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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고운구슬-명주(明珠)
성경강의원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로마서1:6-17절)

by 명주(明珠) 2024. 8. 23.

로마교회의 시작

우리가 잘 알듯이 1세기 로마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도시와 비교하면 로마교회는 작았습니다. 하층민이 많습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 부적응자들이라는 오명도 썼습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어서 신앙의 뿌리가 약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사도바울은 직접 로마에 가서 이들을 돕고 싶었는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는데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라는 거대한 세상 숲에서 성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복음의 진수를 가르칩니다.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자들



먼저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방금도 언급했듯이 로마교회는 기죽기 딱 맞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기죽지 마십시오! 주눅들지 마십시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위로의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넌 내꺼야” “내가 찜했어, 아무도 건들지마! 로마 황제도 못 건드려! ”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



또 기죽지 말아야 할 이유는 7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과분한데 거룩한 자로 세웁니다. 우리 신앙의 ABC는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사랑 빼면 시체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모든게 다 흔들립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공격합니다. 우리도 세상이 로마제국처럼 커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내 밥줄을 쥐고 있는 권세 앞에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러나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사랑의 대상입니다. 또 영적으로 보면 이름 앞에 성자가 붙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성어거스틴에게만 성자가 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붙습니다.

은혜와 평강을 기원




그다음 로마 성도들은 무엇이 필요합니까? 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평강입니다. 평강의 헬라어는 “에이레네”입니다.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결합하다입니다. ‘둘이 하나로 결합 해서 평강을 이룬다.’입니다. 평강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우리”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라고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친밀감,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고,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 합니다. 요즈음 평강이 없는 시대요 평강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코로나 시대이고, 전쟁, 지역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참 평강을 누리는 자들 되길 기도합니다.

로마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칭찬



8절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로마 성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사도바울 8절에서 과장법을 씁니다. 당시 1세기 로마 인구수를 땅속에 묻힌 주화 더미로 추측합니다. 400~500만 명입니다. 로마교회 성도 수를 어림잡아 1,000명이라 한다면 인구 대비 비율 0.0002%입니다. 적은 수 신자 믿음이 온 세상에, 동네방네, 전파되었습니다. 요즈음 같이 SNS가 발달한 시대도 아닙니다. TV, 유튜브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적게 보이는 믿음도 크게 보는 시각 배웁니다. 사도바울은 세계의 심장이라 부르는 로마에 믿음을 가진 몇몇 성도가 있다는 사실로 로마 전체를 소망스럽게 봅니다. 우리도 믿음을 귀하게 여기고 크게 평가하는 자세 필요합니다. 교회는 실력과 능력을 크게 보지 않고 내면에 숨은 믿음을 크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늙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열국의 아비로 평가합니다. 사라는 열국의 어미로 봤습니다.

틀에 매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



8절은 과장법이 심합니다. 문법도 파괴합니다. 본문은 먼저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개역 한글은 첫째로 번역합니다. 첫째는 했으면 두 번째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집필하다 갑자기 로마 성도 믿음에 감동하여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내용을 써야함을 잊어버렸고 그 상황을 반영했다고 주석서에 나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형식에 매이지 않는 자세 배웁니다.


성령의 역사는 틀에 매이지 않습니다. 처음 대표 기도하는 분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떠합니까? 그분이 몇 마디만 하더라도, 기도의 형식과 내용은 서툴러도 감동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여 설교 시간 지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밤 늦도록 가르침을 계속하자 유두고라는 청년은 3층에서 졸음을 못이겨 1층으로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일도 있습니다. 우리도 고정된 틀에 갖혀 진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실천하는 신앙



9절을 보십시오.“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본문에서는 “내 심령으로 섬기는 이”란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심령으로는 NIV영어성경은 온 마음으로 섬기는( whole heart)이고 원어는 영으로(Sprit) 섬기는 입니다. 바울은 매사에 마음을 다하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따로국밥 신앙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것 따로 생활 따로 아니었습니다. 그의 부업은 텐트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도 심령으로 마음을 다해 섬깁니다. 우리 자칫하면 교회신앙 따로 있고. 집 신앙 따로이기 쉽습니다. 직장신앙 따로 있고 사업장 신앙 따로 있기가 쉽습니다.

예화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예화입니다. 몇 천 명이 모이는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하려고 단에 섰습니다. 이때 검은 썬글라스를 쓰고 검은 양복 입은 2명 괴한이 소총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여기 예수님을 위해 총을 맞아도 좋다는 분만 남고 나머지는 다 나가십시오.”했답니다. 그랬더니 20명 정도 남고 혼비백산 밖으로 나가더랍니다. 그러자 괴한 두 명은 조용히 앞자리로 가 앉더랍니다. 그리고 목사님께 “이제 설교 시작하시죠. 위선자들 밖으로 다 나갔습니다.” 했답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화이지만 위선적인 신앙 가지면 안됩니다.

무장괴한

자신의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


10절에서 14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로 여러번 가고자 합니다.(10,13) 로마성도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1)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론에도 언급했듯이 길이 막혔습니다. 사도바울 기질상 대단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탱크와 같은 추진력과 열정가졌습니다. 길이 막히면 포크레인으로 길을 뚫어서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가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이 환경을 통하여 길을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막히면 뚫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다리거나 돌아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가 로마에 간 방식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아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자세 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방문의 이유



그러면 바울이 로마에 가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 관광입니까? 로마 건물 탐방입니까? 황제를 알현하고 정치적인 목적실현을 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로마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견고케 함입니다. 로마에는 어린 성도가 많았습니다. 말씀을 꼴을 부지런히 먹고 자랄 필요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합니다. 열매는 생명의 열매도 되고 성령님의 열매도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12절입니다.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과 로마성도의 영적 수준차이는 큽니다. 바울 은 교만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삼층천도 본 사람입니다. 자랑 거리로 삼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성도에게 피차 안위함을 얻겠다고 합니다. 피차란 단어에 주목 합니다. 로마 성도들과 상호교제를 통하여 바울도 마음의 힘과 용기를 얻고자 합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자세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는 다르고 다양합니다. 성도간에 간증을 서로 나누며 안위함을 얻는 자세 필요합니다.

빚진자의 마음



15절을 보십시오. 15.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온 세상 만민에게 빚졌다는 마음 가졌습니다. 빚졌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2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 빚진 마음이 있으면 갚으려는 생각으로 꽉 찹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빚졌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했던 자기를 용서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진 빚을 세상 만민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누구 든지 복음으로 빚을 갚으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은 빚을 충분히 갚고도 남을 자산이 있었습니다. 빚을 져도 채무 능력이 있어야 갚을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파산합니다. 바울 나누어줄 영적 자산이 많았습니다. 나누어줄 영적 양식이 많았습니다. 그 자산은 복음 자체이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도 됩니다. 지위고하 인종 국경 넘어 세상 만민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 하나 때문에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빚 갚고자 열정을 다하는 모습 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16절을 참고합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 헬라인은 세상 만민들을 대변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힘을 중시하는 당시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부끄러울 요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도 부끄러움의 요소입니다. 파리 날리던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시골 나사렛에 가난한 목수 출신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십가가에 힘없이 죽으시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놀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험난한 세상을 살려면 자기 PR도 하고 약간 교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있다합니다. 우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덴에서 설교를 들은 철학자들은 말장난한다고 놀렸습니다. 우리도 간혹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니다. 어떤 분은 교회 올 때 성경을 신문지에 싸서옵니다.

루터의 예화



바울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는 이유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합니다.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한 능력입니다. 복음은 관념, 이념, 철학이 아닙니다.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 능력은 2000여년전 이스라엘 땅에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까지 힘이 미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17절에 나옵니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독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구교에서 나온 신교라고 해서 개신교라 하고 영어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합니다. 프로테트탄트는 저항이란 뜻입니다. 이유는 16세기 독일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데서 유래합니다. 루터에게 저항의 불꽃을 당겨준 말씀이 오늘 17절 말씀입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받게 된 에피소드가 3가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루터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많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되어 고행을 하고 금식도 하고 자기 육체를 괴롭히면서 구원의 확신과 마음에 평화를 얻고자 했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다 로마서를 연구하다 로마서1장17절 말씀에 이르러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두번째는 루터가 교회 일로 로마에 가려고 알프스 산을 넘다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문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이 마치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합니다.

세 번 째는 그는 고행을 하기 위해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려고 올라간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올라 가는 도중에 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 순간 고행을 중단하고 도중에 내려왔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인간은 고행이나 공로로 구원받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굳게 붙듭니다.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노력으로 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의인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디. 믿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줍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이런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 정죄감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끝으로 본문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의 영어 숙어는” from A to B“로 A로부터 B까지란 뜻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참고성경구절
로마서 1장6-17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4 헬라인이나 3)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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