 자기의 괴로움을 돌아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29:32) 둘째 시므온을 낳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기의 심정을 헤아려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29:33) 셋째 레위를 낳고는 남편과 연합할 희망을 가졌습니다.(창29:34) 마지막 유다를 낳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이릅니다.(창29:35)

그러나 이 마음이 양자를 품에 안은 동생을 보자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얻는데 갓과 아셀 입니다. 이름은 복되고 기쁘다는 뜻입니다. 아이를 얻은 후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이이 갖기 전에는 레아의 마음이 저주스럽고 슬펐다는 뜻으로 유추합니다.

레아와 라헬의 대립


본문30:14-21절은 레아와 라헬이 대립합니다. 밀 거둘 때에 레아의 첫아들 르우벤이 합환채를 엄마에게 선물합니다. 한자 뜻은 합할합(合) 기쁠환(歡) 나물채(菜)입니다.(아가7:13) 합환채는 여인이 아이를 갖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잎은 우리나라 쑥갓 잎처럼 생겼고 뿌리는 감자처럼 생겼습니다. 밀 추수 때에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왔습니다. 밀 추수 때는 5월 초순인데 10월에서 4월까지가 우기(雨氣)입니다. 5월 초는 우기 때 충분한 수분을 먹고 식물들이 활발히 자라나는 시기입니다.

당시 르우벤의 나이는 6세로 추정합니다. 어린 르우벤의 눈에도 두 자매간의 경쟁을 알아차릴 정도로 심합니다. 가제는 게편이라고 르우벤도 주위에서 좋다고 하니 영문도 모르고 합환채를 구해 엄마에게 선물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라헬이 보았습니다.

본문14,15절에 라헬이 합환채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아는“남편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아들의 합환채까지 빼앗아간다.”며 언성을 높입니다. 남편까지 빼앗겼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상황을 확대합니다. 상처가 깊으면 별 의미 없는 타인의 말에도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라헬은 합환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을 하룻밤 넘겨주기로 하고 기어코 합환채를 손에 넣습니다. 이렇게 하룻밤 사랑을 얻은 레아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까지 하루 종일 야곱을 기다립니다. 사실 남편에 대한 갑은 첫 부인인 자신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에 밀려 어쩌다 을의 입장에 살아갑니다. 레아는 처량함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레아에게 태를 열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레아의 닫혀 있던 태를 엽니다. 아들 2명을 주는데 이름은 잇사갈과 스불론이고 딸을 주는데 이름은 디나입니다. 그런데 레아의 남편에 대한 집념도 대단합니다. 스불론 이란 이름에는 “이제는 남편이 자기와 함께 살 것”이라는 희망을 담습니다.(창30:20절)

합환채를 놓고 언니와의 대결에서 실패한 라헬은 마음이 매우 낮아 진 것 같습니다. 22절을 보면 드디어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고 소원을 들어줍니다. 아이 못 낳는 부끄러움을 씻어줍니다. 하나님은 라헬을 끝까지 생각했고 그녀의 기도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라헬이 마음고생 끝에 얻은 아들이 그 유명한 요셉입니다. 요셉이란 이름의 뜻은 “또 다른 아들을 더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야곱과 아내들



이상으로 본문 내용은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굳이 주인공을 뽑으라면 누구 같습니까? 라헬 같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뭇 남성들이 좋아할 외모를 가진 라헬입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레아가 주인공입니다. 성경은 라헬을 불신앙으로 슬피 우는 어머니의 표상으로 기록합니다.(렘31:15-16). 마2:18절에서 예수님의 탄생 후 헤롯의 시기로 2살 이하의 어린 생명이 모두 죽는 사건을 라헬이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에 비유한 내용도 있습니다.

생모 자녀(출생순서)
레아 르우벤(1) 시므온(2) 레위(3) 유다(4) 잇사갈(9) 스불론(10) 디나(딸)
빌하 단(5) 납달리(6)
질바 갓(7) 아셀(8)
라헬 요셉(11) 베냐민(12)

12지파 계보

라헬


 
라헬의 이름의 뜻은 어린 암양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들에서 키우는 암소입니다. 라반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 이름은 흰색입니다. 딸 이름을 들소라고 지었습니다. 또 레아의 히브리어 뜻은 “지쳤다.”란 뜻입니다. 딸 이름이 지쳤다가 뭡니까? 라반 흉보다가 지치겠습니다. 본문에서 약자는 들소의 여인 레아입니다. 레아는 인정받지 못했고, 사랑받지 못했고, 저평가 받았습니다. 이 레아가 구속사적 관점에서는 주인공입니다. 레아에게서 이스라엘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시작되었습니다. 레아에게서 이스라엘 왕손의 조상인 유다가 출생합니다. 이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이윤추구가 가능합니다. 개인과 기업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상처를 주고 받고 합니다. 야곱의 가계 스토리는 마치 현 세상의 축소판 같습니다. 하나님은 레아, 라헬, 빌하, 실바의 태를 닫기도 하고 열어 주기도 합니다. 야곱이 양과 염소를 얻도록 돌연변이를 일으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도와 주기도 합니다. 이들의 고통을 돌아 보아 주고 소원을 들어주고 위로도 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이스라엘 12지파가 탄생했습니다.


세상 속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외모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전혀 먹히지 않는 외모셨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흠모할만한 점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갖은 멸시와 징벌을 당했습니다. 결국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 때문에 진흙탕 인생 우리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가장 위대한 복인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갈2:20을 마지막으로 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산다는 표현은 원어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보다는 우리의 믿음은 비록 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간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와 허물과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이 목적한 신 바대로 선한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므로 우리는 인기가 있든 없든, 소유가 많건 적건, 많이 배우던 적게 배우던, 혈통과 출신에 관계없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뭘 못했다고 주눅들 필요 없고 뭔가를 잘했다고 자랑할 거리도 없습니다. 4여인의 경쟁 속에서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세운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하늘나라 가기까지 기어이 인도할 줄 믿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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