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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함께 가고 데리고 가는 여행( 갈라디아서 2장1~9)

by 명주(明珠) 2025. 1. 13.

 

1. 갈라디아서를 쓴 배경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방에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갈리디아는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같은 도시가 있는 큰 지역을 말합니다. 갈라디아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지역입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으려고 갈라디아 서를 썼습니다. 바울을 1차 전도 여행자로 파송한 모교회가 어디죠?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은 최초 이방교회입니다. 여기서 타칭 그리도인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직장이나 군대에서 너무 열심히 믿으면 비꼬는 투로 임목사, 정장로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 의미로 불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핍박 때 흩어진 성도들로 인하여 자생적으로 생긴 교회입니다. 교회가 커지자 예루살렘에서 바나바를 파송 합니다.

 

2. 교회와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과 성령님이다.

 

사도행전131절에 보면 안디옥교회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5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첫째가 바나바고 마지막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바울입니다. 이름순서는 어떤 순서로 썼을 까요? 가나다순, 알파벳 순 인가요? 저의 직장에는 명단 순서에 아주 민감 합니다. 실수로 후배 이름이 자기 위에 가있으면 항의 전화 받습니다. 밑에 이름이 있다고 숨을 못 쉬는 것도 아닌데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보통 가나다순, 직급 순으로 이름을 나열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헬라인들은 교회에 영향력을 얼마나 많이 미치는 순으로 이름을 적었습니다. 중요도 순으로 이름을 기록했다합니다. 그러면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다음 제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사울입니다. 특히 사울 앞에는 이란 단어가 붙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중요도가 미미하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그저 마지막 사람에게 묻어서 나온 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132절을 보면 1차 선교사로 바나바와 사울을 세웁니다. 성령님의 뜻으로 뽑힙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바나바가 빠지는 셈이됩니다. 중요한 사람이 빠지면 교회에는 어려움이 생기기 쉽습니다. 또 교회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있으나 마나한 바울을 뽑았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역사 망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온지 1년도 안된 초보를 보내고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십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빠지면 교회가 망할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선교에 보내면 망칠 것 같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작년 올해 우리교회는 직장, 결혼, 군 입대 등으로 교회를 떠나간 분이 열손가락을 넘어갑니다.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교훈을 참고하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3. 유대에서 온 할례파 그리스도 인

 

151,2절을 보겠습니다.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본문은 1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역을 잠시 떠났을 때 문제가 발생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본문에서 이름의 순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먼저인가요? 바울이 먼저인가요? 바울이 계속 먼저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은 비교조차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 바울이 먼저 나옵니다. 이제는 반대로 바나바 앞에 이 붙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잘 몰랐지만 이미 이방인의 사도로 예수님이 직접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의 은사가 드러났습니다. 이 바울 때문에 선교역사는 결코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적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들은 바리새파 유대인 개종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 행위인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미혹 받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성도들은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 그런 거 같아, 일리가 있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거는 어쩐지 쉽더라 했어. 바울 그 양반 어쩐지 못미더워 보이더라고. 벌써 외모부터가 그래.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매부리 코에다가. 어쩐지 좀 이상했어.” 하면서 넘어갔을 것입니다. 외모하고 진리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시는 자체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판결 받을 곳은 본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밖에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내서 최종 판결을 받자고 했습니다.

 

4.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다

 

바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14년 후에 다시 갔다고는 것은 14년 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한번 갔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3년 정도 아라비아에 있다가 바나바의 중재로 예루살렘에 가 베드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4년 후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바나바는 함께 갔다하고 디도는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아니 누구는 함께 가고, 누구는 데리고 갑니까? 차별하는 겁니까? 함께 갔다는 것은 당연히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데려 갔다는 것은 디도가 원하든 원치 않던 그가 뭔가 특별히 감당해야할 일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억지로라도 데려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3절에 나옵니다. “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방금 사도행전151,2절에서 예루살렘에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구원의 조건이라 주장했다 했습니다. 디도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증명할 사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할례를 안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증인이 디도였습니다.

 

5. 계시를 따르다.

 

2절을 보십시오. “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먼저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고 합니다. 계시를 따라 갔다는 것은 사람의 느낌을 따라, 감정을 따라, 인간적인 가치를 따라 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따라갈 때 결국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두 계시를 따라 교회 지체가 되었습니다. 계시를 따라 섭리 가운데 된 것입니다. 계시를 따르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계시를 따르는 삶, 말씀을 따르는 삶, 믿음을 따르는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유력하다는 것은 힘이나 세력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유력한 자를 말하지 않고 예루살렘교회에서 유력한자를 말하는데 야고보, 베드로, 요한 같은 지도자를 말합니다. 사사로이 했다는 표현은 바울은 이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방 가운데서 일어난 복음 역사를 증거했다는 표현이 사사로이 했다는 뜻입니다.

 

6. 위로자 바나바

 

오늘 말씀 제목이 함께, 데리고 갑시다.”입니다. 먼저 바울과 함께 갔던 바나바는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나바는 본명입니까? 별명입니까? 별명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436,37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위로를 잘했는지 위로의 아들이란 별명을 사도들이 붙였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때 재정이 가장 어려울 때 자기 밭을 팔아서 헌금한 사람입니다. 이름 앞에 바가 붙으면 누구누구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나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나바는 예언하는자, 말하는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인간적 말로 위로 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 교회 가난한 성도들을 물질로 위로를 준 사람이요 또 말씀으로 위로 준 사람입니다. 또 바나바는 11년 동안 무명으로 지내던 바울을 위로하여 안디옥 교회로 데려온 인물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그 문제 많은 마가를 끝까지 감당한 인물입니다. 마가를 감당하려고 2차 선교여행 때는 바울과 큰 다툼도 하고 헤어지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바울도 마가를 인정합니다. 바울이 로마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차가운 감옥 벽에 등을 기대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맞으며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으로 마가를 선택합니다. 마가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끝까지 감당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7. 특공대와 같았던 디도

 

이번에는 바울이 데리고 갔던 디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디도는 공경하다는 이름 뜻이 있습니다. 디도는 디도서14절에 바울과의 관계가 나옵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합니다. 우선 디도는 바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영적으로 참 아들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들과 같은 사람이니 데리고 간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면 디도가 사랑하는 참 아들이었으면 쉬운 일들을 맡겨야 하잖아요? 그런데 디도는 험지에만 투입합니다. 디도는 군대로 말하면 특공대 역할을 했습니다. 영적인 화재 진압군으로 쓰임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교회 분쟁의 한 가운데로 디도가 투입됩니다. 디도가 예루살렘에서 꿔다 놓은 보리짝 마냥 가만 있었겠습니까? 할례파들을 설득하고 복음을 변호를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고린도교회 문제 해결사로 투입이 됩니다. (고후8:23 고후12:18) 고린도교회는 구체적으로 말씀 안드려도 문 제많은 교회임을 아실것입니다. 10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디도를 보내서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디도는 디도서15절을 보면 어디에 남겨집니까? “그레데라는 섬에 남겨집니다. 그레데는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우리 제주도 보다 4배가 큰 섬입니다. 이곳 섬사람들은 기질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어떤 문제인지는 디도서에 잘 나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불순종, 가정을 무너뜨리는 사람들, 거짓말쟁이, 자기 배만 위하는 게으름 뱅이 등등으로 교회 문제를 묘사합니다. 디도는 바울이 여기에 남겨 두자 군말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8. 하늘을 향해 가는 순탄한 순례여행을 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여행의 묘미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명소라도 혼자가면 재미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좋은 사람 함께 가고 데리고 가야 여행의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늘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여행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바울의 함께 같던 바나바와 같고 디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들은 위로의 사람이었고, 험한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함께 가지 말아야할 사람, 과감히 버리고 가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4~5절에 나옵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조용히 엿보다가 자기들의 종으로 삼는 거짓형제들입니다. 거짓형제는 형제가 아닙니다. 이단입니다. 이단은 함께 가서도 안 되고 데리고 가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단이 나는 이단입니다.”라고 공표하고 활동하지는 않습니다. 가만히, 기회를 엿보는 전략을 씁니다. 요즈음은 전략을 바꾸어 대놓고 신분을 드러내 놓고 한다고 합니다. 이단이 종 삼으면 2가지가 일어납니다. 가정 파괴와 교회 분열입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헌납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 자칭 하나님의 수가 20명이 있답니다. 자칭 예수가 50명이랍니다. 500여개의 이단 단체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일도 일어납니다. 재림예수라고 했더 사람들이 뇌졸중, 심피어 폐렴으로 죽습니다. 그것도 여름에 폐렴으로 죽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본문에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시는 잠깐의 짧은 시간, 눈깜짝 할 시간입니다. 이단은 단 1초도 상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9. 받은 사명이 다르므로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

 

함께 가고 데리고 가려면 분명하게 선을 긋는 자세 필요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강력한 빛가운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눈이 3일 동안 멉니다. 그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받습니다. 이 사명을 받기 전에 먼저 바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도행전95주여 누구시니이까?”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른 체 일만하면 참 곤란합니다. 이러면 참 기쁨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들은 유대인, 바울은 이방인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사명 터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싸울 일이 없습니다. 비교할 일도 없습니다. 각자 주님 앞에서 잘하면 되는 겁니다.

 

10. 이단을 경계하자

 

함께 가고 데리고 가려면 먼저 손 내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9절입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 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방교회인 갈라디아의 문제를 본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서 모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계시받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목에 힘 꾀나 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나는 직통계시자야! 나를 무시하지마! 그러다 큰코다쳐~” 이러면 이단 교주가 탄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겸손히 예루살렘 본교회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상의했습니다. 그의 선교사역 중 총4번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친교의 악수를 청했습니다. 먼저 손 내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죽여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힐링이 아니고 킬링이라고 합니다. 킬링할 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일수록 함께 가기 쉬운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면 데리고 가기 곤란한 사람이 되고 걸림이 됩니다.

 

11. 사람을 세운 바울

 

결론적으로 바울은 어떻게 보면 일 중심 적인 사람같이 보였지만 아닙니다. 그는 바나바를 얻었고 디도와 디모데를 키우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세운 사람입니다. 복음역사에 돈, 좋은 건물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환경을 바꾸고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자세를 배워서 모두 함께 가고, 뒤 처지는 사람 없이 데리고 가는 한 해 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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