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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말씀 의미와 교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비유(엡2:10, 창1:31)

by 명주(明珠) 2024. 8. 30.

 
구약39권과 신약27권입니다. 1,189장과 31,102절입니다. 단어는 영어 성경 기준으로 791,328개입니다. 방대한 성경을 두 자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인자한 할아버지, 착한 일하면 선물 주는 산타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 4가지 방식 알아봅니다.
 
1.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
 
첫째는 에베소서2장10절
본문 “그가 만드신바”와 “지으심을 받은 자”는 개역한글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workmanship)”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저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허물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우습게 보지는 마십시오. 저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지지난 주일에는 시간을 잘못 보고 1시간 일찍 교회 차를 운행하러 나왔다가 도중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으로 다시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7시10분인데 8시10분으로 착각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는 창피해서 몰래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까울수록 허물을 잘 보기 때문입니다. 걸작품으로 보기보다는 “싹수가 노랗다.”하면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창세기 1장31절이 증거.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했습니다. 영어로 “It’s very good!”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는데 우리가 ‘노랗다.’ 고 판단 한다면 월권행위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감탄한 존재입니다. 지금 옆에 앉아계신 성도님 우습게보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드신 걸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작품 활동은 지금 도 ~ing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더 완벽한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중이십니다.
 
화가는 자기 작품에 대하여 심혈을 기울입니다. 물론 남자 화장실 변기 안에 케이크를 넣어 놓고 “소변기 케이크”란 이름을 붙이고 내놓는 현대 작가도 있습니다. 영국의 여성 작가인 트레이시 에민이란 작가입니다. 애인에게 실현 당하는 일을 겪고 나서 4일 동안 청소하지 않고 지낸 흔적을 전시했습니다. 전시물은 구겨진 이불, 지저분한 침대, 널브러진 휴지, 양말, 스타킹, 술병이 나뒹구는 모습을 그대로 전시합니다. 제목은 “나의 침대 my bed”였습니다. 이 작품 44억 원에 낙찰되었답니다. 이런 작품도 우리가 보기엔 다소 황당하더라도 작가들은 치열하게 생각하고 구상하고 고민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의 능력은 손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다.’라고 했습니다. 천지창조 그림은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입니다. 프레스코화란 기법을 썼습니다. 프레스코화는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물감을 빨리 칠하는 기법입니다. 화가들은 ‘프레스코 노역’이라고 할 정도로 힘든 작업입니다. 미켈란젤로는 20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곡선 천장에 조수도 없이 작업을 합니다. 완성하는데 4년 걸립니다. 밥도 못 먹고 씻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그림을 완성하느라 관절염, 근육통, 눈병까지 생겼습니다. 작업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벗으면 발이 퉁퉁 부어서 벗겨지지 않는 바람에 칼로 찢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를 예로든 이유는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대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크로키처럼 대충 스케치만 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최고의 작품이 되기까지 물감을 덧칠도 하고 긁어내기도 하며 심혈을 기울입니다.
 
2. 토기와 토기장이의 비유
 
하나님을 장인에 비유한 말씀이 많습니다. 토기와 토기장이의 비유.(롬9:21) 건축가와 돌의 입니다. 에베소서2:20-22절 참고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모퉁이 돌을 시작으로 함께 지어져가는 건물 곧 성전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목수 출신이시니까 나무를 많이 다루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돌도 많이 다루었 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집은 흙벽돌로 지어서 나무를 많이 사용하지않았습니다. 문헌은 예수님이 살았던 나사렛 근처 마을에서 대규모 건축공사가 있었다 합니다. 이름이 세포리스와 디베랴입니다. 예수님은 생계를 위해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이곳에서 돌을 다듬는 일에 참여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건축가와 돌에 관한 비유를 자연스럽게 합니다.(마7:24, 마21:42) 본문은 우리를 다듬지 않은 돌에 비유합니다. 원석은 가공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를 무생물에 비유했는데요. 우리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동물로도 비유합니다. 목자와 양입니다. 요10장과 이사야서에 많이 나옵니다.(사53:6) 양이 목자와 공존하려면 길들여 야합니다. 목자의 음성에 익숙해야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많이 못봅니다. 대관령 양떼 목장에서 돈 주고 보아야합니다. 우리의 주변는 양보다는 개를 많이 봅니다. 양 대신 개를 생각해 봅니다. EBS에 보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란 프로입니다. 여기에 출연하는 애완견은 제목과는 반대로 나쁜 개만 나옵니다. “히스테리의 여왕 루피, 말썽꾸러기 먹보, 침흘리는 겁쟁이 복실이, 상습 탈주범 새우, 아무데나 싼다 루피와 제니, 노인 학대견 단추, 외로움에 울부짖는 봉봉이, 외모는 귀족 행동은 망나니 망치” 가 주인공입니다. 이들은 주인과 한 방에 살 수 없는 막가파 개들입니다. 그런데 훈련사가 개를 훈련하면 신기하게도 순한 양처럼 됩니다. 훈련사는 훈련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대로 따라하게 한 후 일주일 후에 다시 방문합니다. 그러면 프로그램 제목대로 세상에 나쁜 개는 없습니다.
 
3. 목자와 양의 비유
 
우리는 이 비유에서 주인과 개가 한 방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훈련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개가 똥, 오줌 아무 곳에서나 싸면 주인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개는 훈련과정에서 다소 아픔이 있지만 해낼 때까지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은 훈련이 가능한 대상에게만 시킵니다. 개의 아이큐는 60, 까마귀 40,쥐는 20, 닭은 10입니다. 사마귀 6입니다. 물고기3입니다. 개미 아이큐 0.1입니다. 우리가 개미나 물고기를 훈련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교감이 가능한 특별한 존재요 영적인 존재요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본성 상 우리 죄와 허물을 용납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사람 대 사람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 비유합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눅10:22, 요17:2, 요3:35, 요5:20,눅11:11) 가장 유명한 비유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누가복음15장20절 참고합니다.
 
4. 돌아온 탕자의 비유
 
본문은 집나간 아들을 학수고대하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학수고대는 학이 목을 길게 빼고 아주 괴롭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기다릴 이유가 없는 아들입니다. 호적을 파내야할 이유만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유산을 미리 달라 합니다. 유산을 잘 활용해서 잘 살았으면 좋은데 허랑방탕(虛浪放蕩) 합니다. 나중에 탕자는 먹을 것이 없어 돼지 밥으로 연명합니다. 이것 마저 없자 굶어 죽을 신세까지 갑니다. 그에게 딱 하나 기다릴 이유를 찾는다면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다는데 있습니다.
 
본문에서 ‘측은히 여겼다.’란 의미는 아들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는 수백 미터 떨어졌지만 아들을 단번에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달려 나갔습니다.
 
동양의 풍습은 체통을 중요시합니다. 나이 많은 어른이 달려 나가는 것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버지는 품위, 체통 생각할 틈도 없이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에게 질문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너무 비장한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결혼 전에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하면서 정작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 매우 답답했습니다. 빨리 결혼하고 싶었는데 이유가 아버지 마음을 빨리 알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마음은 학원 다녀서 알 수 없습니다. 속성 아버지 학원 없었습니다. 늦은 33살에 결혼하여 35살에 첫째를 얻고 39에 둘째 얻었습니다. 아이들이 품 안에 들어올 때는 “나는 너희 들을 위해 충분히 죽을 수 있다.”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4살이 지나면서 아이가 서서히 부모에게 반기를 듭니다. 이때 신념이 약간 흔들립니다. 죽을 수 있다는 신념이 한 차례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 7살에 접어들면 이 신념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립니다. “내가 이렇게 말 안 듣는 넘을 위해 죽을 수 있나?”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런 고비는 한 번 더 옵니다. 중2입니다. 전문용어로 질풍노도의 시기입니다. 요즈음 이 시기 더 낮아 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으로 내갔습니다. 여기 계신 청년과 학생들은 이말을 듣고 부모님에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흔들림은 아주 잠깐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언제든지 자녀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죽을 각오로 일하고 지친 몸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한다는 말에는 어떤 수준을 요구한다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들아! 나는 네가 행복하게 만 산다면 불량배가 되어도 좋다!” 한 다 던 가 “너만 좋다면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도 좋다.” 이런 아버지가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많이 신경 써드려야 합니다. 아들이 수준에 못 미치면 아버지는 징계합니다. (히12:8)
 
5. 신랑과 신부의 비유
 
네 번 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비유합니다.(아가1장) 나아가 신랑과 신부로 비유합니다.(마9:15, 요3:29) 신랑과 신부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로 비유가 확대 됩니다.(엡5:25) 요한계시록 21:9절참고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가 깨끗하든지 더럽든지 아름답든지 추하든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질투심도 생깁니다. 상대방이 아무 사람이나 만나서 친절하게 해 주어도 멀쩡하다면 이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27절에서는 신부를 교회에 비유하면서 신부는 어떤 티나 주름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 4가지를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처럼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동물을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절대적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철두철미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큰 축복과 은혜입니다. (요한1서4:10,19)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신4:24, 히12:29)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적게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이토록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 안에 뭔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채워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만은 애간장이 다 타신다고 까지 하십니다.(렘31장20절) 호세아12장8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속에서 불탄다합니다. 우리가 어디가 예뻐서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왜 그토록 사랑하실까요?”하고 초등학생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엽기적인 답 중 하나가 “그러게 말입니다.”입니다. 다윗도 시편8:4절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144:3, 욥7:17, 히2:6)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 인간들의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는 어떤 커다란 공간을 자신 안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공간은 우리의 반응으로만 메워집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기쁘시고 우리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속에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DNA를 스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데 우리는 현실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분들은 찬송가 가사처럼 십자가의 그늘로 가야합니다.(새찬송가 415장) 롬5:8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이 사랑을 제대로 안다면 감사밖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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