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 남편 일화
믿지 않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 집회에 아내의 반협박에 못 이겨 끌려 나왔습니다. 마침 주제 말씀이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은 1절부터 뱀이 말을 합니다. 남편은 황당해 합니다. 남편은“성경이 진리라 그러더니 단군신화 수준이 아니야?” 또 “뱀이 말하는 거나 곰이 마늘 100일 먹고 사람 되는 거와 뭐가 달라?” 생각합니다. 급기야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저주 받고 에덴 동산을 쫓겨납니다. 불만이 많은 불신자 남편은 “아니 그 선악과는 왜 그리 성급하게 따먹어서 화를 자초해! 가을에 땅에 떨어지면 주워 먹으면 될 거 아니야?”라고 했답니다. 선악과는 과연 1년이면 익어 떨어지는 과일이었을까요? 아니면 계속 붙어 있는 과일이었을까요? 궁금하기는 합니다. 우리도 복음을 처음 들을 때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이 창세기 3장입니다. 그다음은 예수님 죽음입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장소도 한국에서 8,000km나 떨어진 지구 반대편 이스라엘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입니다. 여기서 30대 유대인 청년의 비참한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은 이해 불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 가지 당황스러움에 대한 답변을 줍니다. 답변교리는 한 사람의 원리입니다. 현재 인구는 79억7천만입니다. 지구상 언어는 7,139입니다. 민족은 약3,000민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민족을 두 계열로 분류합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어떤 계열에 속하였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계열입니까?
12절부터 봅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때문에 죄가 문 열고 들어왔습니다. 죄의 삯, 죄의 결과로 사망이 왔습니다. 본문은 죄를 의인화 합니다. 죄를 인격을 가진 실체로 소개합니다. 이유는 죄는 사단이라는 존재의 유혹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들어왔다는 표현은 “침공했다. 집어삼켰다.”는 뜻입니다.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 듯이 죄가 휩쓸었다는 표현입니다. 죄와 사망이 인류를 휩쓸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이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사망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의 죄에 기원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를 신학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얼마나 깨끗하고 천진난만합니까? 눈망울을 보십시오. 빠지면 우리가 정화될 듯합니다. 아이들을 죄인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런 상상 한번 해봅니다. 깨끗해 보이는 아기들을 세상과 차단한 별도의 공간에 모아 키우면 이들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죄의 인자를 가집니다. 커가면서 죄는 튀어 나옵니다.
파리대왕 일화
파리 대왕이라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세상 때가 덜 묻은 청소년 12명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불시착 합니다. 처음엔 서로 서로 도와가며 구조요청 계획도 세우고 잘 생활합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무인도는 지옥으로 변합니다. 두 진영으로 나누어서 싸우고 살인까지 합니다. 영화는 인간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인간은 고등동물로 진화해왔다. 조금 문제가 있는 거는 아직 진화가 덜 되서 그렇다. 더 진화하면 괜찮아 진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나빠 집니다. 범죄율도 증가하고 악해집니다.
죽음의 원인
본문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인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와 죽음은 인류의 대표자인 한 사람의 죄에서 기원했다 합니다. 본문은 10구절에 걸쳐 한사람이란 단어를 12번 언급합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은 14절 하반절에 나옵니다.“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입니다. 본문은 아담을 특이하게 소개하죠? 오실 자의 모형입니다. 모형은 원형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원형은 예수님입니다. 모형은 표적, 예표를 말합니다. 표적은 표지판의 기능을 말합니다. 표지판이 기리키는 장소로 가면 실체가 나옵니다. 아담이라는 표적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는 인류의 대표로 원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당연이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멀고 먼 미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연대책임을 지고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똑같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우리 속담과 반대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교리입니다. 서양의 인과율 법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원죄, 대표성의 교리
본문 14절에는 원죄 교리, 대표성의 원리, 연대책임의 원리가 다 담겨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1-10절까지 참고합니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본문은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 후 멜기세덕이라는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사건입니다. 멜기세댁은 오실 예수님을 예표 합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입니다. 이 레위는 아브라함의 몇 대 후손입니까? 3대입니다. 앞으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야 하고 그다음에 야곱이고 야곱의 12아들 중 셋째가 레위입니다. 본문은 3대 지나 태어날 레위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같이 바쳤다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리에 있다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날 모든 자식들을 말합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도 이미 그 허리에 있었다는 셈이 됩니다.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도 함께 범죄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와 인류의 마지막을 한눈에, 한도면 위에 놓고 보십니다. 인류는 아담으로 인해 원죄를 안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왜 이 교리가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가 그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도 함께 못박힌 것으로 취급합니다.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한 셈이 됩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과 8,000km라는 거리와 인종, 국경을 초월하여 예수님 한 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교리입니다. 한 사람의 교리는 중요합니다. 창세기 3장 아담 사건이 신화이면 원형인 예수님도 신화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교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님 한 분이 영 단번에 우리의 죄를 사하신 교리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형인 아담과 원형인 예수님
15절부터는 모형인 아담과 원형인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15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으로 기인한 것은 범죄, 심판, 정죄입니다. 예수님으로 기인한 것은 은사, 은혜, 선물, 칭의입니다. 이 넷의 공통점은 값없이입니다. 모두 무상으로줍니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빠진다는 속담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 속담의 유래를 찾아봤습니다. 바리깡이라는 머리를 깍는 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 이발소 가지 않고 공짜로 깎았습니다. 바리깡으로 많은 사람의 머리를 깎으면 위생이 엉망입니다. 공짜로 깎은 사람이 두피전염병에 걸려서 머리가 빠지는 일이 많은데서 그런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입니다. 공짜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의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는 세리와 죄인들은 용서하셨지만 이들은 혹독하게 비난합니다. 구원은 내가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할 때 주어집니다. 버티면 안 됩니다. 우리 추석 때 선물 많이 주고 받습니다. 선물 대신 현금 박치기를 하기도 합니다. 선물을 받을 때 감사하다는 마음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다 빚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는 되갚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부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과 용서와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소망, 기업, 자녀로서의 특권은 우리가 감히 되갚지 못합니다. 되갚을 엄두도 못낼 만큼 큰 선물입니다. 되갚으려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내 목숨을 내놓아야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선물이 넘쳤다는 표현 앞에는 Super란 말이 붙습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17절로갑니다.
신자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은 아담 안에서 사망의 왕 노릇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을 비교합니다. 우리에게 사망, 죽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시신을 대단히 무서워합니다. 무섭다는 사실은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흙을 재료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생명이 떠나간 시신은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왜 흙을 무서워합니까?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은 자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경쟁은 타인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경쟁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게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심리학에서 인간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눕니다. 인간의 의식은 빙산에 일각에 비유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무의식은 상상한 일과 실제 행동한 일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무의식은 정말 그를 해친 행동을 한 듯한 죄책감듭니다. 예수님도 이런 원리를 말합니다.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했다합니다. 형제를 미워만 해도 마음에 살인했다합니다. 특히 아기들은 무의식에 더 많이 지배받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운 나이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자주 미움의 대상이됩니다. 우유를 빨리 안줄 때, 기저귀 빨리 안 갈아줄 때 그렇습니다. 아이가 무의식 중에 갖는 미움은 엄마한테 정말 위해를 가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위해를 한 만큼 죄책감도 갖습니다. 이런 무의식의 감정이 어려서 마음에 쌓이고 싸여 우리는 모든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습니다. 가까운 사람 특히 부모가 돌아 가시면 더 많습니다. 이 죄책감은 죽은 자가 자기를 해 할지도 모른다는 인과응보의 감정도 생깁니다. 그래서 죽은 혼령이 구천을 떠돌다가 자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것이 시체를 보고 무섭고 공포스럽게 느끼는 원인 입니다. 우리의 장례문화에 새끼줄을 두르고, 거친 베옷을 입고, 슬프게 곡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베일을 뒤집어 쓰는 행동은 모두 자기에게 미리 벌을 가해서 죽은 혼령이 자기에게 해를 가하는 일을 차단 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문화입니다. 나는 이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까 죽은 자가 나에게 더 이상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군대 장례식에서 하늘을 향해 총이나 대포를 쏘는 의식도 하늘에 혼령을 향해 쏘아서 위해를 못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은 없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 혼령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지칭할 때 영, 혼, 육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서 표현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은 분명하게 구분하여 주지 못해 약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이중에 혼은 처녀귀신, 총각귀신, 몽달 귀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 숨 쉬며 움직이게 된 상태의 모든 사람을 지칭하여 혼이라고 합니다. 창2:7절에 생령도 원어는 산 혼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서 생령도 혼입니다. 창46:27절에 야곱이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을 때 곳센 땅으로 이주한 사람이 70명이었는데 이 70명을 70혼이 들어 갔다고 표현합니다.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숨을 쉬고 활동하는 사람을 보통 지칭할 때 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게 된 상태를 영이 살았다고 표현합니다. 만약 귀신을 봤다면 모두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사림이 죽으면 천사의 수종을 받아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불 꽃같은 눈을 피해 구천을 떠도는 원귀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된 지금 우리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합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은 이제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한 우리 수명은 시편 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합니다. 70, 80이 꼭 숫자적인 연수는 아닙니다. 요즈음은 70이면 청춘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이 땅에서 허락하신 수명은 다하게 하신다는 믿음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해야 할 일은 마치게 합니다. 하나님 손해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짐엘리엇 형제님같이 20대에 순교 사명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신다는 강한 믿음 가져야 합니다. 배만 조금 아파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사망이 쏘는 독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죽음은 예수님은 잠으로 보십니다. 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한잠 자고 나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성도의 죽음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관문이 아닙니다. 천국과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끝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예수님이 오늘 밤에라도 오시면 공중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죽음의 맛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망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신분
본문은 생명이 왕 노릇한다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을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신분은 왕입니다. 마태복음 25장34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한 나라를 상속받는 다고 증거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6장2절은 보좌에서 세상과 천사까지도 판단하는 입장에 선다고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현재 왕인 신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왕 노릇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과연 왕 노릇 제대로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위에 군림하고, 지시하고, 찍어 누르고,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란 전제가 붙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이 왕 노릇이 아닙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왕 노릇하는 자들만 있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중심에는 어린양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린양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런 왕 노릇하는 분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 이곳 교회에서 작은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도의 왕 노릇 달라야 한다는 것 강조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
18,19절은 아담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순종이라는 값비싼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히5:9절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도 순종하심으로 가셔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해 주었습니다.
율법의 역할과 기능
계속20절을 보십시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본문은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13절도 연관구절입니다.“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본문은 율법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의 애매한 죄들이 율법 이후에는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죄의 지식이 증가했다고 보셔도 됩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PCR 검사를 많이 하면 확진자가 늘어나는 원리와 같습니다. 이 뜻이 율법이 들어옴으로 범죄가 더해졌다는 의미입니다. 20절 하반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뜻은 율법의 기능으로 나의 죄들을 현미경처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이는 만큼 하나님께 용서받은 은혜가 더욱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말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죄의 왕노릇, 은혜의 왕노릇
21절은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죄의 왕 노릇과 은혜의 왕 노릇을 비교합니다. 은혜의 왕 노릇인데 이 은혜는 영생에 이르게 하여 준다고 결론 맺습니다. 보통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면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런데 꼭 그것만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많습니다. 햇빛, 공기, 물 하나님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지구라는 거대한 공 위에서 우리가 오늘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중력이라는 이름으로 꽉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공기도 없는 우주 밖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기에 죄 사함의 은혜, 자녀로서 특별히 돌보시는 은혜, 생명 보자기에 꼭 싸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 헤아려보면 헤아릴 수 없는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본문은 은혜가 영생이라는 기차역으로 도달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영생하면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지 않는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요한복음 17:3절이 영생에 대하여 잘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의 생명은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살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명확히 알게 된 상태입니다. 알게 된 만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교제는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영생을 가졌나 안 가졌나 절대 의심하지 않으시기바랍니다.
성경참고구절
로마서5:12-21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3)모형이라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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