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43-53절에는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을 기록했다.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당시 의학으로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다. 신하는 당시 무명의 목수인 예수님을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다. 예수님께 거의 죽게 된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한다. 신하에 쓰인 단어(바실리코스)는 왕을 가리키는 단어에서 파생했다. 그는 왕의 신하였다.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왕이 헤롯 안티파스였으니 신하는 그의 친척이거나 매우 가까운 귀족이었다.
원어에는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붙었다. 이는 병든 아들이 외 아들이었다는 뜻이다. 아이의 헬라어 원어는 “파이디온”으로 어느 정도 자란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왕의 측근으로서의 능력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죽어 가니 얼마나 안타깝고 절박했겠는가?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한탄하셨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하는 자기 아이가 죽기 전에 자기가 사는 집으로 내려와서 고쳐달라 간청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였고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갔다. 홀로 내려가는 도중에 종들에 그에게 와 아들이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나은 시간은 하루 전 7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때였다.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쉽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보지 않고 믿으려면 외부에서 눈을 띄워 주어야 한다. 성경은 믿음을 선물이라고 한다. 왕의 신하는 보지 않고 믿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내려가는 도중에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자는 왕의 신하가 말씀을 믿지 않았고 중간에 방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근거는 하루가 지난 후에 종을 만난 것처럼 기술했기 때문이다.
당시 왕의 신하가 말씀을 믿고 가야 하는 거리는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였고 40km쯤 되었다. 성인 남성이 걸어서 8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왕의 신하가 주님을 만난 시간은 제 칠 시 즉 오후 한 시였다. 그때부터 가버나움의 집을 향해 가던 왕의 신하가 종들을 만난 시간은 저녁이었다. 유대인은 해가 지는 시간이 다음 날의 시작이어서 본문에는 어제 칠 시라고 대답했다. 본문에서 내려가는 길에의 시제는 현재 분사이다. 왕의 신하는 지체하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이 죽어 가는데 중간에 지체할 시간이 있었을까?
보통 사람들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믿으면 보인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끊임없이 답하고 계신다. 신자는 왕의 신하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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