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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은혜 아래의 삶(로마서6:1-14)

by 명주(明珠) 2024. 8. 23.

침팬지 실험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에서 실험을 합니다. 동물실험입니다. 침팬지가 수화로 자기 의사 표현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 하는 실험입니다. 15년산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습니다. 침팬지 수명은 30~40년 잘하면 50년까지도 삽니다. 그리고 아이큐는 70 정도입니다. 여기 계신 분 중 아이큐가 70 이하인 분은 없으시죠? 연구진의 각고의 노력 끝에 140개 정도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기초적인 의사 표현은 수화로 할 수 있었습니다. 침팬지가 수화로 한 첫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 줘! 바나나 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첫마디가 “나를 좀 놔줘!”입니다. “Let me out!"입니다. 침팬지에게도 자유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도 ‘죄에서 벗어났다. 사망이 다시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침팬지

모태신앙은 억울하다


모태신앙의 성도 자녀들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와 죄를 많이 즐기지 못했다는 원망을 할 수 있다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 저의 어릴 때 경험을 예로 들었습니다. 제가 6살 때쯤입니다. 이때 저도 한 개구쟁이 했답니다. 어머니가 하루는 새 옷을 사서 입혀 밖에 보냈는데 거지꼴이 돼서 들어왔답니다. 알고 보니 동네 아저씨들이 저를 칭찬하면서 흙탕물에 굴러보라고 했답니다. 저는 정말 잘하는지 짓인 줄 알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했다고 합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마치 새 옷 입고 흙탕물에 구른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 없고 오히려 감사 해야 한다 했었습니다.

연합의 의미


오늘 본문은 한번 다루었기 때문에 한 문장 한 문장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1-11절까지는 반복되는 세 가지 단어만 살펴봅니다. 첫 번째 단어는 예수님과 함께, 합하여, 연합입니다. 10번 나옵니다. (합하여란 말이 3번 3,4절 예수님과 함께란 말이 4번 4,6,8절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가 2번 5절 )두 번째는 죽었다 입니다. 내가 죽었다, 죽은 사람을 예사람, 옛 자아라고도 하는데요. 죽었다는 무려 16번 나옵니다.(2, 3, 4절 3번 장사 포함, 5, 6, 7, 8 9절3번 사망포함, 10절2번, 11절) 세 번째는 “알아라, 여기라” 입니다. 3번 나옵니다. (3,6,9절)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연합해서 죽고 새사람이 된 사실을 알고 그렇게 여기라는 것이 본문 핵심입니다. 이 죽음의 교리는 느낌의 영역, 경험의 영역이 아닙니다. 느낌, 경험이 없어도 알라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인식하라입니다. 본문 11절에 여기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한다.”가 사전적 의미입니다. 느낌이 안 와도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그렇게 여겨라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는 순간, 우리 몸이 가시적으로 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변화 산상에 예수님처럼 눈부시게 변하거나, 카멜레온처럼 피부가 바뀌거나 아니면 가슴에 구원이라고 지워지지 않는 글자를 새겨주시거나 하면 좋겠죠? 아니면 구원 증명서를 돌판에 새겨주시면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쪽에서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하도록 행하라고 하신 의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시지, 형식적인 것을 행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형식적인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로 책망도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형식적으로 반드시 행하라고 명하신 2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침례와 만찬입니다. 그래서 우리 명주로 교회는 침례와 만찬을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모입니다.

침례(세례)의 뜻



침례의 뜻은 오늘 본문 3, 4절에 나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의 세례는 침례로 번역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침례의 의미는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나도 같이 못 박혀 죽었고 장사 될 때 같이 장사 되었다가 부활과 함께 나도 부활해서 나는 이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의식입니다.


침례는 성경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신앙 고백적 요소가 있습니다. 침례를 구약에 3가지 사건과 연관 지어서 설명해 드려봅니다. 먼저 롬4:11절입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신칭의를 할례와 비교를 합니다. 인간 편에서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밖으로 보이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할례와 침례는 유사합니다. 할례는 우리 신체 포피 일부를 잘라 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신체의 극히 일부를 자르지만 결국 다 잘라 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소산물의 10분이 1을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제도가 있습니다. 드리는 1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립니다. 그 많은 것 중 가장 귀한 것 하나를 드린다는 뜻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상징입니다. 일부가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할례는 표피 일부를 자른다는 것도 나의 모든 것을 다 자른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면 이제부터 나는 나의 힘, 나의 의지는 다 잘라 내고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뜻만으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적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과 침례


다음은 고전10:1-2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홍해가 갈려져서 건넌 간 사건과 침례를 비교합니다. 홍해는 폭이 10km, 깊이 1,200m의 바다가 갈라져 200만 명이 마른 땅 같이 건너가고 뒤따라오던 바로왕의 군대는 몰살한 기적적인 일입니다. 현재 홍해 밑바닥에서 바로 군사 것으로 보이는 전차 바퀴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침례를 홍해를 건너간 사건에 비유하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침례 받은 사람은 홍해를 이미 건넜기 때문에 사단이 더 이상 건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곳이 어디입니까? 호텔인가요? 아니면 오아시스인가요?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까? 내 맘대로 행동했다가는 들짐승에게 잡아 먹히거나 목말라 죽거나 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혀주셔야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셔야 먹을 수 있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주셔야 마실 수 있고,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있어야 길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광야의 삶도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노아의 방주와 침례



끝으로 침례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합니다. 벧전3:20-21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침례를 노아의 홍수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노아가 홍수 속에서 건져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죄와 사망의 바다에서 건져져 예수님이라는 방주 속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노아의 방주도 내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는 구조가아닙니다. 방향키가 있고 노나 모터보트를 달려있지 않습니다. 노래처럼 이리저리 흔들흔들 하나님이 인도하는 데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할례, 홍해 사건, 노아의 방주,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내 맘대로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침례는 이제 나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의 의미가 강합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다짐이요, 공표가 침례 받는 행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침례 이후 신앙 실천


바울은 12절부터 내 맘대로 살지 않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여기서부터는 몸 교리입니다. 본문은 너희와 몸의 관계를 말합니다. 본문의 너희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인 너를 말합니다.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 새사람이 된 너희가 아직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죽을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를 짓고, 죄에 시달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사람 맞나 안 맞나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바로 내가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사단과 죄는 우리 죽을 몸에 역사합니다. 빌3:21을 참고하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본문은 현재 우리는 죽을 몸을 낮은 몸으로 표현합니다. 그 몸이 나중에는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증거합니다. 미래에는 그렇게 되지만 아직 현재적으로는 죽을 몸, 낮은 몸속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는 죄를 아예 안 짓는다는 의미 아닙니다. 이런 이단이 있습니다. 자기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 한 개도 안 짓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 교회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게 해준다고 유혹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의 죄의 지배는 소금에 배추가 절여지듯이 내가 아예 죄에 푹 절여져서 아무 갈등 없이 죄 가운데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소가 코뚜레에 끼워져서 끌려다니듯이 죄에게 완전 지배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가 아예 생각나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눌러앉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적극 살아야 합니다.

죄질 경향성에 대하여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달리 표현하면 죄질 성향, 죄질 가능성,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쉽게 저의 팔꿈치와 손끝을 예로 들겠습니다. 현재 제가 서 있는 가운데를 두진 영으로 나누고 왼쪽을 죄의 진영, 오늘 쪽을 의의 진영으로 가정합니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의의 진영에 팔꿈치가 있고 손끝까지는 죄의 진영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죄의 동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힘들게 노력을 안 해도 죄는 저절로 짓게 됩니다. 몸을 그냥 내버려 두면 노력 안 하고도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기울어진 손을 바로 세우고 있으려면 반드시 힘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독려하기 위해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




그 힘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12절 하반 절입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욕(邪慾)은 한자로 어긋날 사에 욕심 욕자 입니다. 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욕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 자체를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몸은 그 자체로 선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처럼 몸은 아예 나쁜 것으로 천시하여 죄를 막 지으면 안 됩니다. 몸은 그릇과 같아서 무엇을 담느냐에 다라 달라집니다. 내가 죄를 담으면 죄의 몸이 되고 거룩을 담으면 거룩한 몸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실 때 기본적인 욕구들을 주었습니다. 욕구들 자체는 육체의 생명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그것 자체로는 선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욕구가 있습니까? 심리학에서는 매슬로우라는 학자가 우리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눕니다. 첫 단계가 생리적욕구로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 활동을 말합니다. 그다음은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눕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욕구들은 그 자체로 선합니다. 배고프면 밥 먹는 거는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그 이상 사욕이 문제입니다. 사단은 사욕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욕구가 과하면 욕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1장26절은 이를 부끄러운 욕심으로 표현합니다. 음욕, 탐욕, 능욕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몸이 과하게 요구하는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바로 우리 몸에 유혹한다는 것 알아야겠습니다.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




그리고 13절부터는 더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13절 읽겠습니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쓰지 말고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지체는 우리 몸의 일부들이고 몸은 전체를 말합니다. 눈,코, 입, 손, 발, 생각, 상상 등등 유형, 무형의 지체를 말합니다. 이런 지체를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께 적극 드리라고 고합니다. 본문에 지체를 무기에 비유함에 영적인 의미는 세상은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총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입니다. 한눈팔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이 전쟁터에 군사로 부르심 받았다고 다른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런데 군사인데 늘 야전병원에 누워있거나 고문관 역할을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함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은혜 아래에서의 삶



끝으로 14절을 참고합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본문은 우리가 지체를 병기로 드린 결과에 대한 진술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 노력하면 죄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아래란 것은 영역, 영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법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와 닿게 해주는 예화가 없을까 찾아보다가 사형수의 예화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형법상 사형 구형할 수 있는 죄가 있습니다. 내란죄, 외환죄입니다. 외환죄는 외화반출 같은 돈과 관련된 죄가 아닙니다. 외국과 합작해서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죄입니다. 그 외에 역적죄, 간첩죄, 폭발물사용죄, 현주건조물방화치사죄가 있습니다. 용어가 어렵습니다. 현주건조물방화시사죄는 불을 놔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죄입니다. 그다음 살인죄, 존속살해죄, 강간살인죄, 강도살인죄 등이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상 사형집행은 사형판결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야 합니다. 법무부 장관의 명이 떨어지면 5일 안에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사형제도가 있지만 97년 12월 이후로는 중단되었습니다.

사형수의 고백


사형수들 수기를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들은 해가 뜨면 ‘아! 오늘 죽었구나’ 하다가, 해가 지면 ‘아! 오늘은 살았구나’ 한답니다. 이러면서 1년 365일을 매일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한답니다. 거의 하루살이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삶이 바로 이런 사형수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너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얼마나 엄격하냐 하면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만 품어도 살인죄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죄로 간주합니다. 이런 죄는 현행범으로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죽이는 즉결심판을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런 사형수가 오늘, 내일 죽을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이유 불문하고, 과거는 묻지 않고 무조건 사면해주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형수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안이 벙벙한 사형수는 감옥을 걸어나 올 때 아무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 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죄와 사망과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 상태가 바로 은혜 아래 있음입니다.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날짜가 가까이 오면 가까이 올수록 어떤 꿈을 제일 많이 꾸는지 아십니까? 죄짓기 바로 전으로 돌아가는 꿈을 제일 많이 꾼답니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그리고 돌아갈 수 있으면 하는 꿈을 꾼답니다. 그만큼 죄진 걸 절절히 후회합니다. 그만큼 사망이 두렵고 무섭습니다. 우리도 죄인인 채로 죽는다면 영원한 감옥, 고통의 감옥인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입니다 거기서 벗어나 은혜 아래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다른 표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가는 삶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인생이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지점까지 인도해 가실 줄 믿습니다. 노아의 방주 속의 삶이 과연 평안하기만 할 삶이었을까요? 동물이 35만 종입니다. 암수는 70만 종입니다. 이들을 먹이고 배설물 치우고 누가 했을까요? 노아와 노아 가족들이 방주 속에서 만만치 않은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서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참고구절
로마서6:1-14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1)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1)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1)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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