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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여호와로 힘입다.(사무엘상30장1-31절)

by 명주(明珠) 2025. 3. 10.

1. 본문의 시대적 배경

 

오늘은 다윗왕이 주인공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고 당시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어릴 때 아이들에게 꿈이 뭐야?”하고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꿈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대통령을 보았건 TV를 통하여 보았건 대통령의 힘과 권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없었던 유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다윗은 유대 광야에서 아버지 양 떼를 지키던 양치기 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사무엘이 어느 날 찾아가 왕으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BC1,010경입니다. 지금부터 335년 전입니다. 유대광야는 낮에는 4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10도까지 급격히 떨어집니다. 다윗은 이런 더위와 추위와 외로움을 달래려고 수금을 탔고 시를 짓던 문학 소년이었습니다. 수많은 하늘의 별들을 이불 삼아 덮고 양 문을 지켰습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시를 썼습니다. 다윗이 상대해야 할 동물은 사자와 곰이었습니다. 이들과 근접전을 하면 물리고, 찢겨 죽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물매 던지기 연습을 합니다. 손흥민 선수가 1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것이 슈팅 연습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1,000개를 빼놓지 않고 했답니다. 손흥민 선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하루에 1000번씩 물매 연습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양 떼도 지키고 무엇보다 목숨도 건져야 했습니다. 손에 피가 나도록 던지고 또 던졌을 것입니다. 다윗은 물매 던지기 세계신기록 보유자요 물매 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수금 타는 실력과 물매 던지는 실력으로 왕궁에 입성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윗은 물매 한 개로 3거구 골리앗을 눕히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금 실력으로 사울 왕의 악령에 병든 영혼을 달래는 궁중 악사로 졸지에 유대 광야에서 왕궁으로 입성을 합니다. 다윗이 왕궁에 입성할 때는 마치 왕이 다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후 11년간을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습니다. 이방 왕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연기까지 다윗이 할 줄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2. 다윗의 망명 중 왕국의 면모를 갖춘 시기

 

그러다 다윗의 망명 말년에 아둘람 동굴에 피신합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인격이 사람을 모을 만한 그릇이 된 것입니다. 400명가량 모였습니다. 이때 선지자, 제사장도 합류하여 왕국의 면모를 갖춥니다. 그래도 수천 명의 병사를 대동하고 추격하는 사울 왕을 대적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3.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에게 망명하다.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 뜻에 반하는 선택을 합니다. 외국으로 망명을 합니다. 당시 블레셋 아기스 왕 아래로 들어갑니다. 정착한 지역이 시글락입니다. 왜 아기스가 시글락을 주었느냐 하면 평지에 있으므로 감시가 쉬운 지역이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 휘하에 살면서 거짓말도 수시로 하면서 신임을 얻습니다. 그러다 아기스가 사울 왕과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4. 동족상잔 (同族相殘) 의 비극을 하나님이 막다

당연히 다윗 군대도 불렀습니다. 다윗은 졸지에 동족과 전쟁할 처지에 놓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날 위기에 처합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기스에게 신임을 잃어 백성들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전쟁에 참전하여 동족을 죽이자니 다윗은 앞으로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야 하는데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깁니다. 아기스 왕의 방백들이 반대합니다. “다윗 믿을 수 없다. 다윗 자기 조국과 싸우는데 우리를 배신하고 뒤를 치면 우리 다 죽는다.”라고 합니다. 이 반대 때문에 다윗 군대는 철수를 합니다.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 아니고, 아벡 회군입니다. 아벡에서 시글락은 3일 길이고 75km입니다. 다윗과 군대가 시글락으로 돌아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부터가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5. 시글락 약탈 당하다

 

1~5절입니다. 아말렉이 쳐들어왔습니다. 아말렉은 아스라엘이 출애굽 하자마자 공격한 민족입니다. 다윗이 참전했던 전쟁터 반대쪽에 위치합니다. 시글락의 아래 지방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사람들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싹 잡아갔습니다. 인명 살상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죽이지 않고 잡아간 이유가 뭘까요? 제네바 협정을 따랐을까요? 아닙니다. 단순한 경제 논리였습니다. 애굽에 이들을 노예로 팔면 돈이 되었습니다. 두 당 30 세겔을 받았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500,000원입니다. 연령, 성별, 외모, 건강 상태에 따라 차등하여 돈을 받았습니다. 상품이 상하면 가격이 내려가니 아말렉은 다윗 군대의 백성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여 데려갔습니다. 성읍은 불태웠고 잿더미만 남았습니다. 이를 본 600명의 장정이 하나둘씩 울기 시작합니다. 대장부는 잘 안 울잖아요? 왜냐하면 과거에는 남성이 가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강하게 보여야했습니다. 저희 50대 형제들은 잘 웁니다. 남성 호르몬 미달이라서 그렇답니다. 저 구석에서 한두 명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더니 마치 산불이 번지듯이 삽시간에 번졌습니다. 600명 장정이 칼을 팽개치고 통곡을 하면서 웁니다. 하도 울어서 기력이 없어져 소리도 안 나올 정도로 울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조상들이 울다가 망한 전력이 있습니다. 가나안 12 정탐꾼 사건입니다. 12명이 정탐한 후에 갈렙과 여호수아 빼고 10명이 가나안의 막강한 힘을 보고 와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합니다. 그러자 가나안 사람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원망 불평하며 울다가 40년을 광야에서 떠돌았고 결국 다 죽고맙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다윗 병사의 처자식 들

6. 다윗왕을 돌로 치려는 병사들

 

이들의 울음이 잦아들자 어떤 모의를 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그들의 슬픔이 이제는 분노로 돌변합니다. 저 한쪽에서 이거 다윗한테 뭐 문제 있는 거 아니야?”라고 하자 삽시간에 누구 책임이냐 하면서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모든 책임의 화살을 지도자에게 돌립니다. 돌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즉결심판을 하려 합니다.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율법에 돌로 쳐야 하는 죄가 따로 정해졌습니다. “우상숭배, 근친상간, 간음, 동성애, 안식일 범하는 거, 마법이나 점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돌로 맞아 죽을 짓을 한 거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 사실 아둘람 동굴 때부터 백성들 지극정성 돌봤습니다. 그가 유대 광야에서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 떼들을 지키듯이 목숨 걸고 돌봐 준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겁니다.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다 죄인이고 나도 나를 못 믿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 자신을 다윗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병사입장에서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군중심리의 부정적인 면을 봅니다. 군중심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못 하게 만듭니다. 요즈음 SNS 시대고 유튜브 시대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지속적으로 골라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충분히 편향된 군중심리에 휘말릴 수가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휘말리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동요됩니다. 불안, 두려움, 분노, 폭력적인 행동을 합니다. 익명성에 뒤에 숨기 때문에 책임감이 없어지니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에서도 군중들은 강도를 풀어주고 예수님은 십자가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할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찬양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교훈을 생각할 것은 "오늘날로 우리에게 아멜렉은 무엇일까? 우리의 마음을 다 빼앗아 가고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빼앗아 간지도 모르고 살게 하는 아말렉은 무엇일까?"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게 다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인지는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7. 위기 상황에서 다윗이 한 일

 

다윗은 믿었던 자들로부터 배반당하자 마음이 크게 다급해졌습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부인 이름을 특별히 거론합니다. 아말렉이 왕후들이라고 특별 대우 한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잡아갔습니다. 귀족이라고 더 큰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부인들이름을 기록한 것은 다윗도 같은 처지였음을 말해줍니다.

 

보통 지도자들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합니까? “왜 나만 갔고 그래?”하면서 책임회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왕권을 이용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주모자를 색출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의 자리는 책임지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책임지기 싫으면 지도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조선시대도 비만 안 와도 누구 탓으로 돌립니까? 왕 탓으로 돌립니다. 왕이 하늘의 뜻을 잘못 받들어 노했다 하고 기우제도 지냅니다. 지도자는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결정은 공동체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만큼  지도자는 신중할 필요도 있습니다.

 

다윗은 블랙리스트 안 만들었습니다. 책임 회피하거나 사람하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었습니다. 6절 하반 절을 보면 다윗은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라고 합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보면 은혜가 됩니다. 마음이 크게 다급할 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 쉽지 않습니다. 손발을 움직여 대책을 강구하기 쉽습니다. TF 팀을 꾸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보면 다윗은 자신만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양 똥 치우면서 왕이란 꿈조차 꿀 수 없던 환경에 있던 자를 왕으로 기름 부으신 하나님, 지금까지 갖은 고난과 고초 속에서도 늘 함께하셨던 하나님, 바로 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나만의 하나님에 대한 파이가 크면 클수록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평소 하나님과 친분이 없다가 다급해지면 나가기 쉽습니다. 다급하면 하나님 찾는 게 잘못된 거는 아닙니다. 당연히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손흥민이 슛 연습하듯이, 다윗이 물매 연습하듯이, 나의 하나님과 친밀감을 쌓는 것이 신앙의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도 나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치가 많은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 여호와를 힘입은 다윗

 

본문에 여호와를 힘입었다.” 했는데 여호와란 명칭은 삶의 현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별칭입니다. 다윗은 이 여호와 앞에 먼저 회개했을 것 같습니다. 사명의 땅을 버리고 외국 망명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너무 두려워 여호와께 묻지도 않고 외국행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가 현 상황으로 이끌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전장에서 3일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온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만약 늦게 돌아왔으면 잡혀간 처자식들이 애굽에 노예로 다 팔아넘겨 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강대국 애굽에 찾으러 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간다고 하여도 넓은 땅에서 처자식 찾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시글락에 군사를 남겨 놓지 않은 것도 하나님 섭리가 있었습니다. 100명이라도 남겨놨으면 아말렉이 이들과 전투를 벌였을 것이고 처자식들 몰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혜안도 얻었습니다.

 

본문에 또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라고 합니다. 용기는 그릇이 아니고 용맹한 기운, 강한 기세를 말합니다. 저는 힘입었다는 것을 실감 나게 전달해야겠는데 어떤 비유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우주복을 상상했습니다. 우주복 한 벌 가격이 100억이랍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33채 값입니다. 지구 밖 우주에 맨몸으로 나가면 압력 차이 때문에 1분도 못 버티고 죽습니다. 수분이 기체로 변해서 핏줄이 터져 죽습니다. 온도 차가 낮에 영상 300도 밤에는 영하 300도랍니다. 태양에서 오는 방사능도 생명에 치명적입니다. 이 방사능이 지구로 바로 들어오면 3일이면 지구상에 모든 생명이 죽습니다.  우주복을 입으면 이 모든 걸 막아줍니다. 우주복은 우주선 수준으로 만듭니다. 4,000조각을 이어 붙여 튼튼하게 만든답니다.

 

힘입는다는 것은 바로 이 우주복 입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이 제3의 힘, 전능한 힘, 초월적인 힘을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힘을 입을 때 두려움, 불안, 크게 다급한 마음 다 없어집니다. 용맹한 기운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라는 권면이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이 힘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고 입을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고 묵상하고 묵상한 바를 나누면서 이런 힘을 얻습니다. 또 묵상한 내용을 나누어야 기도의 입도 트이는 스타일입니다. 이런 방법이 1800년대 우리모임을 시작했던 죠지뮬러를 비롯한 형제님들이 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방법으로 힘을 입으십니까? 예배드리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개인기도 하면서, 성도와 교제하면서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다윗과 병사들과 같이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일을 많이 만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 힘을 입어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힘을 입으니 다윗은 조급한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향도 생겼습니다.

 

9. 아말렉을 추격하다.

 

 

7절을 보십시오.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옷이고 가슴에는 우림과 둠밈의 돌을 넣는 주머니가 있습니다. 우림은 빛이라는 뜻이고 둠밈은 진실이란 뜻입니다. 검은 바둑돌 흰 바둑돌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제비뽑기 하여 시각적으로 확인을 시켜주는 도구입니다.

 

다윗이 하나남께 물은 결과가 8절에 나옵니다. 지금이라도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도로 찾을 수가 있다는 결론이 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온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었던 600명의 장정이 하나둘 마음의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마음들이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600명이 장정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힘입고 사기가 충전하여 따라잡자!” 하고 외쳤습니다.

 

10. 200명의 군사를 브솔 시냇 가에 남겨 두다.

 

600명의 군사는 추격을 시작합니다. 25km 정도 추격하다가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인생이 한고비 넘겼나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600명 중에서 200명이 도저히 나는 못 가겠다고 하면서 뒤처졌습니다. 육체의 한계가 왔습니다. 75km 회군하였고, 진이 빠지도록 울었고, 25km를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이게 말이 됩니까? 전시에 이러면 총살감입니다. 군인이 피곤해서 나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전투에서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기입니다. 사기충천해도 승산이 없는 마당에 1/3이 낙오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에 총을 겨누고서라도 끌고 가야 합니다. 다윗은 200명은 남아 있도록 허락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따뜻한 인간애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역사를 섬길 때도 억지로 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은혜로 해야 합니다. 다윗 이렇게 허락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전쟁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다윗에게서 군사의 수는 단지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11. 병든 노예 병사 한 명을 치료하다.

 

다시 추격하다 사건이 또 발생합니다. 11~15절까지입니다. 죽어가는 손년 노예 병사를 만납니다. 병사와 다윗 일행은 그를 지나치지 않고 데려와 치료하고 떡을 먹이고 정성껏 돌봅니다. 지금 분초를 다투는 마당 아닙니까? 빨리 치고 나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처자식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 병든 병사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치료하지도 않았습니다. 순수한 인간애로 돌봅니다. 이게 바로 다윗 왕국이 예수님의 왕국의 예표라는 걸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다윗의 정신은 예수님이 양 99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랑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섬기는 정신과 같습니다. 죽어가는 이웃을 그냥 지나가지 않고 구해 내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나 한 사람 산다고 해도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셨을 겁니다.

병든 병사를 치료하다

헤르만 헷세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도서관에 수백만 권의 장서보다 나비의 날갯짓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짐짝처럼 버려진 노예 병사 한 명을 치료하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기운을 차린 병사가 전쟁에 승리를 주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를 배웁니다. 첫째 열린 마음이고 두번째 공감 능력입니다. 교회는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교회에 올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공감 능력입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요즈음 AI시대입니다. 인간의 공감 능력이 점점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인간애가 사라지는 위기의 시대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 중국에서 AI 로봇이 관중을 공격하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프로그램이 잘못 입력되어 사람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로봇하고 전쟁하는 시대 올지도 모릅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서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병든 영혼이 치료받습니다. 교회는 죄로 병든 영혼이 예수님을 통하여 치료받는 곳이지 일이 우선적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효율성, 합리성 추구하다 생명이 상처받아도 안 됩니다.

 

12. 대승을 거둔 다윗

 

소년의 인도로 16에서 20절까지는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아말렉은 먹고 마시고 새벽까지 춤판을 벌입니다. 다윗은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아말렉 병사가 무방비 상태가 된 후 기습하여 적을 쳐부숩니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은 추격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인간애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들은 전장과 떨어져 가축을 관리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다윗 일행은 기습작전으로 잡혀갔던 모든 사람을 되찾았습니다. 덤으로 전리품도 풍성하게 획득했습니다. 다윗은 잠시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방 땅 망명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실수도 선으로 바꾸어 처음보다 더 좋은 결과가 오게 하였습니다.

 

13. 전리품의 분배 문제

 

돌아오면서 200명을 남겨둔 브솔 시냇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21~25절까지입니다. 함께 갔던 자들이 남아 있던 200명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자고 합니다.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며 처자식만 돌려주자고 합니다. 전리품이 부족해서 이런 의견이 나온 게 아닙니다. 26에서 31절을 보면 600명에게 분배하고도 남아서 유다 13개 지역으로 전리품을 나눕니다.

 

14. 전리품을 공평하게 분배한 다윗

 

이들 의견에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23-25절을 보십시오. 골고루 나누게 합니다. 200명에게는 한 푼도 주지 말자는 인식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본문 20절을 보면 전리품을 몰고 가며 400명이 외친 말이 있습니다. 누구의 전리품이라고 합니까? “다윗 왕의 전리품이다.”하고 외쳤습니다. 다윗의 전리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리품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이름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자기 이름을 내세웠다가 망한 왕이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은 자기의 공덕비까지 세웁니다.

 

우리도 교회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높여지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 소유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처럼 아침 9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사람이나 포도원 문 닫기 1시간 전에 들어와서 일한 사람이나 공평하게 나누는 정신입니다. 다윗도 그렇게 나눕니다. 교회에서 일선에서 뛰는 사람이나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사람이나 다 공동의 노력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은혜가 골고루 잘 분배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메시지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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