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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죄에 대하여 죽음 우리(로마서6:1-11)

by 명주(明珠) 2024. 8. 23.

“이탈리아의 수도에 혼자 종일 서 있다.”를 간단히 세자로 줄이면 무엇입니까? “로마서”입니다. 앞자리만 따서 “이혼서” 하면 유머 지수가 적은 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도둑을 맞은 책 제목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11년 전 기준 60억 부가 팔렸습니다. 호텔, 여관, 도서관, 군대 내무반까지 어디 가나 성경이 있으니 도둑도 많이 맞습니다.

성경은 1,800페이지입니다. 1페이지를 2분만 에 읽을 때 60시간이면 독파합니다. 성경을 시작하는 구절 창세기 1장 1절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고, 마지막 구절은 요한계시록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예수님으로 끝납니다.

구원에서 성령님의 역할



우리는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20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현재도 일어나게 역사하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과율의 법칙 속에 살아갑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불을 안 땠는데 연기나는 교리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보통 종교는 수행 과정을 거친 자력 구원입니다. 자기 노력 없이 믿음으로 받는 구원 교리는 실감 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신칭의 교리가 마음에 와 닿도록 잘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죄는 사해집니다. 과거에 진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질 죄까지 사해집니다. 미래의 죄까지도 미리 용서받았다면 이제는 죄와 싸우며 힘들게 신앙생활 할 필요없다는 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즐길만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즐긴다는 것은 새옷 입고 흙탕물에 구르겠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의미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란 말씀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방법으로 사선 그래프로 설명 해 봅니다. 죄와 은혜의 비례관계 그래프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X축, 은혜를 Y축이라 할 때 죄가 커지면 은혜도 비례하여 커진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죄를 과감하게 많이 지을수록 은혜가 커지니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 의미는 다릅니다. X축은 죄의 크기가 아니고 죄에 대한 민감도 여야 합니다. 죄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 예수님 용서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은혜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전에는 거짓말을 해도 양심에 가책이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거짓말도 크게 찔리고 찔린만큼 예수님 용서의 은혜는 커집니다. 사도 바울도 말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고백한 것은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작은 죄도 민감했기 때문입니다.(딤전1:15)

바울 당시는 영지주의자들이 유사한 주장을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지식을 숭상하는 산학체계입니다. 이들은 영과 육을 분리해서 보았습니다. 육은 더러운 것이니 영혼만 잘 보존하여 구원받으면 끝이라고 여겼습니다. 육체는 썩어질 것이니 죄를 맘대로 지어도 괜찮다고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의 열매가 쾌락주의입니다. 도덕, 윤리 폐기론입니다.

쾌락의 반대파가 금욕주의입니다. 육체는 가만두면 안 되고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주장하며 금식과 고행을 강조합니다. 무릎으로 기어 계단을 오르며 고행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했으니 하루 더해서 41일 굶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나친 쾌락주의 지나친 금욕주의 모두 비성경적입니다.

본문은 죄를 함부로 지으려는 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입니다. 2절에는 한 번 더 강조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죽었다는 말씀을 14번 반복합니다.

죄짓는 일이 즐거운가?


 
우리는 죽음의 교리를 전개하기에 앞서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죄가 그렇게 좋냐?입니다. 죄에 거함이 피가 되고 살이 됩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줍니까? 아니죠? 어두움에서 나와서 빛으로 옮겨왔는데 왜 자꾸 어두움에 거하겠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저의 어릴 때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한 개구쟁이 했다고 합니다. 누가 사탕 먹는 모습을 보면 그 사탕 입속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서 내 입에 넣어줄 때까지 생떼를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새 옷을 입혀서 밖에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새 옷은 어디 가고 진흙투성이를 하고 들어왔답니다. 마치 산사태 속에 금방 빼낸 아이처럼 해 왔다 합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동네 아저씨들이 “잘한다. 잘한다. 참 잘한다.”라고 하면서 저에게 흙탕물에 뒹굴도록 부추겼다 합니다. 박수받으니까 좋아하며 흙탕물에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매우 속상하게 했답니다. 죄에 계속 거함은 흙탕물에 계속 뒹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로마서2:9절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환난과 곤고 속으로 자꾸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우리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법에서도 피의자가 죽으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립니다. 소송할 이유도 없고 형을 받을 대상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죽은 분이 진 빚도 자식들이 반대하면 연계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바위를 올려 놓은 들 올라가 뛰어 본들 꿈쩍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상태가 이러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면 죄가 생각이 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아닙니다. 죄의 세력이 여전히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하여 죄가 없는 완전한 육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전까지 우리는 죄질 경향 가운데 살아 갑니다. 죽은 나란 옛 사람,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죄와 싸우라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하는 형국입니다. 본문은 이 싸움의 비결을 알려줍니다. 첫채는 외로이 혼자 고군 분투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인식 입니다. 본문에 함께란 표현이 10번, 합하여란 말이 3번 (3,4) 예수님과 함께란 말이 4번(4,6,8)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가 2번(5) 그리고 11절에 색다르게 “예수님과 같이”란 표현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믿는 순간 예수님과 강하게 연합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그렇게 만듭니다. 가까이 함께하며 죄와 싸워 이길 힘을 공급해 줍니다.

죄와 싸우는 비결: 예수님과 연합



예수님과 신자의 연합 잊지 않도록 핵력을 예로듭니다. 핵력은 원자핵 속에 중성자와 양성자를 묶어주는 강한 힘입니다. 중력의 10의 40승 배입니다. 그래서 이 힘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위력 큽니다. 핵력이 없다면 세상의 물질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핵력보다 더 강한 힘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형국을 가장 실감 나게 표현한 성경이 로마서 8장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절대 끊을 수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죄와 싸우는 비결 두번째는 본문 3,4,6절에 나옵니다. 본문에 세례라는 예식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공표하는 의식이며 예수님이 직접 행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또 생명은 성경은 세가지를 말합니다. 헬라어로 프쉬케, 비오스, 조에 셋 입니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의학적 목숨입니다. 비오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목숨입니다. 조에는 우리에게는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 죽음이 없는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조예 곧 영원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 결혼한 자매님들 생명을 잉태하면 입덧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입덧은 지금까지 익숙한 것을 끊어내는 현상입니다. 아기 중심으로 체질이 변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본래 체질과 다르게 먹고 싶은 것이 생깁니다. 기혼 형제들은 이 입덧 때문에 덫에 걸려 평생 잔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한겨울에 딸기를 못사다 줘서 덫에 걸립니다. 우리도 거듭나 새생명 가운데 있으면 죄에 대한 거부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행하다는 영어성경으로 걷다(walk)로 나옵니다.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혼자 외로이 걷는 삶이 아닙니다. 어디 예수님뿐입니까? 교회 지체가 되어 명주로교회 동역자들도 함께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홍해를 나온 백성이 광야에 첫 번째 만나는 일이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걸을 때 꼭 필요한 일이 서로 뭉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수나 원수들의 공격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빌2:2)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물먹은 눈덩이가 뭉쳐지듯 잘뭉쳐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이 행한 일들을 공유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으면 우리 옛사람도 함께 죽었고, 장사 되었으면 함께 장사 되었고,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했으면 우리도 부활했습니다.(5,8,9)
이제는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삶이되었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믿는자의 삶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에 이미 못박힌 옛사람


본문 6절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걸려 있는 나는 옛사람입니다. 옛사람과 동의어로 죄의 몸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죄의 몸은 죄에 완전한 지배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를 져도 갈등이없고 자연스러웠을 때입니다. 이 죄의 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죽음의 뜻은 “끝장났다. 멸했다. 폐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에서 벗어난 자유의 몸이되었습니다.

1948년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를 합니다. 회의장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단상 앞에 큰 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관인지 궁금해합니다. 오지에서 힘들게 선교하다 소천한 선교사의 관일까? 아니면 더 유명한 사람일까 했습니다. 사회자는 누구인지 말하지않고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보며 조의를 표하라 합니다. 관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답니다. 관속에는 대형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졌습니다. 자신의 장례 절차를 치르게 한 셈입니다. 그날은 의견 충돌 없이 만장일치로 모든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장례식장 관



이 예화를 통하여 죄와 싸우는 비법은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 죄의 몸이 죽어 걸려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십자가로부터 이길 능력을 공급해 줍니다.(고전1:18)

죄와 싸우는 비결: 여기라



죄와 싸우는 세번째 비결은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 비결은 여기라는 단어 뜻에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표현은 로마서에만 33번 나오고 신약 전체 180번 나옵니다. 예수님 안은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관계적인 개념이요. 통치의 개념입니다.

“여기라”는 단어는 강한 명령입니다. 로마서 1-5장까지는 명령 표현이 없습니다. 6장에 와서 비로소 권면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첫 단어가 여기라입니다. 여기라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 영어로 “count, consider”로 그렇게 간주하라, 그렇게 계산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의 옛사람, 죄의 몸이 십자가에 죽었다. 예수님 과 연합하여 이제 그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 안에 있습니다. 여기라는 이 사실에 대한 김정적인 느낌이 없어도 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새사람이 되었음을 강력하게 여기라입니다. 이것이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죄와 이기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참고구절
로마서6:1-11


““[1]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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