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12장1-24절은 베드로 사도가 주인공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AD44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후 11년째입니다. 초대교회가 탄생하고 이방 땅에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첫 이방 교회가 안디옥 교회 입니다.(행11:22)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말씀 역사를 힘입어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여행을 떠나고자합니다. 1차 선교 여행은 AD46년부터이고 오늘 본문은 AD44년입니다. 2년 전 상항입니다. 이때 사단은 헤롯 왕을 통해 교회를 박해합니다.
본문 1,2절에 헤롯은 야고보를 칼로 죽입니다. 본문의 헤롯은 유대의 3번째 왕입니다. 아그립바 1세입니다. 헤롯은 로마에 유학하면서 황제들과 친분을 쌓습니다. 그는 이 친분을 이용해서 2번째 왕인 삼촌을 쫓아 냅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압제를 합니다.
헤롯 대왕의 최후
오늘 본문 20절부터 23까지는 헤롯의 최후를 기록합니다. 21절에 헤롯은 날을 택하여 단상에 앉아 연설을 합니다. 은으로 장식한 빛나는 옷을 입습니다. 연설 날은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를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일 입니다. 운동 경기도 있었습니다.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헤롯은 전쟁 승리 기념 연설을 합니다.
22절을 보면 백성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하며 환호합니다. 헤롯은 군중들의 환호 소리에 취해 자기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양 착각합니다. 23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벌레에 먹혀서 죽게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멀쩡했던 그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합니다. 복통호소 5일 만에 죽습니다. 그리고 몸이 썩자 많은 벌레가 나왔다고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는 대적하시되 겸손한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야고보는 요한의 친형입니다.형제가 같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습니다. 한 집안에 아들 둘 다 취업, 학업, 가업, 결혼, 부모까지 내팽개치고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섭니다. 혹시 아들 두 명을 두신 부모님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야고보와 요한 여러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이들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는데요. 배를 여러 대 소유한 선주였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유지였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하면 조선업의 CEO입니다. 아마 갈릴리 시의원 대표까지 맡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형제들 집에는 종들도 있었습니다.(막1:19-20) 아버지는 자신의 가업을 물려받을 두 개의 기둥처럼 아들을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이 안드레와 어울리더니 형 야고보와 함께 집을 나갔습니다. 세베데는 이 모든 상황이 요한이 안드레와 어울렸기 때문인 것으로 오해하고 안드레를 평생 미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자 두 아들이 집 나간 지 3년째 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물고기만 열심히 잡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들고 옵니다. 그 날 따라 몇 마리 인지 세어 가지고 옵니다. 153마리입니다.(요21:2,11) 이상한 일이라여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아들은 또 집을 나갑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후입니다. 그리고는 11여 년을 잘 살아가고 있겠지 했는데 시신으로 돌아옵니다. 머리가 잘린 끔직 한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 해보았습니다. 복음역사는 당사자들 뒤에 부모들의 가슴 아픈 사연도 숨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합니다. 우리는 묵묵히 복음 역사에 자식을 내어준 부모들의 희생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야고보의 순교
본문 2절에 야고보는 12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됩니다. 야고보는 수제자 그룹입니다. 수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항상 동생 요한에게 밀렸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요13:23) 야고보는 이런 요한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본문도 야고보를 소개하는데 앞에 요한의 형제랍니다. 그냥 야고보라고 해도 다 압니다.굳이 요한의 이름을 빌릴 필요가 없잖습니까? 야고보는 둘째가는 서러움의 대표자입니다. 둘째의 서러움 겪는 분들 많으시죠?
야고보, 요한 형제는 성격이 매우 급합니다. 예수님은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입니다.(막3:17) 이들은 전도 여행 때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은 사마리아인 마을에 불을 내려 멸해 달라고 요청합니다.(눅9:52-54) 그 후 그는 변하여 저주했던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들고 갑니다.(행8:25)이번에는 저주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이 내리게 하는데 힘썼습니다. 우레와 같은 야고보의 성격을 하나님께서는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야고보가 첫 순교를 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 요한을 제치고 헤롯이 제거해야할 첫 번째 인물로 꼽힐 만큼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종 해방 운동도 했을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종은 당시 유대인들이 소유한 노예입니다. 야고보는 낮은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이런 그를 당연히 유대인들이 싫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를 고소했던 사람이 야고보가 체포되고 죽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의연한 용기와 자제력을 보고 자신도 회개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야고보 뒤를 이어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3-4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자 인기가 급상승합니다. 그러자 다음으로 베드로를 잡아 가둡니다. 유월절이 지나서 죽이고자 합니다. 유월절에는 전 세계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많은 예배객들이 모입니다.(요6:5) 이때 베드로를 처형하여 정치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 합니다.
베드로의 세번째 투옥
베드로의 투옥은 세 번째입니다. (행4:3 행5:18) 천사의 도움으로 베드로는 탈옥한 경험이 있습니다. 헤롯 입장에서 베드로는 탈옥 전문범입니다. 이번에는 탈옥할 수 없게 손을 썼습니다. 두 손목을 쇠고랑으로 채우고 양 옆에 두 명 그리고 철문 밖에 두 명의 파수꾼을 세웁니다. 파수꾼 4명을 1조로 한 4개조를 편성하여 24시간 지켰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 잡아 두려고 군인 16명을 동원합니다.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하게 지켰습니다. 베드로가 탈옥할 확률은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확률과 같습니다. 우리가 월드컵 우승할 확률은 0.2%라고 합니다. 베드로 탈옥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북미정상회담에 경호 군인이 구루카 족이라고 합니다. 구르카 족 군대는 세계최고의 용병이라고 합니다. 2010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구르카족 출신인데 퇴역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저같이 전역한지 30년 가량 되는 예비군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구르카 출신 예비군이 기차 여행을 하는데 인도 괴한 50명이 한 소녀를 둘러싸고 성폭행하려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50대1로 싸웠습니다. 구르카 출신 예비군이 이겼습니다. 인도 괴한 3명을 죽이고 8명에게 큰 부상을 입히면서 소녀를 구했다고 합니다. 당시 헤롯도 아마 파수꾼으로 구르카 용병 같은 자들을 뽑았을지도 모릅니다.
철통 감시를 받던 베드로는 많은 군중들 앞에서 참수형을 당해야하는 상황에서 첫날 밤을 맞이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헤롯 정권 타도를 외쳤습니까? "죄 없는 자를 잡아 가두는 헤롯 정권 물러가라! "하고 데모했습니까? 아니면 유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고 있었습니까? 그는 곤히 잤습니다.
감옥에 갖혀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베드로
6,7절을 참고합니다. 잠은 2가지 종류가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선잠이라고 말하는 REM수면과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자는 비렘(Non-REM)수면이 있습니다. REM수면의 영어 약자를 그대로 옮기면 “급속 안구 운동 수면(Rapid eye movement sleep)”이라고 합니다. 렘수면 때 안구가 빠르게 운동을 하는 가봅니다. 이때 주로 꿈을 꾼다고 합니다. 보통 90분 간격으로 렘수면과 비렘 수면을 왔다 갔다 하며 잡니다. 베드로는 렘수면이 아니고 비렘 수면 즉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죽는데 꿀 잠을 잡니다. 천사가 깨워서 밖에 데리고 나가려고 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천사도 화가 났습니다. 옆구리를 발로 찼습니다. 본문 7절에서 천사가 옆구리를 쳐 깨울 때 쓰인 “쳐”라는 단어는 원어로 “파타쏘”인데요. UFC 경기 때처럼 “때려눕힌다.”는 뜻입니다. 혹은 “죽인다.”라는 표현에 쓰이는 단어랍니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짐작 갑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깊이 잤습니다.
8절에 보면 천사가 깨우고 나서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했고 겉옷까지 입으라 합니다. 베드로는 몸을 조이는 허리 끈, 신발 끈도 풀고 겉옷까지 벗고 편히 잤습니다. 죽음의 공포로 불안에 떨다 선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내일 참수당할 사람 맞습니까? 그는 참수 당한 야고보의 시신도 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Non-REM수면을 취합니다. 베드로는 무딘 사람입니까? 아니면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잠 못 자서 죽은 한이있는 사람입니까? 내일 죽는데 천사가 출장 와 발로 차 깨울 정도로 깊이 잤습니다.
이것은 죽음도 초월한 베드로의 깊은 신앙심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기 한 목숨 부지하려고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3번 씩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마26:74)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달라졌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선한 주권과 손에 맡겼습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떠 넘깁니다.(벧전5:7)
예수님의 평화
막4장37,38절을 보시면 오늘 베드로의 잠과 아주 비슷한 잠을 주무신 한 분을 소개합니다.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의 큰 광풍은 속된 말로 미친바람입니다. 배도 같이 미쳐서 흔들렸습니다. 곧 뒤집히거나 가라앉을 기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친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무셨습니다. 베게까지 챙기셨습니다. 하늘을 이불로 덮으시고 곤히 주무셨습니다. 베드로는 숨넘어갈 듯한 목소리롤 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물이라도 한 바가지 퍼내 주시지 잠만 주무시는 예수님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깨어난 예수님은 고생했다는 위로의 말은커녕 믿음 없이 무서워한다고 책망했습니다.(눅8:25)
예수님은 어떻게 곤히 주무실 수 있으셨을 까요? 물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골1:16)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 “나도 무서워 죽겠다.”하시면 하나님이 아니신 거죠? 그러나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미친바람이 일으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 믿음입니다. 죽어도 살리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이 예수님은 죽어서 3일이 지나 냄새나는 나사로도 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요11:11)죽은 회당장의 딸도 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막5:39)
히브리서 2:15절은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신 목적을 말합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말합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죽음을 다른 시각으로 봅니다. 죽음을 잠으로 봅니다(마9:24, 막5:39, 눅8:52).
두려움의 원인과 해결 방법
그러면 지금부터 무서워하는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미이라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몇 백구씩 발견된다고 합니다. 미이라는 망자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듭니다. 왜 살아나기를 바라냐 하면 우리는 미워했던 사람이 죽으면 혹시 자기 때문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무의식속에 자리하게됩니다. 죄책감은 인과응보적인 생각으로 바뀌어 살아가면서 벌받게될 것이라는 두려움이됩니다. 벌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기 위하여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미이라를 만든다고합니다. 장례문화에 보면 상을 당한 친족들은 거친 베옷을 입고 새끼줄을 허리에 두릅니다. 서양은 검은 양복을 입거나 베일로 가립니다. 이것도 죽음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겨서 자기에게 형벌을 가해서 망자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화를 모면하려는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충일 날에 보면 군인들이 하늘을 향해 총을 쏩니다.
인디언들이 장례식 때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망자들이 하늘에서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까봐 두려워서 얼씬도 못하게 방어하려는데서 생긴 문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없습니다. 모두 사단의 속임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영혼이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에서 몇 가지 장례문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죽음하면 두렵고, 악하고, 부정하고, 형벌의 의미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죽음 친화적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마9:24, 막5:39, 눅8:52). 죄와 죽음은 어디로부터 왔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결과입니다.(창2:17) 성경에서 “죽었다. 살았다.”는 표현은 단순히 “육체가 죽었다. 살았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지옥 불 못을 향해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죽었다라고 표현합니다.(마8:22) 반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산자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생입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천국을 향해가는 자들은 육체의 죽음이 잠에 불과합니다. 안방에서 거실로 옮겨 가듯이 잠에서 깨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옮겨갑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3,4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라고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은 자들은 세상 광풍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죽음 친화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하면 잃을 것이요 잃으면 살리라고 하십니다.(눅17:33) 사도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스패포드 예화
새 찬송가 413장을 작사한 스패포드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는 미국 시카고에서 잘나가는 변협의 사장입니다. 대학 교수였고 전도자 무디의 친구입니다. 무디교회 재정과 주일학교 교사도 맡았던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서운 광풍이 몰아닥쳤습니다. 1871년10월8일에 시카고 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대 화제 때 스패포드는 모든 재산을 잃습니다. 설상가상 급성 전염병 피부염으로 아들마저 떠나 보냅니다. 스패포드는 인생의 광풍이 닥치자 가족들과 함께 휴식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유럽 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때 마침 무디교회에서 유럽 집회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집회도 섬길 겸 유럽으로 가는 배를 가족과 함께 탔습니다. 공교롭게도 뉴욕 항을 떠나기 몇 분 전에 스패포드는 급한 일이 있어서 내립니다. 아내와 3명의 딸만 보냅니다. 불행하게도 이 배는 1873년 11월15일 항해 후 7일 만에 철갑선 라키호와 정면 충돌합니다. 배는 12분 만에 가라앉습니다. 226 명이 죽고 47 명만이 살아 남습니다. 딸 3 명은 죽고 부인 혼자만 의식을 잃은 채로 구조됩니다. 정신을 차린 부인이 이 상황을 스패포드에게 전보로 전합니다. 부인이 걱정된 스패포드는 급히 배를 타고 아내에게 향하는데요. 바로 그 대서양 사고 해역 위를 지나가게 됩니다. 딸들이 수장된 바다 위를 지난다는 선장의 말을 듣고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배 한 켠에서 홀로 하나님께 고통의 기도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열왕기하4장26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는 평화가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왔다고 합니다. 이 평안을 가사로 적은 것이 새 찬송가 413장입니다. “내평 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평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하고 노래합니다. 이 찬송은 가장 평안한 가운데 쓴 찬송이 아니고 가장 불행애햐 할 상황에서 썼습니다. 스패포드는 하나님이 주는 위로로 슬픔을 극복했고 후에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선교에 일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초대 교회
본문 5절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갇히자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간절했습니다. 12절을 보면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성도들은 한 마음 한뜻으로 마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루카 용병같이 개미 한 마리 접근할 수 없이 지키고 있던 파수꾼을 잠재우셨습니다. 굳게 잠긴 철수갑과 철문도 여시고 베드로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출하셨습니다.
풀려난 베드로를 본 성도들의 반응
본문 13절에서17절은 감옥을 나온 베드로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입니다. 베드로를 보았다는 로데를 미쳤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베드로가 아니고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구출을 위해 기도했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반신반의한 분도 있었던 듯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빌4:6) 그리 아니하시면 그리 아니하시는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기도 응답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본문에서 교회는 야고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와 야고보는 급이 달라서 차별 대우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고보가 갇혔을 때도 교회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야고보는 순교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롬8:28)하나님은 상황에 관계없이 당신의 뜻을 주권적으로 이룹니다.
설교원고(55)
성경참고구절
사도행전12:1-24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18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19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헤롯이 죽다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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